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37화 (37/75)
  • 12. 이토록 행복과 아픔이 (4)

    밤바다가 이렇게 낭만적이었나. 서영은 감상에 젖고 말았다. 자꾸만 입가에 웃음이 샜고, 행복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고,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았던 검은 너울이 이제 전혀 두렵지 않았다. 모두 그녀의 등 뒤에 서서 따뜻한 가슴으로 자신을 지켜 주는 남자 때문이었다.

    “……추워?”

    태욱이 묻자 서영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장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서영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은은하게 묻어 있던 그의 향기가 서영의 몸을 감싸고 코끝에 닿았다. 곧 태욱의 너른 가슴이 다시 그녀의 작은 등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태욱의 손이 당연한 것처럼 그녀의 티셔츠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놀란 서영이 뒤돌아 그를 노려봤다.

    “여, 여기, 밖이에요.”

    “그래서?”

    태욱이 뻔뻔하게 웃었다. 훈재와 조금 과하게 술을 마셨다고 했다. 차는 버려두고 택시를 잡아탄 후 서영이 있는 인천으로 가자는 말만 했단다. 서울과 인천이 바로 옆 동네인 것처럼. 택시비가 얼만데. 말을 꺼내려던 서영은 순간, 입을 닫았다. 그가 돈 많은 집안의 손자라는 걸 깜박했다. 그 이유가 아니라도 세계 어디든 날아갈 비행깃값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팀장님, 주사가 아주 위험하군요.”

    서영의 경고에 태욱이 더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위험한 게 뭔지도 모르면서…….”

    어느새 그의 커다란 손이 서영의 뺨을 어루만졌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무슨 사연이라도 감춘 것처럼, 어두운 우물에 잠긴 회색빛 짙은 눈이 더 사람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렬한 기운을 타고 깊어지는 눈동자가 가슴을 태우고 아랫배까지 울리게 했다.

    “모르고 싶어요.”

    간단히 대답한 서영이 다시 돌아서려 하는데 그의 두 손에 얼굴을 붙잡혔다. 바짝 끌어당기는 힘에 시선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래서, 내가 만지는 게 싫어?”

    “그런 게 아니라…….”

    피식, 웃음을 터뜨린 태욱이 장난이었다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윤서영. 이름을 부르고, 미안, 또 사과하고, 그러면서 또 이름을 불렀다. 주사를 부리는 게 확실했다.

    강 팀장은 술버릇도 없다더라. 진짜 인간계가 아닌 것 같다고. 심장 뛰는 소리를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꼭 확인해 보라며 심각하게 당부하던 지선이 떠올라 서영은 웃음이 났다. 쿵쿵쿵. 그의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뛰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몰랐으면 했다. 그를 안을 수 있는 사람이 그녀뿐이었으면 좋겠다.

    “들어가야지.”

    “……응.”

    서영은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대답해야만 했다. 그녀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계속해서 울렸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분명 아버지 석완일 것이다. 태욱도 그걸 느꼈는지 서영을 보내 주려 했지만 안고 있는 그녀의 몸을 쉽게 놓아주지 못했다. 이렇게 안고만 있어도 좋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란 말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태욱이 정신을 차린 것처럼 그녀의 몸을 떼어 놓았다.

    “걱정하신다. 들어가.”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보자 이상하게도 섭섭했다. 뭘 어쩔 셈인가.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에 와 놓고 그와 몇 시간째 바다만 보고 있었다. 태욱은 내일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꼭 헤어지는 사이처럼 굴지 말자. 서영은 알겠다고 답하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도착하면 전화해요. 안 자고 기다릴게.”

    서영의 당부에 태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은 돌아서 걷다 깜박 잊었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렸다. 태욱의 재킷이 아직도 그녀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넥타이는 어디다 버렸는지 목의 단추 몇 개를 풀고 와이셔츠만 입은 채 서 있는 남자가 어딘가 허술해 보여 또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사람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해서 한편으론 다행스러웠다.

    “이거, 가져가야죠.”

    서영이 재킷을 내밀자 태욱이 그 손을 붙잡아 다시 그녀를 안았다.

    “팀장님.”

    “이러면서 한 번 더 안으려고 걸쳐 준 거야.”

    몰랐지, 하며 그가 더 꽉 그녀를 안았다. 정말 머리 좋은 남자를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서영은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고, 벌어진 입술은 곧장 그의 입술에 잡아먹혔다. 어쩌려고. 그는 침대에서나 하던 수위 높은 입맞춤을 이어 갔다.

    야옹.

    앙칼진 길고양이의 방해가 아니었다면 큰일을 치를 뻔했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떼어 낸 태욱이 서영을 떠밀고선 이번엔 자신이 먼저 돌아섰다.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서영은 한 손엔 재킷을 쥐고, 다른 손은 늘어뜨린 채 검은 밤의 골목을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봤다. 고양이가 그런 서영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지금 간다고?”

    “응. 죄송해요.”

    “아니, 그게 죄송할 건 아닌…… 일단 있어 봐.”

    영희는 전화도 받지 않고 불쑥 나타난 서영이 갑자기 밤중에 서울로 돌아간다는 말에 들려 줄 반찬부터 챙겼다. 아버지 석완은 그저 거실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지만 서운한 기색이 표정 안에 가득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했던 마음을 모르지 않을 딸인데. 그만큼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속이 헛헛했다. 이런 날을 전혀 상상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나 막상 닥치니 기쁘게 웃어넘기는 게 쉽지 않았다. 딸 가진 부모가 한둘도 아닐 텐데 유별나다면 할 말은 없었다.

