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가 왜 이러는지 (5)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점점 더 위험하게 짙어졌다. 서영이 놀라 몸을 빼려 했지만 곧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물러나지 못하도록 뒤통수를 붙잡은 채 몰아붙이는 키스는 처음처럼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묵직한 혀가 입 안을 휘저었고, 그의 두 손은 그녀를 단단하게 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까스로 호흡을 뱉어 냈지만 태욱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더 깊게 파고들었다. 키스가 이토록 야한 행위였나. 서영은 뒤늦게 그걸 깨달은 사람처럼 온몸을 들썩여야 했다. 멋대로 입을 맞춘 대가라는 듯 태욱의 태도는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맞닿은 입술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의 손이 서영의 블라우스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뜨겁고 낯선 감각에 서영은 전율하며 몸서리쳐야만 했다. 온몸에 전기가 흘렀다. 이러다 정말 무슨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접촉과 뜨겁고 진득한 손길에 그녀는 잔뜩 겁을 먹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에도 태욱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아랫배를 훑어 올라간 그는 목표점을 찾듯 서영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서영은 비명을 내지를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이 브래지어 안으로 파고드는 순간 다급하게 그를 밀칠 수밖에 없었다.
“하아…….”
“…….”
잠시 휴전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입술이 떼어졌다. 그럼에도 태욱은 여전히 그녀를 결박하듯 한 손으로 끌어안은 채 앉아 있었다. 하나에 꽂힌 듯 오롯이 그녀에게만 시선을 두었다.
서영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 젖은 눈동자에 한참을 붙잡혀 있어야 했다. 이것 역시 능숙한 술수일까. 그녀의 눈과 코, 입술을 지나 목을 타고 내려온 그의 손길이 어느새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있었다. 서영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블라우스의 끝자락을 꼭 붙잡았다.
“윤서영.”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해야지.”
“……응.”
모든 걸 생략한 그의 반말에 그녀도 작은 반항심이 일었다. 또 웃음이 터진 태욱은 그에 반응하듯 서영의 블라우스를 단번에 거칠게 벗겨 냈다. 금세 웃음기를 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집어삼키려 했다. 서영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팀장님.”
태욱은 못마땅한 눈빛이었다.
“왜? 겁나요?”
서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입을 가져다 댔을 땐 어떤 각오든 한 거 아닌가?”
그가 또다시 물음을 던졌다.
“자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참 그녀다운 변명이었다.
“나 가져 보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여자는 어디 갔어?”
“그건…….”
서영은 뒤늦게 어느 날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팀장님도 저 겪어 보셨으니 아실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전에 제가 원하는 거 뭐든 들어주겠다고 하셨죠? 딱 세 가지만 말할게요.”
서영의 표정이 진지했다. 태욱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우리…… 잠자리까진, 하지 말아요.”
허. 태욱에게선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확고한 의지.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욱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복수야?”
누구를 탓할까. 태욱은 서영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가 파 놓은 함정에 그가 빠져 버렸다. 여기서 더 나가면 자신이 진짜 염치없는 개새끼라는 걸 증명하는 꼴이었다. 태욱은 큰 한숨을 몰아쉰 뒤 표정을 바꿨다.
애써 벗겨 놓은 그녀의 블라우스를 다시 입혀 주었다. 그러고는 서영을 사뿐히 안아 소파 위에 앉혔다. 서영은 그가 해 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 집, 진짜 위험한 곳이란 거 알아요?”
태욱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욕망에 들끓던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단정하고 차가운 강태욱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서영은 태욱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 마음이 강해질수록 겁이 났다. 그 이후가 상상되지 않았다. 키스가 잠자리로 이어지고, 그녀의 몸에 그가 새겨져 버리면 다시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비겁한 사람은 태욱이 아닌 그녀일지도 몰랐다.
“……죄송해요.”
서영이 사과하자 태욱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고 그녀는 그를 내려다보는 꼴이 되었다.
“뭐가?”
“아…… 그냥. 이것저것이요.”
서영은 아직도 태욱과 눈을 똑바로 맞추는 게 어려웠다. 그게 못마땅하다는 것처럼 태욱이 그녀의 뺨을 감싸 얼굴을 고정시키고 그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하여튼, 밀당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가 부풀어 오른 서영의 입술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밀당을 아주 잘하는 것 같단 말이지.”
“누가요?”
서영이 모른 척하자 태욱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서영도 자신이 얌체 같아서 웃어 버렸다. 그 순간 쪽, 하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와 닿았다 떨어졌다.
“시키는 대로 할게. 원하는 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거니까.”
태욱이 다정히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난 항상 대기 중입니다.”
