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31화 (31/75)

11. 여름이 시작되는 밤 (1)

계절은 완연한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아침이라도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머리카락을 말리는 동안 땀을 흘려 공들여 한 화장이 지워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서영은 늘 5분이면 끝이 났던 메이크업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화장대에 놓인 화장품이 하나둘 늘어 가는 걸 문득 깨달았다.

연애는 그녀의 일상을 바꿨다. 알람 대신 태욱의 전화를 받으며 일어났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칫솔질을 시작했다. 일어나면 전화해 주기로 한 그와의 약속은 서영이 계속 늦잠을 자는 바람에 태욱의 모닝콜로 바뀌어 버렸다.

‘누구를 탓하겠어. 잠이 없는 내가 잘못이지.’

불만을 표현하는 태욱의 눈과 입이 웃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윤서영 잠에 취한 목소리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아.’

분위기를 야릇하게 만드는 것도 재주였다. 키스 이상은 하지 말자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그는 아침부터 뒷산을 오른다고 했다. 등산을 마친 후 그녀에게 전화해 거친 숨소리로 죽을 것 같다는 앞이 잘린 말을 내뱉을 때면 서영은 약간의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선이 말했던 모습이 이건가 싶기도 했다. 강태욱이 애가 닳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었다. 천하의 강태욱이 욕구를 참지 못해 아침마다 산을 오른다고 하면 다들 지어낸 얘기라고 생각하겠지. 늘 눈빛으로 누군가를 찔러 죽일 것 같은 그가 대형견처럼 눈을 풀고 웃으며 그녀를 바라본다는 걸 믿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니,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서영은 태욱이 웃을 때마다 행복했고, 또 그만큼 때때로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루만 살자. 그럼 앞으로의 걱정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다. 그 완전한 하루들이 모이면 후회 없는 삶이 될 테고, 그것이면 되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공들여 화장을 하고 마지막으로 립스틱 색깔을 고민하고 있는데 화장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침 알람을 확인한 뒤 내팽개쳐진 채 침대 어딘가에 뒹굴고 있을 물건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겼을 땐 무조건 챙겨야 하는 존재였다.

[아침부터 천안행.]

태욱은 문자에 내비게이션 인증 샷을 첨부했다.

[저녁에나 보겠군.]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셀카를 찍어 보냈다. 서영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태욱의 얼굴을 확대했다. 그러곤 당연한 일처럼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저장한 사진들이 앨범 폴더에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서영이 좋아하는 게 뭔지 매일 밤마다 문자로 알려 달라던 태욱에게 그녀는 ‘사진’이라는 두 글자만 적어 보냈다. 무슨 사진? 그가 되물었고, 그녀는 그가 보내 주는 건 어떤 것이든 좋다고 말했다. 그냥 ‘셀카’라고 말하는 게 어떠냐는 짓궂은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때부터 태욱은 틈나는 대로 그녀에게 사진들을 전송했다. 자기 얼굴을 찍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처음에 보내온 사진은 얼굴이 절반 정도 잘려 있었다.

‘모를까 봐 말하는데 내 손으로 내 사진 찍은 건 처음입니다.’

그가 입을 일자로 그리며 말했을 땐 강태욱이란 남자가 조금 귀엽다는 생각도 해 버렸다. 그게 진심이든 거짓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서영이 믿는다면 그것이 진실이 되었다. 그도 서영도 더 이상 계약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모두에게 연인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했으며, 더 이상 연극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난 이제 출근해요.]

답장을 보낸 서영이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전화가 들어왔다. 태욱은 요새 틈이 나는 대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자보다는 전화가 편하다고 했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목소리가 듣고 싶으니까’란 말이 날아와 또 서영의 얼굴을 당근처럼 만들었다.

연애에는 조금씩 익숙해져 갔지만 태욱은 늘 새롭게 그녀를 떨리게 하며 긴장하도록 만들었다. 엉뚱하지만 무슨 학원이라도 다니는 것인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머리 좋은 남자는 연애도 잘하나요? 지선에게 물을 뻔했지만 훈재가 항상 아내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해 헛발질을 하는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해답을 찾아냈다. 강태욱이니까 가능한 것이군.

―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태욱이 불쑥 본론부터 꺼냈다.

“네?”

― 왜 사진은 나만 보내지?

아……. 그도 불만을 가질 줄은 몰랐다. 서영은 뒤늦게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가 따로 원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사진은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태욱이 서영처럼 한가하게 사진을 확인하고 저장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 그녀의 소심병이 만든 혼자만의 결론이었다.

“회사에서…… 얼굴 보잖아요.”

나름 핑계를 가져다 댔다.

― 나는 안 봐?

그걸 모를 남자도 아니었다.

“……알았어요.”

서영이 작게 대답했다.

― 뭘 요구할 줄 알고 알았다고 말해?

그의 웃음소리가 얄밉게 흘러나왔다.

“요구하시는 건 안 됩니다. 저도 그냥 사진이라고만 했잖아요.”

하하하. 태욱에게선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 그래서, 뭐 찍어 보낼 건데?

“음…… 발 사진.”

서영이 고심 끝에 대답했다. 평소에도 자주 발 사진을 찍었다. 남들처럼 핸드폰 카메라를 바라보며 웃는 표정을 남길 자신이 없어 늘 걸어가는 발이나 찻잔을 쥐고 있는 손을 찍는 게 전부였다.

