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35화 (35/75)
  • 12. 이토록 행복과 아픔이 (2)

    미리 예약한 술집의 룸으로 들어서 자리에 앉자마자 훈재는 태욱 앞에 사진 여러 장을 내려놓았다. 이미 예상한 조합이었다. 너무 뻔해 웃음이 났지만 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지유린이 떠드는 건, 다 손 이사 쪽에서 흘러나왔겠지.”

    앞에선 고상한 척하면서 뒤에선 어찌나 호박씨를 까 대는지. 정말 지유린이 말한 대로 재벌 집에서 자란 놈들은 하나같이 이 모양인가. 씁쓸한 마음에 태욱의 손엔 독주가 쥐어졌다.

    “여기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술잔을 내려놓은 태욱은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철민이 차의 조수석 문을 붙잡은 채 서 있고 유린이 그 안에서 내리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 모두 살짝 상기된 표정이었다. 작당 모의를 하려 만났으면 그 선을 지킬 것이지. 위험한 욕망에 이리도 쉽게 흔들리는 꼴이라니. 무엇이든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철민은 몰라도 유린은 마음이 없지 않아 보였다. 속일 수 없도록 표정에 모두 드러나 버렸다.

    그녀가 사고뭉치로 큰 이유엔 분명 외로움이 있을 테고 남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쉽게 마음이 열린다는 거였다. 독한 혀로 입을 놀려 봤자 돌아오는 건 숨길 수 없는 질투와 허무일 것이다. 누구든 가지고 싶고 무너뜨려야만 하는 여자에게 가장 큰 약점은 오히려 사랑일 수도 있었다.

    “호텔 사진은 없어?”

    시시하다며 태욱이 남은 사진들을 이리저리 뒤졌다. 훈재 역시 당연히 그 모습을 읽었다. 평소의 태욱이라면 크게 생각하지 않을 부분이었으나 요즘 열렬한 사랑 중이니 표정만 보아도 감정을 눈치챈 것 같았다.

    “손 이사도 바보는 아니니까.”

    하. 태욱은 멋쩍게 웃으며 호박색 위스키가 담긴 술잔을 빙글 돌렸다. 그렇다면 지금 그는 모든 패를 내놓은 바보일까. 매일 서영의 원룸을 들락거리는 그의 모습을 찍어 대는 파파라치가 몇 명인지 숫자를 세어 봐야 할 판이었다. 손 회장, 손 이사, 거기다 지유린까지 더해진 건가. 요즘 태욱은 자신이 유명 연예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래. 손철민도 득이 될 게 있으니까 지유린을 만났겠지. 이렇게 사진이 찍혀 돌아다닐 걸 알면서도. 목적은 지유린이 아니라 건양일 수도 있어. 건양 자료 털어 낸 것 좀 꺼내 봐.”

    이유는 그것뿐이다. 태욱을 경계하고, 그가 가지려는 것을 뺏어 없애 버리려 하는 버릇은 어릴 적부터 탁월했다. 분명 자신이 손에 쥔 게 더 좋은 것임을 알면서도 뺏어야만 하는 마음. 하지만 그 불안한 심리 덕분에 태욱이 지금의 자리에 올라섰을지도 모른다. 앞만 보는 그와 앞도 뒤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달리는 철민이 같은 결과를 낼 순 없었다.

    “그게……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훈재가 빼내 온 건양의 공식적인 재무제표는 누가 봐도 가짜였으며, 그 외에 가져온 비리 문서들도 수두룩했다.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기업이 자존적으로 회생할 수 없을 때 쓰는 방법이 합병이었고, 가장 보기 좋은 구실은 정략결혼이었다. 지유린은 거기에 올려진 제물이었고, 당연히 건양에선 어떻게든 유신 일가와 인연을 맺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져 버렸다.

    “하…….”

