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30화 (30/75)

10. 행복이라는 감정 (4)

“뭘 그렇게 열심히 보내?”

“아니에요.”

지선의 물음에 서영은 얼른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제야 와글와글 시끄러운 구내식당의 소음이 귓속으로 들어왔다. 이게 꿈은 아니란 걸 증명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서영은 자신 앞에 놓인 반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태욱에게 문자로 적어 보내면서 손가락이 간지러워 혼이 났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연애도 이런 걸까. 그녀는 자신이 태욱과 진짜 연애란 것을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지만 서영은 그것마저 태욱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장난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 번씩 의심이 들기도 했다.

누구든 너무 잘 믿어서 문제였던 그녀인데 왜 태욱에게만 이러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유를 만들자면 잘못 끼운 첫 단추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고백하고 만나는 사이는 아니니까. 욕심을 부리지 말자고 했지만 어느새 서영은 태욱을 그 전보다 더 좋아해 버리고 말았다. 이럴 줄 몰랐을까. 앞날이 어떨지 훤히 보이는데도, 그 길을 선택한 자신을 책망해 봐야 점심시간이나 줄어들 뿐이었다. 서영은 얼른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뭐야? 왜 이쪽으로 와? 저 인간들.”

서영은 무슨 소린가 싶어 지선을 바라봤다. 오늘은 점심까지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평소와 달리 혼자 점심을 먹어야 했다. 식당으로 향하느냐, 간단히 편의점 음식을 사 먹나 고민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지선을 만났다. 외근을 나갔다가 지금 막 들어오는 길이라고 했다. 망할 부서장이 개인 약속이 있다며 점심도 사 주지 않고 튀어 버려 밥도 먹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다. 서영은 잘됐다며 그녀와 함께 곧장 식당으로 내려온 길이었다.

“합석해도 괜찮습니까?”

두근.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서영의 심장이 반응했다. 태욱은 당연한 듯이 서영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지선의 옆엔 난처한 표정의 훈재가 자리를 잡았다.

지선은 당연히 훈재에게 눈치를 주었다. 회사에서 티 나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자고 합의장에 도장까지 찍어 가며 한 결혼이었다. 그랬기에 둘은 회사에선 누구보다 철저히 남남처럼 지내 왔다. 그 룰을 깰 수밖에 없게 된 건 훈재의 탓이 아니라 그의 앞자리에 앉은 강태욱 때문이었다.

“이미 앉으셨으면서 묻긴 왜 물…….”

지선의 입에서 날카롭게 나오던 말이 훈재의 손가락에 의해 저지되었다. 허리를 찔린 그녀는 남편을 살벌하게 쳐다봤다. 나란히 붙어 앉은 것도 모자라 터치까지. 오늘 반성문을 얼마나 많이 쓰려고 이러나 싶어 이를 갈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 변명이 흘러나왔다.

“박 변은 나가서 먹자고 했는데 내가 이리로 오자고 했어요.”

태욱은 지선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것도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이다. 촌철살인에 냉혈 인간인 강태욱은 어디로 간 거지. 지선은 태욱을 모르는 사람 보듯 의아하게 바라봤다.

“내가 꼭 이 자리에서 먹고 싶어서.”

뒷말을 덧붙인 태욱이 서영을 바라보며 웃었다.

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건 지선만이 아니었다. 훈재도, 서영도, 태욱의 닭살스러운 말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미 구내식당 안의 모든 시선이 네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박훈재와 이지선은 그렇다고 해도 강태욱과 윤서영은 무슨 조합이냐고. 모두들 태욱이 사귄다는 여자가 혹시나 서영이 아닐까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세 그럴 일은 없다며 고개를 흔드는 게 보일 정도였다. 지선은 태욱의 행동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은 연애를 엄청 티 내면서 하시나 봐요.”

“여, 아니, 이 대리.”

훈재가 지선을 말렸지만 그녀의 입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 누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이 대리는 좋아하는 걸 숨기는 편인가 보죠?”

지선은 그대로 입을 벌린 채 태욱을 바라봤다. 어차피 말로는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좋아한다니. 이렇게 미친 듯이 티를 내는 게 강태욱의 연애 스타일이란 말인가. 짝사랑했던 쪽은 오히려 서영이 아니었나. 지선은 더욱더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서영에게 그간의 일들을 알아내려고 하면 알아낼 수 있었다. 추측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기도 했다. 진실이 어찌 되었든 간에 둘은 지금 연인으로 묶인 상태였다. 그러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기는 게 남자와 여자였다. 서영의 짝사랑을 가장 안타까워한 사람이 지선이었기에 한 번의 기회라도 있길 바랐다. 그렇다고 강태욱을 경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서영에게 상처를 내는 일이 생기면 지선이 나설 생각이었다.

공식적으로 강태욱 팀장의 팬클럽 회장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팬심이었다. 지선이 인간적으로 마음을 준 사람은 서영이었다. 무던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서영이 누구보다 강한 매력을 지닌 여자라는 걸 지선은 알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그녀가 항상 서영에게 충고하고 도움을 주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정작 위로받고 힘을 얻은 건 지선이었다.

서영은 상대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항상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 주었고, 힘들어할 때면 말없이 안아 주며 시시한 농담으로 웃음 짓게 만들었다. 이런 서영이 그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랐기에 지선은 태욱의 진심이 더 궁금했고, 한편으로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저도 좋아하는 거 다 티 내면서 살았고, 그렇게 살아서 이 남자 만날 수 있었어요.”

