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행복이라는 감정 (1)
아침 염불을 끝마칠 즈음이었다. 정애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올렸다. 걸음 속도만으로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집 안에서 저렇게 걷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녀는 염주를 움켜쥐고선 다시 한번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곧 벌컥 문이 열리고 방 안의 분위기를 파악한 은림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정애가 여전히 기도에 빠져 있자 그녀는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창가 쪽 협탁에 걸터앉았다.
“아가씨.”
정애가 몸을 돌리고 은림에게 눈인사를 했다.
“어? 언니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표정을 짓던 정애는 은림이 앉아 있는 협탁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곧 미안해하는 얼굴이 된 은림이 얼른 협탁 앞 의자로 몸을 옮겼다. 평소 못 배운 사람처럼 아무 데나 턱턱 걸터앉는 습관을 아버지인 필성이 아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날것 같고 어수선한 태도를 다소곳하며 예의 바르게 바로잡아 줄 임무를 맡은 게 정애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머니란 말을 해 본 적 없는 은림에겐 정애가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다. 작은오빠의 부인이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조금 사람다워졌다.
하지만 태생은 속일 수 없었다. 은림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엿듣게 된 날, 그녀는 두렵고 무서웠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밥도 잠도 거부했다. 하지만 박 비서는 간단하게 그녀의 팔에 링거를 꽂았고 그녀는 죽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걸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아 버렸다.
‘작정하고 달려든 계집년.’
아버지의 말은 돌림노래가 되어 그녀의 귓가에 환청처럼 울렸다. 은림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내연녀였고, 필성을 속여 은림을 품었으며,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골 산촌에서 늙은 산파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낳았다고 했다.
그리고 은림은 거래되었다. 그녀가 유신에 들어가 사는 대가로 어머니가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요구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병을 앓다가 일찍 죽었다는 아버지의 하얀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철저하게 회사와 가족을 지켜 낸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은림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 당시 필성의 나이는 마흔아홉이었고, 아내를 지병으로 떠나보낸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장성한 두 아들은 스물다섯, 스물셋이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더러운 욕망으로 태어난 은림이 유신으로 들어와 받게 될 대우는 뻔했다. 상처는 당연했다. 외로움을 친구처럼 안고 지냈다.
단 한 사람, 작은오빠 인주만이 때때로 그녀의 손을 말없이 붙잡아 주었다. 인주는 필성과 인연을 끊은 뒤로도 은림만은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가 몰래 그녀를 찾아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면 멍청하게도 다시 희망이란 걸 품곤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여전히 손필성이 더럽게 낳아 데려온 딸, 손은림이었다. 그것은 불변했다. 그런 결과를 만든 사람이 자신이면서 필성은 한동안 삐뚤어지는 은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후 결단을 내리듯 그녀를 감옥 같은 시골 별장으로 보내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버려진 외로움이라는 것을 은림은 그때 처절하게 느꼈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고분해지고 아버지가 보낸 어른들의 말을 따랐다.
온 힘을 다해 살았다. 꾸역꾸역 밥을 먹고, 억지로라도 잠을 잤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열두 살이 된 어느 날, 정애와 태욱을 만났다. 작은오빠가 사랑한 여자. 그리고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얻은 아들. 두 사람의 등장은 은림에게 희망의 빛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과도 같았다.
“그 버릇 다 고친 줄 알았더니.”
정애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은림이 어엿한 성인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중이라 여겼다. 필성이 그녀에게 던져 준 아트센터 관장 일도 제법 알차게 해내고 있다고 들었다. 한 번의 실패를 겪긴 했지만 좋은 밑거름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이제 은림이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사랑받으며 살아간다면 정애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언니, 사람이 쉽게 변하면 죽는다고 했어요.”
은림은 유쾌하게 받아쳤다. 그러곤 손뼉까지 치며 말을 이었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언니 절에 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요?”
그 말을 하고 싶어 은림은 정애가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절에 들어갈 때는 핸드폰을 가져가지 않는 정애였기에 그녀가 본가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 집에서 달려온 길이었다. 이럴 땐 고집을 부려 독립한 게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필성을 매일 아침마다 마주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고행은 없었기에 아쉬워도 몸이 고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태욱이가 여자 데려온 거요?”
정애는 아무렇지 않게 답하고, 염주를 정리해 보관함에 넣었다.
“아, 뭐야. 벌써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김새는 일이 또 있을까. 은림의 얼굴에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근데 누가 말해 줬어요? 강태욱이 전화했어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정애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루틴에 맞춰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셔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반가운 말동무도 왔으니 더더욱 좋은 차가 필요했다. 그녀는 방 한쪽에 마련된 다도 공간으로 들어섰다. 은림이 냉큼 뒤따라오며 다시 물었다.
“그럼, 누가? 혹시…… 설마, 주미연 씨?”
은림의 호칭에 정애가 또다시 눈빛으로 야단을 쳤다.
“네네, 큰 새언니요.”
