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34화 (34/75)
  • 12. 이토록 행복과 아픔이 (1)

    날짜가 다른 여러 장의 사진 속에서 태욱은 모두 같은 모습이었다. 한 여자를 끌어안은 채 행복하게 웃고 있는 낯선 모습. 필성이 일곱 살이었던 녀석을 손자로 받아들인 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헛웃음이 새는 건 당연했다. 태욱의 모습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필성은 앞에 선 창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에게선 곧 보고가 이어졌다.

    “계속 그 집에서 출퇴근하고 계십니다.”

    “이 얼굴을 하고?”

    필성이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농담으로 건넨 말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윤창수 변호사에겐 다른 뜻으로 들렸다. 이제라도 다른 평범한 할아버지들처럼 손자의 연애를 바라볼 마음이 든 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완벽히 믿지 못해, 다른 누군가를 시켜 그의 손에 쥔 보고들까지 미리 알고 계산한 행동일까. 여전히 필성에 대해선 그 어떤 것도 짐작할 수 없어 그의 표정이 긴장하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필성의 옆에서만 30년이 넘었다 하더라도 그의 전부를 읽어 내진 못했다. 감정을 참거나 감추는 양반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속살을 하얗게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런 인물이었다면 진작 자리를 뺏겼을 테고, 이 유신을 지금까지 붙들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겠지. 필성은 종종 창수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예상 밖의 답을 내놓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아는 척을 하는 게 무의하다는 걸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다.

    “그런 모습 원하신 거 아니셨습니까?”

    창수는 평소와 달리 필성에게 되물었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늘 필성이 원하는 대답만 했을 뿐, 물음을 건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의 그런 점 때문에 필성이 그를 옆에 붙여 두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필성이 사진을 내려놓고 창수를 올려다봤다.

    “나는 모르지만 윤 변은 잘 알고 있는 것들이 꽤 많지.”

    필성의 눈동자가 한순간 날카롭게 창수에게 꽂혔다. 조용히 찍어 누르는 기세가 여든이 넘는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창수는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흐를 것이란 건 예상했다. 그가 깍듯하게 몸을 숙이자 그제야 필성의 몸짓이 다시 전처럼 여유로워졌다.

    재벌의 그림자가 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기생충 취급을 받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명예보다 돈을 선택한 자신에 대한 환멸도 없지는 않았다. 너무 오래 한 사람을 보필해 온 것도 그들 사이에 모순을 더하였다.

    그런데 요즘 그의 고민은 다른 게 아니었다. 충성심을 시험하는 유혹들보다도 그를 더욱 흔들리게 만드는 건 우습게도 양심이었다.

    “그 여자 집안은?”

    곧 필성의 물음이 날아왔다. 창수는 알아낸 정보를 기계적으로 전달했다.

    “부모 모두 교육 쪽 일에 몸담았고, 주변 평판도 좋습니다. 경제적으로 문제 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어릴 때 여동생이…….”

    똑똑. 창수의 다음 말을 막듯 누군가 별채의 문을 두드렸다. 그가 필성과 독대할 때는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기에 좀처럼 있지 않은 일이었다. 필성이 언짢은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 들어오라는 필성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 문이 열리고 박 비서가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손 이사님이 오셔서…….”

    철민이 기별도 없이 본가에 방문한 적은 없었기에 일 처리가 매끄러운 박 비서도 상황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었던 듯했다. 필성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창수에게 눈짓으로 물러갈 것을 지시했다. 곧 그는 방 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별채 앞까지 들어와 있던 철민과 마주했다.

    “오랜만이네요, 윤 변호사님.”

    철민이 반듯한 미소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셨습니까?”

    창수는 짤막하게 목을 숙였다.

    “요즘 잘 안 보이셔서 바쁘신 줄 알았더니, 여기 계셨군요.”

    철민은 창수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에둘러 그를 문책했다. 필성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필성이 가졌던 모든 것을 자신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지함이 안타깝기도 했다.

    보고 배운 것이 있었으나 철민은 생각이 얕았다. 계산은 빨랐지만 칼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고, 타고난 본성이 심약해 불안을 고질병처럼 안고 살았다. 아버지 인국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해 필성의 눈 밖으로 밀려난 것이 그의 불안을 더 부추기는 이유기도 했다.

    “회장님이 기다리십니다.”

    창수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돌아섰다. 그 순간 철민이 참지 못하고 덧붙였다.

    “어느 쪽에 서시든,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착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강 팀장이라고 다를까요? 꼬리 감추고 여우 짓 하는 놈이 제 사람을 지킬 그릇이 되겠습니까? 할아버지가 보시는 건 저도 봅니다. 그러니…… 늦지 않게 기회를 잡으십시오.”

    철민이 창수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돌아서 별채 안으로 사라졌다. 늦지 않은 기회라. 창수는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곧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유신 일가의 높게 솟은 문을 벗어났다.

    철민이 소파에 앉자 필성은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태욱의 사진을 정리해 서랍장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철민이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가진 건 철민 또한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기에 감출 이유가 없었다.

    그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철민이 앉은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마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니 무슨 이유 때문에 이리 급하게 찾아온 것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번엔 얼마나 해 먹은 거야?”

