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행복이라는 감정 (2)
스르르 눈이 떠졌다. 서영은 습관적으로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을 핸드폰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내리자 그녀의 손 위에 포개진 큼지막한 다른 손이 보였다.
엄마야. 호러 영화를 볼 때처럼 서영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게 안겨 결박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
어찌 이걸 잊고 잠들 수 있었을까. 그녀가 생각해도 대단했다. 태욱과 만날 약속만으로도 설레 잠들지 못한 날들이 우습게도 그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평상시보다 더 단잠을 자 버렸다.
서영은 어제를 떠올렸다. 태욱의 고백을 듣고 그녀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잠옷을 입은 채로 5층 계단을 뛰어 내려가 그에게 안겼다.
서영은 태욱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고, 그렇다면 하룻밤 재워 달라는 그의 뻔뻔한 제안을 들었다. 그녀가 망설이자 태욱이 덧붙이듯 그저 손만 잡고 자겠다고 말했다.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다. 서영은 침대에, 태욱은 소파에, 각자 자리를 잡고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도란도란 말장난을 하다가 태욱이 먼저 조용해져 버렸다. 그가 잠이 든 게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화장실을 핑계 삼아 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도 태욱은 잘생겨 보였다. 아주 단단히 빠졌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에게 손이 잡히고 그녀의 몸이 소파로 넘어졌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태욱의 몸 위로 그녀의 몸이 겹쳐지게 되었다. 잠결에 그녀를 안아 좁은 공간에 눕힌 그가 다정하게 입술을 머금고 키스를 시작했다. 어느새 잠이 달아난 것인지 그의 행동은 거침없고 때론 사납기까지 했다. 어쩌면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영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찌 그럴 수 있냐고 물으면 따뜻한 태욱의 체온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키스를 하다가 잠들어 버린 서영을 안아 침대에 눕힌 태욱이 아쉬움에 그녀의 뺨만 쓰다듬다 몸을 일으켰을 때, 서영은 태욱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그를 자신의 옆에 눕혔다. 악마인가. 심각하게 한숨짓던 그의 표정이 다시 떠올라 웃음이 났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했지?”
서영을 더 깊숙이 품에 당겨 안으며 태욱이 귓가에 속삭였다. 혼내는 목소리엔 아직 잠기운이 묻어 있었다. 무서운 팀장 강태욱은 없었다. 다정하고 잘 웃는, 그녀만 아는 태욱이 곁에 있었다.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손장난을 치며 태평하게 구는 그의 행동에 서영은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요즘 태욱을 생각하면 자꾸 그런 마음이 들었다. 들여다보고 마주할수록 구해 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어디에서. 무엇으로부터. 형체도, 이유도 없는 동정일 수도 있었다. 그래, 그의 말대로 불쌍하게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감정일지도 몰랐다. 누가 누굴 안타깝게 본단 말인가. 지금 위로받고 있는 건 그녀 자신이었다.
서영은 태욱 쪽으로 돌아누웠다.
“곤란한데.”
어느새 잠이 깬 그가 심각하게 서영을 바라봤다.
“왜요?”
“남자는…… 아침이 더 위험해.”
그의 말에 서영은 당연한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꼭 놀려야 하는 남자와, 거기에 한 번도 어긋남 없이 반응하는 여자였다. 서영이 그를 노려보며 몸을 살짝 떨어뜨리려 했다.
“멀어지라는 소리 아니었는데.”
그는 도망가려는 서영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한 팔로 그녀의 몸을 휘감아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서영의 얼굴은 태욱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쿵쿵쿵.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평온한 줄만 알았던 그의 가슴에서도 참지 못할 흥분이 느껴졌다. 정말 혼자만의 감정은 아니구나. 서영은 안심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아랫배를 괴롭히는 단단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두렵기도 했다.
아무리 이제껏 제대로 만난 남자가 없다고 해도 인간의 욕망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주변에서 가십처럼 떠들던 야한 농담을 주워들은 세월도 무시할 순 없었다. 이 정도 크기라면 아픔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그녀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무슨 생각 합니까?”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태욱이 물었다.
“아, 아침이요. 뭐 먹지. 뭐 드실래요? 냉장고에 뭐가 있었더라.”
서영이 눈조차 맞추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자 태욱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고생하는 아랫도리에 대해선 유감이었지만 그 역시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느리게, 천천히, 하나씩 순서대로 맞춰 가고 싶었다. 서영이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부려 보았다.
“나랑 몇 개만 약속하면 풀어 줄게요.”
“…….”
서영이 대답 없이 그를 바라봤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화하기.”
멍한 표정을 짓던 서영이 곧 작게 웃으며 알았다 대답했다.
“점심 메뉴 알려 주기.”
정말 이런 것들이 궁금한 걸까. 서영은 동의하면서도 의아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저녁은 같이 먹읍시다.”
“팀장님이 저보다 더 바쁘시잖아요.”
서영이 진지하게 물었다. 태욱이 심각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내가 1순위였으면 한단 소리.”
“아……. 그럴게요.”
“그리고 마지막. 아주 중요한 거.”
“뭔데요?”