    자료들을 훑어 낸 태욱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걸 손 회장이 모를 리 없었다. 철저히 이용하는 말로만 쓸 작정이었나. 태욱의 표정이 더욱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언제부턴가 영감의 의중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계산할수록 더 상대의 수에 빠지기 십상이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믿고 밀어붙이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 그의 자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손 회장이 그에게 결혼을 재촉하고, 그가 만나는 사람을 주시하는 것도 한편으론 철민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될 수 있었다. 두 말을 싸움터에 던져 놓고 시험해 보려는 오만함은 구역질이 났지만 경쟁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면 더 패배감에 휩싸였으리라.

    “아무래도 회장님은 네 결혼으로 모험을 해 볼 생각이셨겠지. 건양을 먹느냐, 버리느냐. 손 이사도 처음부터 눈치챘을 거고. 리스크가 커도 네가 결국엔 성공시킬 능력이 된다는 걸 자기도 아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든 네 입지가 커지는 걸 막고 싶은 상태겠지. 지유린을 이용해서 네 연애를 자극시켜도 이득이고, 그 지유린이 네가 아니라 손 이사 쪽으로 마음을 돌려도 나쁠 건 없을 거야.”

    정말 구역질 나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손철민이라면 당연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원래는 자신의 것이었는데, 그가 등장한 순간부터 가지려면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태욱의 모든 게 눈에 거슬렸을 것이고, 그가 끝없이 추락하길 원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지유린에 대해서 건진 건?”

    태욱은 그게 가장 원하는 것이라며 훈재에게 시선을 맞췄다. 휴. 한숨을 내쉰 훈재는 가방에서 사건 파일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태욱이 눈을 반짝이며 자료를 유심히 내려다봤다.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 없으니 훈재는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강남역 유모차 음주 운전 교통사고. 운전한 남자는 실형 받아서 들어가 있는 상황이고, 지 회장이 언론을 잘 막아서 기사화 자체가 안 됐어. 그때 조수석에 타고 있던 사람이 지유린이었는데, 남자가 대리를 부른다고 해서 자기는 차에 탔고 사고 당시엔 잠들어 있었다고 진술했어. 당연히 직접 운전할 줄 몰랐다고. 남자 쪽 진술도 지유린과 같았고. 다 마무리된 사건인데…….”

    뭐가 더 있는 것이냐며 태욱이 훈재를 바라보았다. 훈재는 잠시 숨을 골랐다. 표정에서 곧바로 뜻이 읽혔다.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사건에 대해 알아보긴 했지만 태욱에게는 전달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기도 했다.

    “그 뒤는?”

    “태욱아.”

    두 사람의 눈빛이 맞부딪쳤다.

    “감정적으로 행동할 일은 아니야.”

    “감정?”

    태욱은 훈재에게 되물으며 서늘하게 눈썹을 올렸다.

    “내가 손 영감한테 딱 하나 잘 배웠다고 생각한 게 뭔 줄 알아? 건드리면 대갚음해 주라는 거야. 그건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라 이제껏 내가 살아온 방식이야. 더러운 물에서 깨끗한 척해 봐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양심은 평범한 사람들이나 지키는 신념이고.”

    태욱의 눈빛에 더욱 퍼렇게 독이 올랐다.

    “내가, 내 자리에서 가진 걸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더 큰 걸 손에 넣는 거야. 감히,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그 결과만 중요할 뿐이야.”

    “그래서, 네가 손 이사를 이겨서 얻는 건?”

    훈재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늘 가슴에 담고 있던 물음표였다. 듣고 싶으면서도 들어선 안 될 것만 같기도 했다. 태욱이 그저 저와 같은 평범한 남자로, 친구로, 사람으로, 남아 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 걸까.

    “뭘 물어? 영감 자리겠지.”

    태욱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가 그걸 원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태욱은 친구의 불안한 눈빛을 읽었지만 자신 안의 감정들을 모두 설명할 순 없었다. 어쩌면 그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를 낳고 키운 어머니도, 지금 그가 빠져 있는 윤서영이라는 여자조차도. 태욱이 짧게 웃었다.

    “일곱 살에 그 집안에 들어가서, 식탁도 아닌 바닥에 어머니랑 둘만 앉아서, 먹다 남은 개밥이라도 감사하며 먹으라는 소리에 딱 하나만 생각했어. 내가 못 가질 이유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어. 내가 ‘손’이 아니라 ‘강’이라서? 강태욱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어. ‘손’이든 ‘강’이든 무슨 상관이야.”