    보내 줘야 할 때 누구보다 다정하게, 서로가 아프지 않게,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 너무 품고 사는 것도 독이었다. 부모인 자신들이 누구보다 의연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버텨 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서영이 독립한 후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긴 했었지만 결국 다 지나갔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석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섰다. 곧 지갑을 들고나온 그는 서영의 주머니에 지폐 여러 장을 넣어 주었다.

    “택시 타.”

    영희는 그런 석완의 모습에 잠시 놀라 서 있었다. 저 양반이 어쩐 일인가 싶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진가 싶어 가슴이 짠했다. 오늘 밤 분명 서운한 마음을 소주와 멸치 몇 마리로 다스릴 게 눈에 훤히 보였기에 더 그랬다.

    “도착하면 연락은 꼭 해라. 엄마의 명령이다.”

    반찬을 한 보따리나 싼 영희가 서영의 손에 보자기를 들려 주며 경고하듯 말했다. 서영은 미안함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나오지 마시라 말한 뒤, 뒤돌아서서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급하게 마당을 벗어나다 석류나무를 지나쳤다.

    서영은 고개를 들고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미안해. 그 말만 속으로 되뇌며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지금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에 도착해도 태욱보다는 늦을 것이다. 그 시간조차 아까워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서영은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디 가.”

    탁. 손이 붙잡혔다. 놀란 서영이 고개를 돌렸다. 앞만 보고 걷느라 옆을 보지 못했다. 가로등 아래에 거짓말처럼 태욱이 서 있었다. 서영을 붙잡지 않은 다른 손에 거의 다 타 버린 담배가 꽂혀 있는 걸 보니 그녀와 헤어진 후 계속 이곳에 있었던 것 같았다.

    “왜 여기…….”

    뭐라고 해야 하나. 마음에선 찌르르, 통증이 일었다. 눈두덩이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 서영은 일부러 웃어 버렸다. 우리는 무슨 연애를 이리도 유난스럽게 하는가. 그에게서도 반성의 웃음이 흘렀다.

    “진짜.”

    담배를 얼른 끈 태욱이 서영의 짐을 가져갔다.

    “도둑놈…… 마음을 알겠다.”

    그녀를 잡고 있던 다른 손엔 꾹 힘을 주며 앞으로 이끌었다. 여기를 벗어나야 윤서영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다는 것처럼. 그에게 이끌려 동네를 완전히 벗어난 서영도 조그맣게 읊조렸다.

    “나도…… 공범이에요.”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래도 서영은 지금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남자를 놓을 수가 없었다. 이젠 그렇게 돼 버렸다. 더 많이, 끝없는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태욱이 큰길로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서영을 먼저 뒷자리에 태우고 그가 그 옆에 앉았다. 당연히 서울을 목적지로 말할 줄 알았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가 주십시오.”

    서영이 놀라 태욱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정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를 꼭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절박해 보이는 건 그녀의 착각일까. 서영은 태욱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당신, 괜찮은 건가요? 묻지 못한 채 호텔 앞에 도착해 버렸다.

    안내 데스크 앞에 서 있는 태욱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던 서영은 문득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에는 그에게서 다시 가져온 반찬 꾸러미가 들려 있었고, 옷은 집에서나 입는 캐릭터가 그려진 트레이닝복 세트 차림이었다. 로비를 지나치던 남녀가 그녀에게 시선을 주다 황급히 눈길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서영은 어쩔 수 없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남자와 이런 복장으로 호텔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거절하는 것도 우스웠다. 장소와 복장이 무슨 상관이냐며 당당히 그녀 앞으로 걸어오는 남자 때문이었다. 태욱은 다시 반찬 꾸러미를 뺏어 가듯 들고는 서영의 손을 붙잡았다.

    “가자.”

    “……팀장님.”

    서영이 잠시 멈칫하자 태욱이 돌아봤다. 이제라도 그녀가 돌아가자 말하면 그는 알겠다며 이유도 묻지 않고 호텔을 빠져나갈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그녀를 배려하지 않은 적이 없는 남자였으니까. 그렇게 넉넉한 여유로 가득 차 있던 눈동자가 지금은 서영이 곁에 있지 않으면 이 밤을 보내지 못할 것처럼 초조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싫은 거면…….”

    “아니. 아니에요. 가요.”

    서영이 먼저 앞장서 걸었다. 엘리베이터에 버튼을 누르고 예약한 룸의 호수를 확인한 후 층수까지 눌렀다. 긴장은 되었지만 태욱이 옆에 있으니 괜찮았다.

    “반찬통 들고 호텔방 가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예요.”

    분위기를 바꾸려 꺼낸 말에 태욱이 웃었다. 다행이었다. 서영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무슨 상관이야.”

    태욱이 그녀를 가두듯 가까이 다가왔다. 둘만 실은 엘리베이터였지만 밖이 훤히 내려다보여 조금은 부끄러웠다. 서영이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내리는데 태욱이 작게 속삭였다.

    “느려.”

    “…….”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려.”

    그가 답답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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