지선은 옆자리의 훈재를 슬쩍 바라봤다. 와이프의 뜬금없는 고백에 얼굴이 붉어진 건 남편 쪽이었다. 당장이라도 비상구로 끌고 가 왜 옆자리에 앉았느냐고 따질 줄 알았는데, 이번엔 채찍 대신 당근이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여자였다.

“근데 내키는 대로 살았더니 주변이 다 적이고, 날아오는 건 욕밖에 없더라고요. 특히나 이 대단한 회사에서는 연애를 하면 피해는 전부 여자가 보더라고요. 윤 대리는 저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그러니까, 팀장님이 조심 좀 해 주세요.”

오늘만 살자는 마인드로 살았던 여자라 뒷감당에 대한 걱정은 없는 것 같았다. 훈재는 이제 슬금슬금 태욱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 회사에 불만을 가진다는 건 강태욱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태욱은 지선에게 날카로운 시선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수북하게 떠 온 제육볶음을 모조리 서영의 식판에 덜어 주었다.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은 숨을 죽인 채 그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내 생각이 짧았네요. 반성하겠습니다. 그럼.”

태욱은 한 술도 뜨지 않은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훈재를 내려다봤다. 안 일어나고 뭐 하느냐는 눈빛이었다. 하여튼 사람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훈재는 어쩔 수 없이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두 사람이 구내식당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지선은 여전히 얼음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표정 변화가 자유로운 쪽은 서영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식판에 수북이 제육볶음을 덜어 주고 간 태욱의 행동이 그답다 생각하면서 또 멋대로 가슴이 따뜻해지고 말았다.

“배 터져 죽으라는 경고인가.”

지선이 서영의 식판을 바라보며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거 제 식판이에요.”

서영은 혹시나 제육볶음을 뺏길까 봐 한 손으로 식판을 가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지선은 잠시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누굴 위해서 싸워 주었는데. 고작 제육 한 점 나눠 주지 못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그러는 거 아니다, 자기.”

섭섭하다는 말투에 서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문나도 괜찮아요. 마음대로 떠들라고 해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저.”

“오오. 윤서영이 언제 이지선이 됐나요?”

둘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식사를 시작했다. 구내식당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 지선이 이미 겪은 일이었고, 서영도 예상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어쩔 건가. 서영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태욱이 그럴 것이라 미리 말했기에 무던해진 건가. 아니면 그의 연인으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 때문인가. 그건 서영 자신도 헷갈렸다.

“근데, 나……. 강 팀장한테 찍힌 거지?”

일을 치고 난 뒤에야 앞으로가 걱정되었다. 지선은 제육볶음이 목구멍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중간에 탁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훈재가 옆구리를 찔렀을 때 정신 차렸어야 했다. 변호사 남편 말을 들으면 회사 생활이 편할 텐데. 불같은 제 성격이 문제였다.

“설마요.”

“마지막에 막, 이렇게 웃었는데?”

지선은 태욱의 서늘한 웃음을 따라 했다. 눈을 부라린 채, 입꼬리만 얄밉게 올렸다. 중요 포인트만 강조해 어쩐지 우스꽝스러웠다. 서영은 지선이 꼭 개그맨 같아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웃은 거니까 괜찮겠지?”

지선은 혼자서 정신 승리를 했다.

“아까 당당하시던 이 대리님은 어디 가셨어요?”

서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확실하게 뼈를 때렸다. 지선은 한 방 맞은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사실은……, 웃을 때 오줌 지릴 뻔. 소름 돋아서 죽는 줄 알았어.”

다시 그 웃음이 생각난다는 것처럼 지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강 팀장이 웃을 때 젤 무서워. 뭐, 노려봐도 무서운데, 암튼, 그냥 날 쳐다만 봐도 기가 죽는다랄까. 자주 안 보니까 다행이지. 저런 남자랑 만나는 여자는…… 그래, 자기랑 있을 땐 어때? 같이 있을 때도 눈빛 하나로 사람 막 후려치고 그래?”

지선은 진짜 궁금했다. 강태욱은 연애를 할 때 어떤 모습일지.

“그렇진…… 않아요.”

서영은 모호하게 대답하고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회사에서처럼 그러지만 않으면 땡큐지. 강 팀장한테 뭘 바라냐고. 나는 예전부터 남자들 웃는 모습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 있잖아, 막 대형견처럼 반달 모양으로 눈꼬리가 휘는 거. 사람 녹게 만드는 그런 거. 근데 훈재 씬 딱 진돗개과야. 막 달려들……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지선은 처녀의 환상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 말을 멈췄다.

대형견이라. 서영은 저절로 누군가가 떠올랐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 얼굴만 생각이 나 버렸다. 그걸 아는 것처럼 그녀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태욱에게서 온 문자였다. 지선의 눈치를 살피며 확인해 본 화면엔 다급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큰일 났음.]

“아, 저 다 먹었는데…… 일이 생겨서 먼저 일어날게요.”

“그래. 먼저 가.”

지선은 괜찮다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서영은 급하게 식판을 정리하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태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질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문자를 보내려고 하는데 벌컥 비상계단 쪽의 문이 열렸다. 곧 검은 팔이 튀어나와 그녀를 끌고 갔다. 놀라 서영이 고개를 들자 눈앞에 태욱이 서 있었다.

“지금 나가야 해서.”

태욱이 환하게 웃으며 다급하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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