    이런 답일 줄 몰랐나. 훈재의 입이 썼다. 그리고 아직 태욱에게 전하지 못한 또 하나의 서류가 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태욱이 진흙탕 싸움 속으로 들어가겠다면 그에겐 말릴 자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가장 소중한 사람이 다치는 일이 생긴다면 어째야 하는가.

    훈재는 지선과의 결혼 발표 이후 지선의 책상에 조그마한 것이라도 낯선 물건이 놓이면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릴 적 탐정놀이 하듯 범인을 색출해 낸 것은 지선이었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디가드를 자청한 건 그였다. 혹시라도 지선이 다칠까 겁이 났다. 그가 공격받는 것과는 달랐다. 소중한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두려운 게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하나만 더 묻자.”

    태욱이 시선을 맞췄다.

    “네 그 자리싸움에 윤 대리가 이용된다면?”

    무슨 소리냐며 태욱이 날카롭게 눈빛을 세웠다.

    “윤 대리가 갑자기 퇴사하겠다고 했던 이유, 어쩌면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태욱으로선 뜬금없고 알 수 없는 말뿐이었다. 서영의 퇴사 문제라면 그 이유는 명확했다. 그에게 던진 무례한 고백. 그것 때문이 아니란 말인가. 어떤 것이든 속내를 감추고 그를 속일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는 윤서영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설명해!”

    태욱의 다그침에 훈재는 가방에서 마지막 서류를 꺼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필성의 전담 변호사인 창수에게서 전달받은 봉투였다. 창수가 왜 이것을 태욱에게 전하는지 그 뜻을 추측할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조용하고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태욱에게도 이미 재벌가의 정치 싸움엔 끼어들 생각 따위 없다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서영이 이 전쟁에서 도구로 쓰인다면 그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태욱은 훈재가 꺼낸 서류 봉투를 거칠게 뜯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사진 한 장과 빛바랜 신문 기사가 손에 잡혔다. 눈으론 바쁘게 내용을 읽어 내리고 있었지만, 숨은 천천히 가라앉아 멈추었다. 심장은 뛰는 것을 잊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윤 대리도 자기가 다니던 회사가 유신이랑 합병할 줄은 몰랐겠지. 그리고 네가 그 유신그룹에서 태어난 손자라는 것도. 휴……. 서영 씨가 지금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여동생 사건이 누구 손에 들어가든, 너를 흔드는 용도로 이용될 거야. 윤 변호사가 이걸 너한테 줬다는 건, 그게 실현될 거라는 경고일 테고. 네가 지유린 약점을 쥐고 흔드는 것하고는 달라. 결국 상처받게 될 사람은…….”

    귓가에서 울리는 훈재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멀어져 갔다. 태욱은 굳은 채 사진만 내려다봤다. 여자아이는 어리지만 분명 서영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터널 폭발 사고. 사망 32명. 어린이집 차량 전소. 전체 사망. 동물원 현장 학습차……. 아이들의 가족은 터널 앞에서 울부짖으며……. 최초 건설사인 유신그룹은 부실시공을 전면 부인했으…….]

    태욱은 더 이상 내려다보지 못하고 뻑뻑한 눈을 감았다. 어린 서영이 그 터널 앞에서 소리 죽여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슴을 치고 살갗을 뜯어내며 절규하는 자신의 부모를 지켜보며 본인은 울음조차 삼켜야 했을 것이다. 그는 늘 서영을 보며 생각했다. 어딘가 닮아 있을 것이라 확신한 적도 있었다. 이 여자가 그를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분명 그 뜻일 것이라고.

    아버지가 죽던 날, 태욱은 어머니의 등 뒤에서 소리 죽여 울었다. 가슴이 그날로 돌아간 듯 세차게 조여 왔다. 그는 다시 술잔을 쥐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벚꽃을 보는 것처럼, 마침내 그를 보며 활짝 웃는, 윤서영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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