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38화 (38/75)

12. 이토록 행복과 아픔이 (5)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물소리가 퍼졌다. 솜사탕처럼 올라선 거품이 욕조 안을 한가득 채우고 있어 몸을 겹친 채 창밖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나신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누가 이런 방을 결제할 줄 알았나. 철컥 카드 키를 꽂은 태욱이 문을 열자 조금 전까지 짠 내음을 맡으며 바라보던 밤바다가 탁 트인 오션 뷰로 눈 안에 들어왔다.

그러나 당연히 그걸 감상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탁, 반찬 꾸러미를 급하게 내려놓고, 스르륵, 그녀를 끌고 와서는 츄릅, 입술부터 먹어 삼키는 남자 때문에 호텔방을 구경하는 건 사치가 되어 버렸다.

나를 봐야지, 어딜 봐. 태욱은 서영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티셔츠 안으로 들어온 손이 뱀처럼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와 브래지어를 벗길 때도 또렷이 그녀만 내려다보는 눈빛이 때로는 벅차기도 했다.

오늘따라 더 숨이 막혔다. 그의 행동도 어쩐지 평소와는 달랐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몸을 가두고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안아 들었다.

악.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서영은 걸쳐지듯 그에게 안긴 채 침대로 가 무너지는 것처럼 눕혀졌다. 태욱은 아직 와이셔츠조차 벗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이 이토록 그를 절박하게 만드는지 이유를 물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를 받아 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어지러웠다. 몸을 태우는 강력한 압박에 허리가 여러 번 꺾였다.

윤서영. 윤서영. 이름 속에 녹아든 그의 애절한 부름이 때론 아프기도, 무턱대고 완벽한 행복을 떠오르게 만들기도 했다. 사랑을 계산한 적은 없었지만 의심할 수 없는 마음이 몸을 통해 증명되는 기분이었다.

서영은 감당하지 못할 거면서 태욱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가 조그마한 자극에도 미친 듯이 날뛰는 짐승처럼 그녀의 안을 괴롭혀도 괜찮았다. 아파도 좋았다. 이게 사랑이라면, 이 사랑을 받아들이겠다고 어느 누군가에 고백하는 정사였다.

그때 태욱이 흐르는 줄도 몰랐던 그녀의 눈물을 핥으며 허리를 세웠다. 찍어 내리듯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사나운 몸짓이 밤바다 사이로 멀어지며 서영은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힘마저 놓아 버렸다. 그 이후 기억은 없었다.

“배 안 고파?”

큰 손이 서영의 홀쭉해진 배를 쓰다듬었다. 서영은 미지근한 물에 담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느리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잠든 그녀를 언제 욕실로 데려온 건지 묻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체력이 모두 소진되어 버렸다.

멍하니 그의 몸에 기댄 채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는 게 꿈같기도 했다. 서영이 반응이 없자 태욱은 심심했는지 이런저런 손장난을 치며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그리게 만들었다. 쪽쪽, 귓가에 키스를 할 때면 미안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뭐가 그리도 미안할까. 몰아붙인 정사 때문이라면 그녀가 더 고개를 들 수가 없는데. 늘 한 번이면 나가떨어져 버렸다. 남들보다 음식도 더 많이 먹는데 왜 잠자리에선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몸보신을 위한 요리들을 따로 챙겨 먹어야만 하는 건가.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늘 먹는 음식이 살로 붙지 않아 안타까워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자 서영은 놀라 반쯤 몸을 일으켰다.

“지금, 몇 시예요?”

서영이 급하게 두리번거리자 태욱은 예상했던 것처럼 뒤쪽에 놓아두었던 그녀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미끈거리는 손부터 닦으라고 수건까지 내밀자 오히려 민망해질 정도였다. 서영은 다시 욕조에 앉아 손을 닦고 핸드폰을 만졌다. 다행히 시간은 그렇게 많이 흐르진 않았다.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아 지하철을 탔고, 도착해서 반찬 정리를 하다 보니 늦어졌다는 내용의 문자를 어머니에게 보냈다. 미안함에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조금 뒤 답장이 들어왔다. 알았다고, 건강 챙기라는 평소와 같은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야 서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이 모든 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남자가 의식되어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엄마가, 도착하면 꼭 연락하라고 그러셨거든요. 걱정하니까…….”

“그래. 잘했어.”

태욱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핸드폰을 다시 가져가 뒤에 놓았다. 몸을 기대라는 그의 눈짓에 서영은 잠시 욕조 바에 팔만 걸친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배고파요.”

그럴 줄 알았다며 태욱은 짧게 웃고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앗. 내, 내가…… 할게요.”

“걸을 힘도 없을걸.”

그는 다시 평소의 강태욱으로 돌아와 얄미운 말을 꺼냈다. 서영은 그것에 감사해하며 태욱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가 샤워기를 틀어 그녀의 몸에 묻은 거품을 씻어 낼 땐 자꾸만 웃음이 났다. 웃지 마. 태욱이 무섭게 눈을 치켜떴지만 서영은 대담하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무도 모를 거야.”

서영이 속삭였다.

“강태욱이…… 이런 남잔걸.”

“몰라도 돼.”

그가 화가 난 것처럼 입을 일자로 그렸다.

“…….”

“너만 알면 돼.”