“윤서영이 좋아하는 거, 자기 전에 문자로 하나씩 적어 보내기. 뭐든 상관없어. 삼겹살에 비빔면을 먹는 거라도. 당신이 좋아하는 걸, 내가 좀 많이 알아야겠어.”
분명, 이 남자는 선수일 것이다. 서영은 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먹먹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이런 남자를 두고 어떻게 벗어나려고 했는지. 서영은 이제 뒷일은 생각조차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건…… 저도 받고 싶어요. 팀장님이 좋아하는 거.”
“지금도 말할 수 있는데?”
태욱이 능글맞게 웃었다.
“뭐…… 아.”
“윤서영.”
“…….”
“내일도 윤서영일걸.”
진짜 말로는 못 당하는 남자였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싫으면 오늘 이 침대에서 하루 종일…….”
“알았어요! 팀장님은 마음대로 하세요.”
서영은 얼른 합의하고 태욱에게서 벗어났다. 출근이라도 해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설렘 지수가 최고치였다.
언제나 아침 지하철에서 바닥을 치는 기분은 집무실에서 업무를 하고 있는 태욱을 마주할 때면 조금씩 회복세를 보였다. 그에게 외근이 없는 날은 더 행복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랄까. 그런 순간마다 그녀는 윤서영이 아니었다. 그저 태욱을 마음에 품은 여자였다.
“아침은 뭘로…….”
“윤 대리 먼저 씻어요.”
냉장고를 연 서영이 메뉴를 생각하는데 태욱은 벌써 옷을 갖춰 입고선 침대 정리까지 하는 중이었다. 머리는 산발인 채로 여전히 잠옷 차림인 그녀는 순간 민망해졌다. 똑같이 삼겹살에 비빔면을 비벼 먹고 잠들었는데 얼굴이 부은 사람은 서영 혼자였다. 냉장고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서영은 우유라도 먹어 둘걸,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럼, 저부터 씻을게요.”
얼른 제대로 된 몰골로 돌아가기 위해 서영은 욕실로 들어섰다. 거울을 본 순간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당분간 삼겹살과 비빔면은 쳐다보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샤워기의 물줄기를 강하게 틀었다. 차가운 물이 그녀의 얼굴 붓기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혀 주길 빌었다.
“이걸…… 언제…….”
서영은 자신이 씻은 시간이 5분도 채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벽시계를 바라보자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짧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런 요리를 만들어 낼 만큼 긴 편은 아니었다. 그녀의 식탁 위에는 금방 요리한 오믈렛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재료를 어떻게 찾았는지가 더 궁금했다.
“빨리 앉아서 먼저 먹고 있어요. 난 금방 나오니까.”
서영을 식탁 의자에 앉힌 태욱이 욕실로 향했다. 그를 먼저 씻게 했어야 했나. 서영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딱 한 입만 먹겠다며 숟가락을 들었다. 전문 레스토랑에서 파는 것처럼 모양까지 반듯하고 예쁜 오믈렛을 수저로 떠 입 안에 넣고 씹자 엔돌핀이 마구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맛까지 이리 좋을 줄이야. 도대체 못하는 게 무엇일까. 정말 태욱에 대한 미스터리한 궁금증만 늘어난 서영이었다. 혼자 살면 끼니 때우기도 힘든 게 모든 직장인들의 설움이 아니었나. 태욱은 단순히 시간이 없어 밥을 먹지 못했던 것 같았다.
“맛있어요?”
자꾸만 손이 가 오믈렛을 반이나 먹어 치운 서영은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태욱은 간단히 씻기만 했는지 금방 욕실을 나왔다. 아직 물기가 남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늘 반듯하게 이마를 드러내 이지적이고 차가운 느낌을 받았는데, 앞머리가 차분하게 내려져 있는 걸 보니 색다르기도 하고, 묘하게 야해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서영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맛, 없어요?”
“아, 아뇨. 엄청, 진짜 맛있어요.”
서영은 엄지까지 들어 보였다.
“엄청, 진짜 맛있다니 다행.”
태욱은 그녀의 대답에 만족하며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그는 곧 재킷을 집어 들었다. 서영은 그 순간 그가 아침을 못 먹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이 생겼네요. 먼저 가도 괜찮겠어요?”
“네네. 그럼요. 얼른 출근하세요.”
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욱을 배웅했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서려던 그가 갑자기 돌아섰다. 서영은 무언가 놓고 간 게 있나 싶어 고개를 돌려 집 안을 살폈다. 그런데 그 고개가 태욱의 손에 의해서 다시 돌려졌다.
“내가 찾는 건, 여기.”
태욱이 쪽, 하고 서영에게 모닝 키스를 했다.
“아…….”
서영에게선 또 바보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사에서 봅시다.”
태욱이 돌아서는데 서영이 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운전 조심하세요.”
또다시 쪽. 입술이 맞부딪쳤다. 이러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태욱이 서영의 허리를 감아 안고서 깊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달콤한 오믈렛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맛보지 못한 음식을 이렇게 대신 먹는 기분이었다. 태욱은 키스하는 내내 행복이라는 감정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