서영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니 태욱의 셀카가 얼마나 큰 용기였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무언가 남기고 보여 주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태욱 역시 그런 자신이 어색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서투른 사진이 더 소중해지고 말았다.

― 오늘부터 여자 발 사진만 모으는 변태가 되겠군.

그의 농담에 웃음이 번졌다. 서영은 그 순간 용기 내 셀카를 찍었다. 보정 앱도 활용하지 않은 어색하게 웃는 사진이었지만 이게 진짜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 핸드폰 너머의 태욱에게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하여튼 밀당을 잘해.

“…….”

― 더 보고 싶잖아.

그의 목소리가 달았다. 서영은 그가 한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그러고는 지하철을 타려면 시간이 촉박하다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심장이 뛰었고, 입술 사이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태욱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가 보낸 아침 사진을 지하철 기다리는 내내 내려다보며 서영은 한 남자의 하루가 조금 덜 힘들길 응원했다.

그는 마치 끝없이 달리는 말 같았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오로지 앞의 목표만을 향해서 뛰어갔다. 하지만 그 목표조차 그에겐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 비밀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더 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태욱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서영은 그를 잠시만이라도 쉬게 해 주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 보기도 했다. 그게 그저 욕심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어느새 희망이 생겨 버렸다. 그가 그녀와 있을 때, 눈을 풀고 웃을 때, 그녀를 꼭 안을 때, 조금이라도 쉬었으면.

지하철이 도착하고, 서영은 운 좋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욱에게 보내 줄 힘나는 문자를 생각하며 그녀의 입가에도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 ◇ ●

결국 태욱은 하루 종일 외근이었다. 그의 빈 집무실을 바라보다 서영은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퇴근 시간이 다가와 버렸다. 6시가 땡 하자 팀원들은 불이라도 난 것처럼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부서장인 지훈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영이 태욱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이후 둘 사이엔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겼다. 서영이 원하던 것이었다. 지훈은 더 이상 그녀를 부담스럽게 하지 않았다.

거기다 타이밍이 절묘하게 강 팀장의 연애 소식이 회사 전체로 퍼지고 나자 지훈은 서영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는 일이 없었다.

어쩌다 업무적으로 알려야 할 사항이 있으면, 다른 팀원을 통해 내용만 간단히 전달했다. 그게 이상했는지 몇몇 동료들은 차장님께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묻기도 했다. 서영은 대충 얼버무렸고, 굳이 지금의 거리감을 깨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서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따라 웃더니 가방과 옷을 챙겨 일어났다. 퇴근할 모양인 것 같았다. 서영은 태욱을 기다릴 생각으로 미리 다른 업무를 처리해 둘까 싶어 문서 화면을 열었다.

“저녁은 먹고 기다리는 게 어때?”

반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지선이 퇴근 준비를 마친 모습으로 나타났다. 서영도 배가 고프긴 했다. 그리고 요즘 태욱과 연애를 하느라 저녁 시간을 모조라 투자해 버려서 그녀가 섭섭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계 문제로 법무 팀 일이 많아져 훈재가 야근하는 날이 많아졌다고 듣기도 했다. 이번까지 거절하면 하나 있는 직장 친구마저 잃을 것 같아 서영은 얼른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안 그래도 닭발 먹고 싶었어요.”

“찌찌뽕. 역시. 영혼의 단짝이라니까.”

지선과 서영은 팔짱을 낀 채 나란히 사무실을 벗어났다. 두 사람이 복도로 나왔을 때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간 지훈도 아직까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선은 평소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퇴근하시나 봐요?”

“네. 배도 고프고 해서요.”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세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지훈은 지하층을 눌렀고, 지선이 1층을 누르려 하자 그가 대신 눌러 주었다. 지선은 감사하다며 눈인사를 건넸다.

“차장님 자취하신다 그랬나. 밥 챙겨 먹기 힘드시죠?”

“뭐, 다들 그렇죠. 오늘도 라면 한 그릇 먹고 들어가려고요.”

지훈은 간단히 대답하고 짧은 미소를 보였다.

“라면 먹고 힘쓰겠어요? 안 그럼, 우리 닭발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그저 한 공간에 있는 게 어색한 건넨 말이었다. 지선은 지훈이 당연히 거절할 줄 알고 물었는데 그는 서영을 돌아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내가…… 눈치 없이 끼는 거 아닙니까?”

말속엔 망설임이 담겨 있었지만 표정은 아니었다. 지훈은 확연히 밝아진 얼굴로 자신이 눌러 놓은 지하층 버튼을 다시 눌러 취소시켰다. 지선은 뒤늦게 자신이 말을 잘못 꺼냈다는 걸 깨달았다.

“아하하……, 그럼 차장님이 계산하시면 됩니다.”

뒤늦게 서영의 굳은 얼굴을 알아챘지만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지선은 소리 나지 않게 입 모양으로 서영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달했다.

서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 그녀만 빠진다는 것도 우스웠다. 뭐 그렇게 피할 자리인가 싶기도 했다. 지훈과 둘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곧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고, 세 사람은 함께 회사 밖으로 걸어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