정말, 이러긴가. 서영은 가슴이 또 찡하며 코끝이 시큰거렸다. 사랑이 그저 기쁜 감정만 주지 않는다는 걸 주변에서 보고 배웠지만 이토록 행복과 아픔이 같은 깊이로 오갈 줄은 몰랐다. 아프면서도 행복했고, 행복하면서도 아파질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그의 고백이 심장이 꽂힐 때면.

“……팀장님.”

서영이 가만히 그를 불렀다.

“무슨 일 있어요?”

이젠 물을 수밖에 없었다.

“…….”

태욱은 말없이 서영을 바라보다 흐리게 웃었다.

“……귀신이네. 눈치가 빨라졌어.”

“안 좋은 일이에요?”

서영이 걱정하는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떤 여자랑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잖아. 일은 많고, 내 몸은 하나고. 윤서영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결국은 시시한 투정이었나. 서영은 잠시나마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며 안도의 웃음이 흘렀다. 그 막막함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태욱과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너무 붙어 있는 것도 안 좋대요. 한 번씩, 애틋한 게 좋다고.”

서영은 아닌 척, 다른 말도 해 보았다.

“이 대리가 그래?”

이상한 걸 가르쳐 놨군. 그렇게 중얼거린 태욱이 못마땅한 얼굴로 서영의 몸을 닦아 냈다.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서영은 모든 걸 그에게 맡겼다.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뭐 시킬까?”

서영을 침대 위에 데려다 놓고 태욱이 가운을 걸쳐 입었다. 그러곤 널찍한 공간 안을 가로지르며 전화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서영은 룸서비스라는 걸 시켜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여기 있는 거 다 시키지, 뭐.”

“아니.”

태욱이 전화를 드는 순간, 서영이 뒤늦게 고백했다.

“나…… 사실은 집에서 저녁 엄청 먹고 왔어요.”

그 많았던 음식이 어느새 소화가 되어 그녀는 또다시 배고픔을 느끼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태욱은 알겠다며 간단한 요리 몇 가지를 시켰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꼭 여행을 온 것 같기도 했다. 태욱과 제대로 여행을 가 본 적은 없었다. 세 번째 소원으로 말해 볼까, 즉흥적인 마음이 생겼지만 어쩐지 소원을 아끼고 싶었다.

욕심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딱 세 가지만 원하겠다고 했는데 벌써 두 가지나 써 버렸다. 그것도 무언가를 거절했다가, 다시 그 거절을 취소하는 것으로 말이다. 바보 같다고 하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쓰는 말인가 싶어 반성의 웃음이 흘렀다.

“힘들면 좀 자 둬. 룸서비스 오면 깨워 줄 테니까.”

침대로 다가온 태욱이 서영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팀장님은요?”

“나는…… 그런 윤서영 보고 있는 거지.”

정말 싱겁다고 놀려야 하는데 또 울컥 눈물이 차오르고 말았다. 서영은 톡톡, 자신이 누워 있는 옆자리를 두드렸다. 같이 눕자고 눈짓하자 태욱이 난색을 표했다. 감당도 못 할 거면서. 태욱은 가운을 벗고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냥 누워 있기만 하자는 거였는데.

서영의 뜻이 전달되기도 전에 몸이 끌려가고 진한 키스가 시작되었다. 일방적으로 혀가 얽히자 아랫배가 좀 전의 고통을 기억하듯 아릿한 둔통을 일으켰다. 그제야 아래가 아직도 얼얼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밀어 낼 수도 없었다.

태욱이 살결을 어루만지며 서영을 자극시켰다. 신음이 즙처럼 터지고 몸이 자글자글 끓는 것처럼 흐느적댔다. 그의 단단한 손이 피부를 스치고, 살덩이를 강하게 압박하고, 예민한 곳을 매만질 때면 온몸이 저릿하게 아팠다. 그만해 달라고 그를 끌어안으면 태욱은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깊이 파고들었다.

그와 결합되며 아득한 세계가 열리면 또 다른 감각들이 정신없이 솟구쳐 올랐다. 그의 몸짓이 조금씩 더 거세질 때마다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건져 주지 못할 것 같은 아래로 떨어져 내리면 그가 다시 끌어 올리는 순간이 반복되었다. 그녀가 붙잡고 매달릴 사람은 오직 강태욱 한 사람뿐이라는 것처럼 섹스는 노골적인 소유욕의 다른 말 같았다.

삐……. 삐…….

룸서비스를 알리는 벨이 울렸지만 태욱의 몸짓은 멈출 생각 없이 더 사납게 속도를 더했다. 서영은 고통을 참지 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태욱은 혼을 내듯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고집스럽고 단호한 그의 몸짓을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서영은 그에게 끝없이 빨려 들어가면서도 손을 들었다.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태욱을 올려다보며 그의 반듯한 이마와 깊은 눈두덩이를 찬찬히 쓸었다. 곧 입술로 내려온 손이 그의 입 속에 머금어졌다. 쪽쪽, 손 키스를 건넨 태욱은 서영을 보며 웃었다.

분명 웃음이었는데. 그게 울음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서영은 겁이 나 몸을 일으켜 태욱을 끌어안았다. 그가 깊게 욕망을 쏟아 낼 때야 안심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은 그 밤 내내 서영을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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