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36화 (36/75)
  • 12. 이토록 행복과 아픔이 (3)

    “……보고 싶다.”

    기어이 생각이 말로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주말이었고, 오랜만에 대청소를 마친 후 서영은 베란다에 앉아 햇볕을 쬐는 중이었다. 초여름이었지만 이상기온 탓인지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해 긴 파자마를 입어도 한기가 들었다.

    따뜻한 빛 때문에 몸이 나른해져 크게 기지개를 켰지만 일어난 이후부터 처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우울할 땐 햇빛을 보라고 했는데. 다 소용이 없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주말이라 출근을 하지 않는데, 태욱이 밀린 일이 많아 쉬지 못하는 탓이었다.

    그가 서영과의 연애로 잠을 더 줄이고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쓴다는 걸 알면서도 태욱이 출장이라도 가는 날이면 온 세상이 끝난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와 몸을 섞고 나선 그 감정의 기복이 더 심해졌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마음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나.

    어제도 지선이 그녀의 기분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공감의 위로를 건네주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하지만 가슴이 제멋대로야. 결론은 한결같았다. 사랑이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어. 내가 사랑을 이길 수도 없고. 하하하. 웃음으로 마무리되었던 닭발집의 술자리도 모두 오래전 일인 것만 같았다.

    서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찾았다. 태욱에게 전화라도 걸어 볼 생각이었다. 밥은 먹었는지,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걸 다 하면 뭘 할 건지, 나는 보고 싶지 않은지. 결국엔 투정으로 변할 전화였다.

    요즘 그와의 통화 패턴이 그랬다. 그러니 절대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가 짬이 나면 연락을 줄 테니. 그 전화를 기다리는 일 또한 서영에겐 설렘의 시간이었다. 미팅이 취소되었다며 그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는 말을 듣기라도 하면 세상 모든 걸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옷장을 전부 털어 내 가장 마음에 드는 옷으로 갈아입고 먼지 하나 없이 방을 청소한 뒤 그의 차가 빌라 아래에 도착하는 소리가 들리면 5층 계단을 쉬지 않고 뛰어 내려간다. 그러곤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그에게 뛰어가 안긴다. 고생했어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태욱은 더욱 꽉 서영을 끌어안는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것처럼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가면 오랜 고민 끝에 고른 옷들은 금방 그의 손에 벗겨져 버린다. 현관에서부터 불도 켜지 않은 채 몸이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끊임없이 입을 맞춘다. 순식간에 벗긴 옷들이 바닥을 채우면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직행한다.

    이젠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의 벗은 몸을 바라보고 짙은 애무에 여러 번 허리를 들썩이며 까무러친다. 그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면 그녀가 먼저 그를 꽉 끌어안는다. 그가 달래듯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면 곧 아래가 뜨거워지며 깊고 아득한 나락으로 빨려 들어간다.

    숨 쉬어. 그가 그녀를 깊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걱정스럽게 속삭인다. 그제야 숨이 터지고 곧 입술이 먹힌다. 얄미운 그는 입술을 맞붙인 채 웃고 몸짓엔 속도가 붙어 버린다. 하악. 신음이 끝없이 차오르는 순간에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더 가까이 맞닿지 못해 아쉬운 몸이 떨어질 줄 모르고 그녀의 몸 위에 포개진다. 둘의 숨소리가 잦아들 즈음, 다시 새로운 밤이 시작된다. 그는 그녀를 끝도 없이 절정으로 몰아넣은 뒤 몇 번의 욕망을 쏟아 내고 나서야 안심하듯 웃는다. 녹초가 된 그녀도 따라 웃고 만다.

    서영은 태욱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어머니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요즘은 왜 반찬을 가지러 오지도 않느냐고. 딸이 보고 싶다는 말을 둘러 하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입가에 미안한 미소가 걸린 서영이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 그래, 딸. 오랜만이다.

    서영의 어머니인 이영희 여사는 주변인의 말에 의하면 여장부 스타일이었다. 딸인 그녀가 볼 때도 그런 면이 많았다. 반대로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작은 일에도 세심하고 진중한 편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큰소리를 치거나 앞장서서 일을 진행하는 건 주로 어머니였다. 그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결론이라며, 어느 날 못 먹는 술을 한잔 마신 아버지가 서영에게 아주 큰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아버지가 귀엽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두 사람이 투덕거린 후 화해할 땐 부부로 사는 인연 안에 사랑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녀 나름의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미안. 요즘 좀 바빴어요.”

    서영이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말을 이었다. 전화하는 동안 잠옷을 벗고 나갈 준비를 마칠 생각이었다. 그녀의 행동을 단번에 읽었는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섰다.

    ― 오늘은 올 수 있는 거지?

    “안 그래도 딱 오늘 가려고 했는데, 엄마 문자가 먼저 온 거야.”

    서영은 나름의 핑계를 댔다. 모른 척 넘어가 주겠다는 듯 영희가 웃었다. 그러곤 먹고 싶은 게 있느냐는 물음을 건넸다. 그건 오히려 서영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오늘은 내가 사 가게 해 줘. 드시고 싶으신 거 있어요?”

    ― 나야 아무거나……. 그래, 잠깐만. 네 아빠한테 물어야 한다. 안 그럼 또 삐져.

    서영은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옷을 다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마치는 동안, 핸드폰 안에선 두 사람이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서 투덕거리고 있었다.