말을 마친 그가 몸을 일으켰다. 서영도 그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제라도 가지 말라고 말할까. 소원을 하나 더 써 버릴까. 그러고 나면 이 아쉬움이 가실까. 쏟아 낼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오늘 고생했어요. 쉬어요.”
그가 짧게 끝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한순간에 집 안이 조용해졌다.
서영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갑자기 사라진 태욱의 빈자리를 느껴야만 했다. 고작 몇 시간이었는데. 웃으며 밥을 먹고 키스를 나눴을 뿐인데. 가슴속에서 찌르르 통증이 일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늦은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울 때까지 그녀는 절대 베란다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갔겠지. 아니, 갔어도 벌써 갔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곧장 베란다로 달려가 태욱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었지만 서영은 참아 냈다. 오늘은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루가 이리도 길 수 있을까. 지유린을 만난 게 아주 오래된 일인 것처럼 힘들었던 기억 따윈 모두 잊어버리고 태욱과 함께한 시간만 가슴에 남아 있었다.
서영은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 몸을 일으켰다. 불 꺼진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초여름의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서영은 이미 여름을 맞이한 벚꽃나무를 바라봤다. 꽃잎을 날려 대며 화려한 잔치를 벌였던 날들을 잊은 것만 같았다. 그래. 이렇게 모두 맞는 때가 있고, 철이 있는 법이지. 서영이 조용히 마음을 다독이고 돌아서려 하는 순간이었다. 베란다 난간에 붙어 있는 무언가가 시선에 걸렸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작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벚꽃 보는 만큼 나도 좀 봐 주길.
쿵. 심장이 아래로 떨어질 듯 쿵쾅댔다. 분명히 그녀가 아는 글씨체였다. 언제 이걸 붙여 놓은 거지. 얼른 종이를 떼어 낸 서영은 핸드폰을 찾았다. 태욱에게 전화를 걸자 곧장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응. 나예요.
그가 다정하게 전화를 받았다.
“……이거, 언제 붙여 두신 거예요?”
서영이 무엇을 묻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듯 그가 작게 웃었다.
― 집주인이 겁도 없이 자고 있을 때? 거기가 윤서영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같아서 내 흔적을 남기고 싶기도 했고. 어때요? 점수 좀 땄습니까?
이렇게 심장을 자주 간질거리게 만드는 남자인 줄은 몰랐다. 서영은 자신에게 이러는 태욱의 마음이 궁금해져 버렸다. 그와는 상관없이 그녀만의 추억을 쌓을 생각이었지만 이젠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그녀의 진지한 질문에 태욱이 웃음을 터뜨렸다.
― 몰라. 언제 베란다로 나오나,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놈한테 뭘 물어?
“네?”
서영은 놀라서 얼른 베란다 밖을 내려다봤다. 정말이었다. 태욱이 아직도 거기에 서 있었다. 현관을 나서고 벌써 한 시간도 더 지났는데. 서영은 끝내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가야지, 그랬는데…… 발이 안 떨어지네. 아쉬워서 그런가.
“…….”
서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내가 이러는 거…… 우습고 뻔뻔해 보인다는 거 알아요. 내가 생각해도 얄미운걸, 뭐. 훈재나 이 대리가 알면 날 죽이려고 들겠지. 사람 마음 가지고 이용해 먹으면서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놈이라고.
“…….”
― 왜 이런 놈한테 걸렸어? 왜 그렇게 착해서는…….
태욱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서영은 그저 핸드폰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아래에 서 있는 그가 보였고, 귓가에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순서조차 헷갈려 서로를 애태우는 일밖에 할 수 없는가.
― 이제, 진짜 갑니다. 쉬어요.
아슬아슬하게 당겨진 줄을 먼저 놓은 건 태욱이었다.
“팀장님.”
그걸 다시 붙잡게 만든 건 서영이었다.
“팀장님, 제가 좋으세요?”
쿵쿵쿵. 심장이 또다시 터질 것 같았지만 서영은 물어야 했다. 이 모든 걸 설명하는 명제가 존재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헷갈리기 싫었다.
― 솔직히 말하면……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몰라요, 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던 서영의 마음이 어쩔 수 없이 가라앉아 버렸다.
― 그냥 자꾸 어떤 여자가 생각나. 그 여자랑 있으면 자주 웃어요. 원룸 5층에 살아서 만나려면 다리 힘이 필요한데 삼겹살에 비빔면만 먹게 해 주면 다 용서될 것 같기도 하고.
서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지금 그 여자가 날 내려다봐요.
“…….”
― 계속 나만 봤으면 좋겠어.
“…….”
― 그게 좋아하는 거면…….
“…….”
―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