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가 왜 이러는지 (4)
당연하게, 그리고 뻔뻔하게도 태욱은 서영에게 차 한 잔을 요구했다. 그는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대전에서 달려와 이제껏 마음을 바짝바짝 태우며 서영을 기다렸다.
그 시간들 동안 수많은 감정들이 그의 가슴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장 확실한 건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른 감정들은 이해도 계산도 되지 않았지만 이 마음만은 틀림없이 알 수 있었다.
“저녁을 못 먹었거든요. 그래서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재료들 좀 샀어요.”
서영은 태욱보다 앞서 5층에 도착한 후 익숙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고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려다 뒤늦게 생각난 듯 거실 불부터 켰다.
환해진 집 안으로 태욱이 들어서는 걸 본 후에야 그녀는 부엌으로 향했다. 음식 재료가 담긴 장바구니를 식탁 위에 올려 두며 태욱에게 끓여 줄 차의 물을 올렸다. 그러곤 장바구니 안에 들어 있는 재료들을 꺼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 팀장님은 저녁 드셨어요?”
지금 상황에서 밥까지 내놓으라는 건 염치없는 짓이란 걸 알았지만, 태욱은 배가 고팠다. 음식 재료들을 보자 눈치 빠른 배 속이 꼬르륵 소리를 내 버렸다. 그걸 또 서영이 듣고 말았으니 그는 핑계를 댈 수 없었다.
“저랑 같이 먹어요. 일부러 좀 많이 샀거든요.”
그녀가 꺼낸 재료들에 시선을 주며 태욱도 식탁에 앉았다.
“이게…… 간단히 먹는 거군요?”
삼겹살이 두둑하게 담긴 봉투를 본 그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서영은 그가 웃자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녀는 남들보다 잘 먹는 편이었다. 그에 비해서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라 다행이었지만 지선도 그녀와 밥을 먹다가 한 번씩 놀라곤 했다. 그 모습을 태욱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영원히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는 것 같았다. 서영은 포기하듯 태욱을 따라 웃어 버렸다.
“스트레스 쌓였을 땐 잘 먹는 게 최고란 말이에요. 이 삼겹살 노릇하게 구워서 비빔면이랑 같이 먹으면…… 오늘 있었던 일 다 잊고 꿀잠 자게 될걸요?”
이렇게 말을 예쁘게, 귀엽게 하는 여자였나. 태욱은 또 한 번 서영에게 반한 것처럼 그저 멍하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하고 나니 더 배가 고프다며 서영은 어디서 신문지를 가져와 소파 밑에 깔았다. 그러곤 그 위에 버너를 가져다 놓은 뒤 태욱을 바라봤다.
“굽는 건 팀장님께 부탁드려도 되죠? 닭발집에서 보니까 저보다 더 잘하시던데.”
저녁을 얻어먹으려면 밥값을 하라는 듯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태욱은 졸지에 삼겹살을 굽게 되었지만 오늘만은 서영이 하자는 대로 따라 주고 싶었다.
알겠다고 답한 그는 답답했던 재킷부터 벗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소매를 접어 올리고는 버너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에게 삼겹살 봉투와 집게, 접시를 가져다준 서영은 잠깐 태욱을 살피더니 흔들리는 그의 넥타이를 불안한 듯 바라봤다.
“혹시 버너 쪽에 닿을지도 모르잖아요. 이 집, 불나면 큰일 나요.”
그녀는 넥타이를 돌돌 말아 그의 와이셔츠 주머니에 꼼꼼하게 넣어 주었다. 단순한 행동일 뿐이었으나 태욱은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고 말았다. 눈앞까지 다가온 서영의 얼굴과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이 잠재웠던 무언가를 또다시 일깨우는 것 같기도 했다.
일방적으로 키스까지 퍼부어 놓고선 넥타이 하나에 이리도 흔들리다니. 태욱은 그런 스스로가 낯설 정도였다. 그래서 서영을 자꾸만 괴롭히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태욱이 일어서려는 그녀를 붙잡아 다시 앉혔다.
“넥타이 타면 나도 타 버리는데. 이 집이 나보다 더 중요한가?”
서운함이 가득한 그의 되물음에 서영은 또 미안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넥타이가 타면 태욱도 다칠 텐데. 그걸 가장 원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었다.
“일단 삼겹살부터 안 타게 해 주세요.”
당신이 다치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하려 했지만, 결국은 부끄러운 마음 때문에 가벼운 농담으로 변질되어 튀어나와 버렸다.
서영의 작은 경고에 태욱은 본전조차 찾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도망치듯 부엌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데 이상하게 가슴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를 추억한다는 것 자체가 그의 갈망에서 비롯된 망상일지도 모르나, 그는 이 장면이 분명 존재했다고 믿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였고, 아버지는 그의 옆에서 맛있는 고기를 호호 불어 가며 입에 넣어 주었던 완전한 순간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순간이란 걸 알고 나서는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워 지워 버린 아프고 행복했던 단상. 그게 지금 떠오를 줄은 몰랐다.
“비빔면 두 개 하면 적으려나. 팀장님 많이 드실 거예요?”