    다짜고짜 날아온 물음에 철민은 우선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노름질한 사람은 네 아비인데, 네가 사과한다고 일이 해결되겠니?”

    쯧쯧. 필성은 혀를 차며 철민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불안한 걸까. 아비가 죽은 놈도 그 자리로 올라가려고 악착같이 이를 악무는데. 그저 그 자리에서 지켜 내는 것만 해내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인국이 그랬듯, 다 가졌기에 완성하지 못하고 견뎌 내지 못하는 무게가 있었다.

    “이번엔…… 회사 쪽도, 손대신 것 같습니다.”

    철민은 손 회장 앞에 서류 하나를 내려놓았다. 하. 필성은 표정을 지운 채 봉투를 집어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다 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었다. 일부러 숨통을 틔워 주려 떼어 준 돈이 제법 되었다. 그걸로도 감당이 안 될 만큼 일을 저질렀다는 소린가. 그는 차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서류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철민은 침착하게 행동하기 위해 손을 맞잡았지만 뛰는 심장을 어쩌진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철민의 사과에 필성의 눈빛이 손자에게로 꽂혔다. 어쩜 하나부터 열까지 이리도 똑같을까.

    인국은 죽이지 못해 살려 둔 자식이었다. 뒤늦게 도박에 빠진 걸 알고 손버릇을 고치기 위해 무당처럼 칼까지 빼어 들고 전쟁을 치렀지만 아들의 병은 고쳐지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냐 물으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저지른 일이라 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다며 울듯이 웃었다.

    인국은 동생 인주가 아버지 필성과 어긋나던 무렵 스스로 정략결혼을 했다. 그것이 집안의 모든 분란을 잠재울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나눈 연인이 있었지만 당연하게 헤어졌다. 결혼할 상대인 미연도 싫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 철민이 태어나고 얼마 후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래된 관계였다. 그는 이혼을 원했지만 필성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유신그룹은 미연의 친정과 얽힌 사업이 많았다. 그 덕분에 한창 발돋움 중인 회사를 부부간의 작은 소란으로 날려 버릴 순 없었다. 재벌가에서 태어나 자란 미연도 머리가 빨리 돌아갔다. 곧장 남자를 정리했고, 그 이후로는 문제 될 일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인국은 미연도, 심지어 그녀가 낳은 자신의 아들 철민도 믿지 못했다. 두 번이나 유전자 검사를 하며 친자임을 확인받았지만 그의 마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결국 인국은 아버지 필성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약한 자신을 한탄하며 천천히 무너져 갔다. 꿈에서 죽은 동생 인주를 볼 때가 많았고, 깨어 있을 땐 술과 도박에 빠져야만 견딜 수 있었다. 필성은 그때부터 인국을 멀리했다. 그의 방황을 이해하지 못해 한탄했고, 유신의 미래만 생각하며 가능성이 있는 철민에게로 눈을 돌렸다.

    부모와 자식으로서 마주 본 게 언제인지도 까마득했다. 철민을 통해서 그의 소식을 듣고 뒤처리만 해 주었다. 모두의 관심은 후대로 넘어간 이후였다. 이제 자리를 내주어야 할 후계자를 정하면 순조롭게 마무리될 인생이었다.

    자식 셋에게서 빛을 보진 못했지만 그들의 핏줄들 중에서 제대로 된 주인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철민이든, 태욱이든, 그가 저울질해 고르면 끝이 날 전쟁이었다. 미련 없는 생이었다. 더 이상의 바닥을 보지만 않으면 웃으며 눈을 감겠지.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식은 그의 업이 되었다.

    “더 이상은 없다. 알아서 처리하고, 들어가라고 해.”

    필성은 차갑게 일갈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란 철민이 소파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회사의 공금을 횡령해 도박으로 날린 아버지가 죗값을 받게 되면 그의 인생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만약 태욱의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약점이 되어 그를 찌르는 화살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가 유신의 회장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흠이 될 만한 것 무엇도 만들어선 안 된다.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부자의 관계였다. 어릴 적부터 사랑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지만 아비는 아비였다. 허수아비일지라도 살려서 그 자리를 지키도록 해야만 했다. 그러니 철민이 믿을 곳은 할아버지 필성뿐이었다.

    “늘 태욱이보다 저한테 하나 더 주시는 거 압니다. 그게 더 잘했다는 뜻이 아닌 것도 알고요. 그렇게 했는데도 이미 따라잡혔고, 할아버지 마음이 그 녀석에게 옮겨 갔단 걸 모르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은 고백이었다. 늘 모른 척하며 받아 가던 녀석이 방법을 달리했다. 필성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더 이득일지,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 보았다.

    “태욱이 그 자리 앉히는 데 절 이용하셔도 괜찮습니다. 불만 갖지 않겠습니다. 뭐든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더 살려 주십시오.”

    철민을 내려다보며 웃음 짓던 필성의 표정이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영리한 줄 알았는데 결국은 멍청한 놈이었나. 아니면 멍청한 것 같으면서도 영리한 것인가. 아직은 그도 짐작되지 않았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결승선에 들어가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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