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29화 (29/75)

10. 행복이라는 감정 (3)

아침부터 문자를 보내 그를 호텔 VIP 룸에 앉힌 사람은 손철민 상무이사였다. 그러니까 가족 관계로 따지자면 사촌 형. 하지만 가족끼리 할 이야기라면 그를 불러내진 않았을 테니, 분명 그가 지시한 중국 신사업 진행 상황에 대한 문제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출장을 같이 간 법무 팀장도 있어야 할 자리였다. 태욱은 손 이사에게 의사도 묻지 않고 조식 자리에 훈재를 깍두기로 끼워 넣었다. 어색한 분위기는 딱 질색이었다. 숨통을 틔워 줄 역할을 할 사람으론 친구이자 동료인 훈재가 제격이었다.

“박 팀장 신혼 아닌가?”

게살수프를 한 수저 떠 들어 올리던 철민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훈재를 바라봤다.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반성 좀 하라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옆자리에 앉은 태욱에게선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잔소리를 시작하면 보너스 얘기부터 던지는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할까 싶었다. 기브 앤 테이크. 훈재 역시 싫다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와이프가 신사업 팀이라고 하지 않았나?”

꺼내려는 이야기의 주제가 아무래도 중국 출장에 관한 건 아닌 것 같았다. 태욱은 미끈거리는 게살을 숟가락으로 이리저리 휘젓다 고개를 들어 철민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동안 팽팽하게 날이 선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대놓고 싸우면 말리기라도 하지. 분위기가 점점 더 살벌해지자 난처해지는 건 훈재뿐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하는데 철민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선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묻는지 그도 모르지 않았다. 사내 연애와 결혼. 그 뒤로 이어질 이야기는 현재 사내에서 떠도는 태욱의 소문에 관한 것일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마치 누가 뿌려 놓은 것처럼 유신건설 강태욱 팀장의 연애는 하루 만에 수면 위로 올랐다. 어제 오후만 해도 상대 여자의 이름까지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서영이라는 게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지선은 오늘 아침 출근길에 안티 세력에 대한 대처 방안을 훈재에게 진지하게 상의했다.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어째 그녀가 더 전투력이 상승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지유린이 벌인 소동이 그녀의 걱정을 한껏 끌어 올렸다. 뒤늦게 괜찮다는 서영의 문자를 받긴 했지만 앞으로 이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손철민 이사가 태욱의 여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태욱은 철민 다음으로 강력한 유신의 후계자였다. 자신의 경쟁자가 만나는 여자라면 손 이사도 주시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재벌들의 세력 다툼은 변호사들의 세계에선 가장 큰 돈줄이었다. 어느 라인에 붙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뒤바뀌기도 했다. 그다지 야욕이 없는 편에 속하는 그조차도 종종 태욱의 미래를 그려 보곤 했다. 농담처럼 네 시다 노릇 하면 내 노후가 보장되느냐고 물었던 적도 있었다. 태욱은 그렇다, 아니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

어쩌면 녀석도 자신의 앞날을 알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유신을 집어삼키는 자가 승리자일 뿐, 어떤 과정으로 어느 누구가 차지하게 될지는 점칠 수 없었다. 아무리 손필성 회장의 첫 손자인 손철민 이사라고 해도 마음 놓고 여유를 부리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법무 팀장 가정사가 궁금해서 불러내진 않았을 테고.”

침묵을 깬 건 예상과 달리 태욱이었다. 훈재가 철민의 의중을 눈치챌 정도면 능구렁이 강태욱이 모를 리 없었다. 녀석의 고개가 반쯤 기울어지고 입가가 얄밉게 올라섰다. 상대가 자신이 던진 미끼를 겁도 없이 덥석 물었을 때 나오는 그만의 건방진 행동이었다.

“본론만 말하시죠. 여기, 한가한 사람 있습니까?”

태욱은 깍듯이 존대했지만 말속에 벼려져 있는 칼날은 손 이사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사촌지간이라 해도 그들은 태생부터 친해질 수 없는 관계였다. 가진 자들의 업이라면 업이었다. 왕의 자리는 하나였으니 누군가는 포기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누가 얼마를 가져가고 자신이 얼마를 가질 수 있는지부터 따지며 자랐다.

“그래. 윤서영이라고 하던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철민이 운을 뗐다. 돌려 말하지 않고 이름 하나를 입에 올렸다. 태욱은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차갑고 서늘하게 눈빛이 돌변했다.

훈재는 그 모습을 보며 소름이 돋고 말았다. 친구이긴 했지만 태욱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자라 온 환경이 평범하지 않았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긴 했지만 모두가 자신처럼 그를 이해하진 않았다.

재벌가의 자제들 중 제대로 쓸 만한 인물이 몇이나 될까, 변호사 동기들과 한탄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쓰레기들이 많았고, 선대에게 나쁘고 악한 습성들만 배워 회사든 가족이든 모든 걸 말아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철민은 어떨까. 훈재는 손 이사 쪽을 바라봤다. 그는 재벌가의 자식들 중에서 튀지도 모나지도 않는 평범한 편에 속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유신그룹의 손필성 회장이 어떤 사람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변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진다는 양반이었다. 그런 독사에게 흐리멍덩하고 칼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후계자가 눈에 찰 리가 있을까.