“오늘 아침에 전화해서 그러시더라고요. 알고 있냐고. 몰랐지만 알고 있다고 해야지, 뭐. 하하.”
정애가 속없이 웃자 은림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아들 일에 이리도 태평할 수 있을까. 그 아들인 태욱 역시 그랬다. 그저 서로가 잘 있으면 그걸로 된다는 것처럼 모자 사이엔 대화가 없는 편이었다.
상대를 너무나도 믿기 때문일까. 결국 애달파 이리저리 소식을 전하는 건 고모인 은림이었다. 그리고 제 아들의 앞길을 막을지도 모르는 경쟁자를 예의 주시하는 이 집안의 큰며느리 미연도 한몫 거들었다.
“어디서 들었지. 맞다, 춘천댁이랑 친하시지. 그 아줌마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같이 사는 사람은 언닌데 왜 거기다가 입을 털어 대는지 몰라.”
“진짜 주인을 알아보는 거겠죠.”
정애는 남 일처럼 말하고는 찻잔을 들었다. 마치 순서가 정해진 것처럼 향을 맡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민들레 꽃잎으로 우린 차는 은은하면서도 쓴맛을 내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 준다기에 가깝게 지내는 스님에게 받아 온 것이었다. 차를 권하자 은림은 표정부터 변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맛도 없는 거, 싫어요. 언니나 많이 마셔요.”
은림이 돌아앉다가 다시 정애에게 시선을 맞췄다.
“근데 진짜 안 궁금해요? 태욱이가 여자를 데려왔는데.”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은 정애가 창밖에서 흔들리고 있는 나무를 바라봤다. 오늘부터 정원 정리가 시작된 것 같았다. 박 비서는 부여받은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땅에 뿌리 박힌 나무처럼 이 울타리 밖의 삶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정애는 한 번씩 그런 상상을 한다. 남편 인주가 희태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지금 필성의 옆을 지키는 사람이 희태가 아니라 인주였다면 그녀는 편안한 인생을 살았을까.
빌고 또 빌며 덜어 내려 했던 마음이 조금도 씻겨 나가지 못하고 남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데 걸린 시간만 몇십 년이었다. 태욱이 올해 서른넷이었고, 인주는 그 나이에 죽었다. 필성과 약속한 날짜가 곧 다가온다는 소리였다. 정애는 답답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언니. 언니, 내 말 듣고 있어요?”
은림은 정애를 어머니처럼 따랐지만 한 번씩 그녀가 누구보다도 멀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눈빛과 깊은 눈동자 안에 가득 찬 상처는 은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다. 정애가 내일 당장이라도 짐을 싸 집을 나가 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에 은림은 초조했다.
“태욱이가 데려온 아가씨, 어때 보였어요?”
도인같이 눈을 감고 있다가도 정애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치 떠나는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이 집안 핏줄 중 유일하게 은림에게 완전한 사랑을 주었던 작은오빠 인주 또한 이렇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어쩐지 아주 슬프게 느껴지던 어느 날, 그는 하늘로 떠났다.
“언니…… 보는 것 같았어요.”
은림은 정말 그랬다. 윤서영이라고 했던가. 태욱이 데려온 여자를 보자마자 자신의 열두 살 시절이 떠올렸다. 살다 보니 묻지 않아도 진짜와 가짜를 가려낼 수 있는 눈이 그녀에게도 생겼다.
허울뿐인 재벌 집 막내딸이었지만 그 타이틀만이라도 가지고 싶어 하는 이들이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주변에 많았다.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할 사람은 한눈에 보였다. 눈동자 안에 모든 답이 있었으니까. 눈칫밥을 먹으며 미운 오리 새끼처럼 자라 온 세월이 그저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시간들은 아니었다.
아트센터 일도 그랬다. 진짜를 주려는 사람들과 가짜를 팔고자 하는 이들은 그녀에게 건네는 인사부터 달랐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 주고 자신이 필요한 것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자라 온 외로움은 은림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마음을 붙이기 위해 아버지가 정해 준 남자와 결혼도 해 봤지만 결국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해 더 큰 상처만 남기고 헤어졌다. 혼자 살아야 할 운명인 것이겠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갔지만 한 번씩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다. 태욱이 여자를 데려온 날이었다. 그날 은림은 여자를 보며 웃는 태욱에게서 작은오빠 인주를 보았다. 그 말까진 정애에게 할 수 없었다. 은림은 조용히 생각을 지우고 정애가 바라보고 있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똑똑.
두 사람 사이의 고요를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곧 춘천댁이 들어서고, 정애의 앞으로 다가왔다. 방 안까지 들어올 정도로 그녀를 바쁘게 찾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사모님, 회장님이 찾으세요.”
정애는 필성의 부름을 기다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은림 쪽이었다. 아버지가 호출한 이유가 별거 아니길. 그녀는 마음속으로 빌며 소란스러운 창가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나뭇잎이 너무 싱그러웠다. 그래서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