    뭘 그런 걸로 싸우는지. 서영은 둘 다 사 간다며, 통쾌하게 결론을 내리고 전화를 끊었다. 인천까지 가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 책장에 꽂혀 있던 책도 한 권 꺼내 가방 안에 챙겨 넣었다. 현관 앞에 섰다가 뒤돌아 다시 방 안을 돌아보는데, 또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마도 사랑은 불쑥불쑥 찾아오는 이유를 모르는 쓸쓸함 같았다.

    인천 집은 서영이 대학 기숙사로 들어가겠다 결정한 이후 부모님이 노년까지 보낼 계획으로 이사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아파트가 아닌 주택을 선택해 개조했고, 마당에는 서영이 좋아하는 석류나무를 크게 심어 놓았다.

    가을 문턱인 9월부터 열매는 탐스럽게 익기 시작했다. 알맞게 붉은색이 오른 석류를 하나씩 따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열매가 모두 떨어졌다고 아쉬워하는 것도 잠시였다. 그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버티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았다. 어쩔 땐 서영이 인천 집에 가는 이유가 석류나무를 보기 위해서인 적도 있었다.

    “올해는 잎이 진짜 푸르다, 그치?”

    세 사람은 든든하게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 중 건축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 당연하게 이 집의 리모델링을 맡겼다. 오래된 집이었지만 구조가 탄탄해 부수고 새로 지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필요에 맞게 고치는 것이 낫다는 말에 가족회의를 거쳐 동창분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이 이 집에서 가장 원하는 부분을 하나씩만 말하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셋의 요구사항이 같았다. 마당이 크게 보이는 통유리 창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석류나무를 어느 곳에서나 고개만 돌리면 쉽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네 엄마가 얼마나 정성을 쏟는지. 어제도 잎 하나가 상해 가지고…….”

    “여보!”

    소파에 기대앉아 느긋하게 티브이 채널을 돌리던 아버지 석완이 기어이 한마디를 보태다 부엌 쪽에 앉은 이영희 여사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곧 석완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티브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의 앞에 앉은 서영의 입가엔 흐린 웃음이 번졌다.

    어머니가 왜 이 나무에 정성을 쏟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도 똑같은 마음이니까. 세 사람 모두 석류나무를 그저 나무로만 보지 않았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서영은 그날 이후,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일찍 철든 딸이 부모는 또 안쓰러워 말없이 등을 쓸어 내며 안고 또 안아 주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프다는 소리조차 낼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쩌면 절대 잊지 못할 상처이겠지. 서영은 석류나무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회사는…… 어쩌기로 했어?”

    영희가 석완의 눈치를 보다 서영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 사직서는 냈어요.”

    그렇구나. 영희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유신그룹이 그 사건과 확실한 연관이 있다고 증명되지는 않았으니 굳이 퇴사까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 가족은 ‘유신’이란 단어만 들어도 머리카락이 서는 것 같은 세월을 살았다. 대표가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아니라고 대대적인 발표를 했지만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덮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근데 우리 영이, 요새 연애해?”

    “응?”

    영희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서영에게 물음을 던졌다. 서영이 놀라서 들고 있던 찻잔을 급하게 내려놓았다. 거짓말 같은 건 그녀에게 해당 사항이 없는 것처럼 곧장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영희는 서영이 이 집에 도착한 후 핸드폰을 곁에 놓고 수시로 확인하는 걸 보고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런 딸의 모습이 너무 다행스러웠고, 또 너무 예뻐 주책맞게 자신이 들떠 버렸다.

    “뭔 소리야? 영이는 아빠뿐인데.”

    석완이 또 모녀 사이에 끼어 말을 끊었다. 서영은 석완의 한결같은 주장에 그저 웃었고, 영희는 눈치 없는 남편이 답답해 혀를 찼다. 한창 연애를 해야 할 딸이 일만 하면서 청춘을 허비하는 게 좋은가. 딸 사랑이 유별난 건 알지만 이럴 땐 정말 적군인지 아군인지 헷갈렸다.

    “서영아. 내가 미리 충고하는데, 윤석완 씨는 네 결혼식에 초대하지 마라. 아마 거기 눈물바다로 만들 테니까. 쪽팔려서 우리 예비 사위 얼굴을 어떻게 볼 거야.”

    어머니 영희의 요상한 화법에 또 서영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석완이 아내를 노려보았지만 아니라고 반박하진 못했다. 그는 분명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서영은 부쩍 주름이 많아진 아버지를 바라다보다 문득 자신의 결혼식 장면을 상상했다.

    서영은 씁쓸하게 웃다 고개를 돌려 석류나무를 올려다봤다.

    “서영이, 너 전화 온다.”

    “어?”

    어머니의 말에 놀란 서영은 핸드폰을 집어 화면을 확인했다. 태욱이었다. 심장이 가만있지 못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서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숨을 고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태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여기, 인천 앞바다가 보여.

    “네?”

    서영은 그의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뒤늦게 그와 주고받은 문자가 떠올랐다. 부모님 댁에 가요. 집이 어딘데? 인천. 주소 보내 봐. 그리고 연락이 없었다. 당연히 바쁜 일정 때문에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태욱이 여기까지 내려와 주었다.

    어머니 영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서영은 신발을 구겨 신은 채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골목 끝에 어두운 밤바다가 보였다. 그리고 가로등 불빛 아래 한 남자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달려가 앞에 서자 태욱이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서영이 매달리듯 안겼다. 그에게선 희미한 알코올 향이 났다. 그마저도 좋았다. 이렇게 좋아지면 어찌해야 할까.

    “……보고 싶었어.”

    태욱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조용히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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