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여름이 시작되는 밤 (2)
닭발집은 왁자지껄,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만큼 고달픈 직장인들이 많다는 방증이며, 이 맵고 달고 짠 음식이라도 없었다면 진작에 대한민국의 경제가 무너졌을 것이라는, 아주 심한 비약으로 결론이 나 버린 지선의 ‘닭발론’에 지훈도, 서영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였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더러워도 참고, 서러워도 눈물을 삼키며 꾸역꾸역 지옥철에 몸을 집어넣는 건 어쩌면 인간의 살고자 하는 본능일지도 몰랐다. 모두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지만 그저 살아 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 삶 가운데 그나마 모두에게 허락된 달콤한 마약이 있다면 이 끊을 수 없는 음식과 그 모든 힘듦을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랑이 아닐까.
“서 차장님은 왜 연애 안 하세요?”
술이 조금 들어가자 지선은 거칠 것이 없었다. 지훈은 잠시 웃고는 건너편의 서영을 바라봤다. 서영은 이 닭발집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아니, 세 사람이 이곳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지훈과 시선을 맞추는 일이 없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조용히 닭발을 구웠고, 지선의 농담에 때때로 웃어 주었으며, 그 나머지는 오로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린 채 쥐고 있는 핸드폰만 바라봤다. 문자를 주고받는지 한 번씩 입가에 미소가 번질 때면 지훈의 가슴 안쪽에선 뻐근하게 통증이 일었다.
연애를 하고 있구나. 윤서영이란 여자가 사랑을 하면 저런 모습이구나. 그 상대가 당연히 자신이 될 것이라 자만했던 지난날을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가 놓친 시간들이었고,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제대로 마주 바라본 적도 없는 여자인데 지훈은 마치 이별이라도 한 것처럼 서영의 빈자리를 느꼈다. 그는 말없이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 줘요?”
지훈의 감정을 눈치챈 지선은 일부러 그 말을 건넸다. 그가 서영을 마음에 품은 지 오래되었고, 태욱에게 그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한다는 게 모두 읽혔다. 그래서 얼른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어야 했다. 혹여나 태욱과 서영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되었다. 서영이 지금처럼만 행복했으면 하는 게 지선의 바람이었다. 태욱의 문자 하나에도 끝도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는 서영은 누가 보더라도 아주 예뻤다. 사랑을 하면 모두가 그런 법. 그녀 또한 그랬고, 어느 누구도 다를 바가 없었다. 찾아보면 지훈에게도 맞는 여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제가 좋은 놈이 아니라서……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그가 꾸벅 절을 하듯 지선에게 고개를 숙였다. 연거푸 소주를 마시더니 제법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지훈의 볼이 점점 발갛게 달아오르며 닭발과 비슷한 색깔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서영은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서는 핸드폰이 세차게 울리고 있었다. 정말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지선은 욕조차 할 수가 없었다.
서영은 태욱의 전화를 받기 위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코너에 있는 화장실 쪽으로 향하자 넥타이를 맨 몇몇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주위를 둘러보자 길 건너의 편의점이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더 늦지 않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제 끝났어요?”
― 다들 실신 직전이라 그냥 끝냈어.
그러는 본인은 멀쩡한 목소리라 서영은 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남자의 체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하루 종일 공사 현장을 돌아본 뒤 저녁엔 지사의 부서장들과 미팅을 갖는다고 했다. 미팅이라고 해 봐야 본사에서 내려간 그가 일의 진행에 대해서 묻고 부서장들이 답하는 게 전부였다.
보통의 팀장들은 보고서 몇 개로 끝내 버리는 일을 태욱은 현장에 앉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사 직원 대부분이 가장 마주하기 싫어하는 인물이 신사업 팀 강태욱 팀장이었다. 그가 내려온다는 전언이 뜨면 야근은 필수였고, 그렇게까지 해서 업무 처리를 해 봤자 잘해야 본전이었다.
그가 새롭게 태어난 유신건설의 실세라는 말이 떠돌고, 사주인 손필성 회장의 숨겨 둔 손자이자 후계자란 소문까지 퍼지면서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부류들도 생겼지만 태욱은 타인에게 곁을 주는 타입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지금 그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대부분 파혼이란 흠을 덮기 위한 쇼일 것이라 추측했다. 어느 부분은 정확히 맞았고, 또 어디서부터는 전혀 다르게 바뀌었다. 지금 그가 한 여자의 식사 자리에 함께 있는 누군가를 의식하다 못해 질투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 또 자꾸 집중 못 하게 만드는 여자가 서울에 있어서.
그의 뒷말에 서영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와 통화할 때면 가슴이 간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병인 것 같았다. 서영은 모른 척 편의점 냉장고에서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오랜만에 닭발 먹으니까 그때 팀장님이랑 같이 먹었을 때 생각나요.”
― 아, 나 버리고 서지훈한테 가려고 했던 일 말하는 건가?
아차. 말을 잘못 돌렸다.
“결국 안 갔잖아요.”
― 그래서 지금 내 인내심 테스트하는 건가?
하여튼 말로는 이길 수 없는 남자였다.
“……미안해요.”
― 사과하라고 한 말 아닌데?
태욱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원하는 거 말하세요. 들어……드릴게요.”