기업은 돈의 논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피바람이 불 때 살아남으려면 피바람의 칼날에도 무너지지 않고 이겨 내는 담력 또한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손 이사는 아버지 손인국 사장의 그늘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점이 손필성 회장에겐 마이너스가 될 것이 확실하다고 평가되었다.

“작은어머님이랑 여러 가지로 닮았다던데?”

위험한 선을 함부로 건드리는 철민의 눈동자엔 상대를 파고들려는 계산적이고 치밀한 고약함보다는 열등감만이 만연했다. 자신이 모든 걸 차지할 줄 알았던 철민은 뒤늦게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애써 무시했던 태욱이 바닥에서부터 한 단계씩 올라설 때마다 철민의 책상 서랍엔 녀석에 대한 보고서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급기야 손 회장이 자신을 제쳐 두고 태욱의 혼사부터 주선하려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질투심마저 들지 않았을까.

형식적인 손주 장사라는 걸 알았지만 그 라운드 위에 자신이 아닌 태욱을 올려놓은 것만으로도 그는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지금까지도 ‘손’이 아닌 ‘강’으로 살고 있는 태욱이기에 그는 어느 정도 손 회장을 믿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머리 좋은 영감의 또 다른 트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무슨 행동이든 취해야겠다는 조급함이 생겼을지도.

“그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태욱은 여유롭게 철민의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의 감정싸움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은 훈재였다. 괜히 아침부터 불려 나와 이쪽저쪽 눈치를 보느라 출근도 하기 전에 모든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마음에 들어 하시고?”

철민이 묻자 태욱이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으로 받아쳤다.

“무슨 일곱 살 어린애도 아니고.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야 만납니까? 손 이사님은 그러시나 보죠?”

태욱은 상대의 약점을 담대하게 비꼬는 능력이 탁월했다.

“아, 회장님께 데려간 건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제가 좀 바르게 커서 만나는 사람이 생기면 어른들께 인사부터 드려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괜히 여러 사람 긴장하게 만들었네요. 죄송합니다.”

철민의 얼굴이 굳은 채 펴지지 못하자 태욱은 진정하라며 그의 쪽으로 친절히 물잔을 밀어 주었다. 끝내 흐릿한 웃음을 보인 손 이사는 더 이상 상대를 자극하지 않았다. 때마침 걸려 온 전화를 받기 위해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훈재는 태욱을 향해 기어코 한마디를 던졌다.

“적당히 좀 해라.”

태욱은 피식, 웃으며 자신 앞에 놓인 식은 게살수프를 흡입하듯 먹어 치웠다. 어차피 싸움이 되지 못하는 게임일지도 몰랐다. 울타리 안에서 주는 밥만 받아먹은 사자와 찢기고 구르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온갖 산들을 돌아다니며 먹이를 씹어 삼켰던 호랑이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훈재는 제 친구지만 태욱이 한 번씩은 무섭기도 했다.

“식당 고르는 센스부터 꽝인데 뭘 기대하는지.”

물잔을 들어 입을 헹군 태욱은 재킷을 챙겨 들었다.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던 훈재는 어쩐지 녀석의 분위기가 어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것에 민감한 편이 아니었지만 어제는 아침 보고부터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들어 그의 슈트만 뚫어지게 쳐다본 기억이 떠올랐다.

“근데 너 어제 집에 안 들어갔어?”

“뭐?”

태욱이 놀란 눈으로 훈재를 바라봤다.

“옷이 왜 그대로냐고. 윤 대리한테 그 수모를 당하게 해 놓고 다시 야근하러 간 거야? 진짜 너도 참 독종이긴 하다.”

하여간 헛다리 짚는 건 한결같았다. 태욱은 생각난 김에 입을 열었다.

“알면 일 하나 부탁하자.”

녀석이 부탁이라는 말을 쓰자 훈재는 슬슬 겁이 나기도 했다. 또 어떤 일에 발을 담그게 하려고 이러나. 중식당 밖으로 걸어 나가는 발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건양, 지유린, 다 먼지 나도록 털어 봐. 네가 하기 찜찜하면 저번에 지유린 담당이라던 네 변호사 친구 전화번호만 넘겨. 내가 만날 테니까.”

“태욱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건양의 지유린을 건드려 봐야 그에게 좋을 게 없었다. 같이 흙탕물로 빠질 게 분명했다. 그런 재주는 타고난 여자라고 들었다.

그저 무시로 일관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태욱의 눈동자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보였다. 훈재는 녀석이 서영에게 얼마나 빠져 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사귀는 사이인지 궁금했었는데, 이젠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졌다.

사내 연애가 위험하고도 씁쓸한 뒷맛을 가진다는 걸 훈재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피해를 보게 되어 있었고, 그것은 대부분 여자 쪽이었다. 지선 역시 그 피해자로 영업 팀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다. 서영 또한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서영 씨가 더 다치면?”

훈재가 물었다.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고.”

태욱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간단히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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