서영은 포기하듯 답했다. 그의 질투가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태욱의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하고 괜찮을 거라 생각한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 반성하게 되었다. 그가 만약 어쩔 수 없이 지유린과 함께 앉아 있다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 서영은 생수병을 쥐고 있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 먹고 싶은 거 말해 봐. 사 갈게.
그의 소원은 예상 밖으로 소박하고 시시했다. 아니, 오히려 서영의 소원 같았다. 서영은 그가 당연히 욕구 불만을 해소하게 해 달라고 말할 줄 알았기에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조금 민망해졌다. 전화 통화이니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이런 마음을 태욱에게 모두 읽혀 놀림을 받았을 게 뻔했다. 서영은 얼른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렸다.
“천안이니까…… 호두과자?”
하하하. 윤서영답다며 태욱이 웃었다. 그는 알겠다며 휴게소에 들러 사 가겠다고 했다. 서영은 조심히 올라오라는 마무리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때 태욱에게서 또 다른 질문이 날아왔다.
― 보고 싶은 건?
“…….”
생수병을 카운터에 내려놓고 계산을 하던 서영의 얼굴이 화라락 붉어졌다.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그런 그녀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서영은 얼른 생수병을 들고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 없어?
기다리지 못하고 태욱이 다시 물었다.
“……팀장님이요.”
그녀는 포기하듯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 안 들려. 세상에 팀장이 한둘인가.
그의 소원은 아무래도 이쪽인 것 같았다.
“강태욱 씨요. 천안에서 호두과자 사 오실 분.”
서영도 지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로의 웃음소리만 들어도 좋았다.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전화였다. 길 건너편에 위치한 가게에서 지훈과 함께 걸어 나온 지선이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데도 서영은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의 태욱이 보고 싶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여러 번 연거푸 쏟아 낸 때문이었다. 술은 입에 한 잔도 대지 않았는데 어쩐지 기분이 달나라로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축 처진 몸을 비틀거리며 회사 쪽으로 향하는 지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선과 서영은 같은 택시에 올랐다. 방향이 같아 돈도 아낄 겸 같이 탄 것인데, 어쩐지 지선의 눈에는 한잔 더 하고 싶은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훈이 끼는 바람에 둘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입에 올리지조차 못했다. 요즘 지선은 훈재의 야근과 서영의 연애로 의도치 않게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중이었고, 그걸 서영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도 그랬으니까. 지선이 훈재와 결혼하고 신혼 생활을 즐기느라 함께하는 시간이 줄었을 때 어쩔 수 없이 서운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감정은 머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저희 집에서 맥주 딱 한 캔만 더 하실래요?”
서영이 집 앞에 도착할 즈음 먼저 제안했다. 지선은 긍정의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벌써 어떤 남자의 무서운 얼굴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지선은 뒷감당이 힘들다며 깔끔하게 거절했다.
“지금 천안에서 오는 길이라 시간 좀 걸릴 거예요. 박 변호사님도 아직이시잖아요.”
“그래서 야식 좀 사서 가 볼까 싶어. 요즘 자주 못 보니 또 보고 싶네.”
서로 힘겨루기를 해도 사랑하는 마음은 덜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지선이 조그만 목소리로 자신이 훈재를 더 많이 좋아한다고 아주 큰 비밀을 고백하듯 말했다. 서영은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게 지선을 태운 택시는 서영을 언덕 입구에 내려 준 뒤 다시 훈재가 있는 회사로 향했다.
터덜터덜 혼자서 언덕길을 오르자 서영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태욱이 더욱 보고 싶어졌다. 매일 봐도 그리운 게 연애인가. 그를 짝사랑할 때는 이렇지 않았다. 너무 깊이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작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든 순간, 눈앞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서영은 얼른 그의 앞으로 뛰어갔다. 그녀를 발견한 태욱이 차체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켰다.
“티, 팀장님…….”
“서프라이즈.”
그는 등 뒤로 감추고 있던 호두과자를 내밀었다. 정말 사 올 줄이야. 이것까지 사 오면서 어떻게 이 시간에 온 걸까. 서영은 그가 이곳에 있는 게 실감이 되지 않았다. 일단 호두과자를 받으려고 하자 그가 자신의 머리 위로 봉투를 들어 올렸다.
“공짜로?”
그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놀리고 싶어서 일하는 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서영과 함께 있는 태욱은 회사에서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게 좋으면서, 또 이상하게 안타까워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서영의 표정과 분위기가 달라지자 태욱은 반성하는 것처럼 천천히 호두과자 봉투를 내렸다.
“알았어. 먹는 걸로는 장난 안 치겠습니다.”
태욱이 다시 봉투를 내미는데 서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 소원 쓸게요.”
“응?”
뜬금없이 소원 이야기 나오자 태욱은 감을 잡지 못했다.
“첫 번째 소원 취소.”
“…….”
“나…… 안아 줘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태욱과 시선을 똑바로 맞췄다. 하……. 그는 어딘가 불편한 미소를 지으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서영에게 박듯이 시선을 꽂은 채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그 순간이었다. 태욱이 호두과자 봉투를 쥔 채 서영의 손도 꽉 붙잡아 빌라 쪽으로 이끌었다. 걸음이 빠른 그를 쫓아가느라 심장이 뛰었다. 왜 하필 5층이야. 그가 낮게 읊조리는데 서영은 웃음이 샜다. 오늘은 가쁘게 내쉬는 숨조차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