찬장에서 라면을 꺼내던 서영이 뒤돌아서 태욱에게 물었다.
“응. 아주 많이.”
그가 대답하자 서영도 원하던 바였다며 라면 세 개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팀장님 그거 아세요? 비빔면의 비밀이요. 이게, 그냥 라면은 하나만 먹어도 배부르거든요. 근데 비빔면은 꼭 모자라요. 그래서 제가 함량까지 체크해 봤는데 똑같더라니까요. 라면은 국물이 있어서 그런가. 정말 미스터리하지 않아요? 서영은 별것 아닌 것에 심각해졌고, 또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그와 처음 마주 앉았을 땐 지퍼를 채운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더니. 그만큼 태욱이 편해진 것일 테다. 그녀는 어느새 뚝딱 맛있게 비빈 비빔면을 맛보여 준다고 그의 앞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태욱은 놀려 주겠다 생각하며 집게 든 손을 흔들었다. 넣어 달라 입을 벌리자 그녀는 스스럼없이 면을 한 움큼 집어 넣어 그의 볼을 터지도록 만들어 버렸다. 복수입니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가슴이 간지러울 수밖에. 씹어 삼킨 비빔면은 또 너무너무 맛있어 눈물이 핑, 돌 뻔했다.
훈재 녀석이 알면 일주일 내내 허리를 꺾으며 웃을 일이었다. 비빔면을 먹다가 울다니. 천하의 강태욱이 여자 때문에 눈물을 보이다니. 언제부터 눈물이 말랐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이란 게 그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란 것에도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어? 팀장님, 눈에…….”
서영이 태욱을 바라봤다.
“고추 넣었습니까?”
그는 뻔뻔하게 모른 척했다.
“진짜 조금인데. 매운 거 못 드시는구나. 어, 아닌데. 닭발 엄청 잘 드신 것 같은데. 팀장님…… 으앗, 잠, 우웁.”
태욱이 서영의 입 속에 구운 삼겹살을 집어 넣어 버렸다.
“맛이 기가 막히지?”
“드거어요.”
서영이 그를 노려보자 태욱은 또 웃음이 터졌다. 뜨거움에 서영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울 정도로 그렇게 맛있나?”
그가 서영의 눈가를 자신의 손으로 훔쳐 주었다. 그리고 손을 내려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이게 무슨 고기 굽다가 벌어질 분위기인가. 서영이 얼굴을 빼내려 하자 그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가 뭘 할지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두 손으로 급하게 자신의 입을 막았다.
“고기 냄새 난단 말이에요.”
“난 비빔면 먹었거든.”
푸핫.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배가 터져 버릴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녀와 함께 비빔면 세 개에 한 근이 넘는 삼겹살까지 해치운 태욱은 재빨리 뒷정리를 마쳤다. 서영이 준 새 칫솔로 그녀와 나란히 욕실에 서서 양치까지 마친 후 퍼지듯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도 식사량이 적은 편은 아니었는데 서영도 다른 여자들보다는 많이 먹는 게 확실했다. 처음 식사 자리에선 밥을 반 공기도 못 비우던 게 생각나자 태욱은 또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영은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고기 냄새를 없앨 캔들을 켜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태욱은 또 졸음이 몰려왔다. 분명 이 집 안에 사람의 기운을 빼내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 확실했다. 아니면 이토록 쉽게 잠이 몰려올 수 있단 말인가.
어릴 적부터 잠을 잘 자지 못하는 태욱 때문에 어머니 정애가 안 다녀 본 병원이 없었다. 하지만 양방과 한방 모두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엔 이렇게 살 운명인가 보다 생각하며 체념했다. 죽으면 평생 잘 잠인데. 잠이 없으면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으니 좋은 게 아니겠냐며 태욱은 어머니를 다독였다.
“팀장님……?”
목소리만 들리는 걸 보니 또 눈을 감아 버린 것 같았다.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되는데…….”
휘휘, 눈앞에서 작은 손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느껴졌다. 태욱은 눈을 감은 채로 그 손을 잡아채 버렸다. 서영은 무방비 상태에서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게 됐다.
“팀장님.”
서영은 태욱이 깼다고 생각해 얼굴을 바라봤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감긴 채였다. 눈도 못 뜰 정도로 피곤한가. 서영의 가슴은 또 사르르, 먹먹해지고 말았다. 잠 안 자기로 유명한 독종 팀장이 그녀의 집에만 오면 잠이 들었다. 이 순간만이라도 그를 쉬게 해 주고픈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렇게 손이 꽉 붙잡힌 채론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태욱을 그저 바라보는 것 말고는.
“조금만…….”
“…….”
“조금만, 이렇게 있어 줘요…….”
잠에 취한 그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그럼 손은 좀 놔 주세요. 그 말이 입 끝까지 차올랐지만 서영은 포기해 버렸다. 오늘 속상했던 마음을 이렇게 보상받는 것이다. 그녀는 아예 태욱의 얼굴이 잘 보이게 돌아앉았다. 그는 한동안 감은 눈을 뜨지 않을 테니 들킬 걱정도 없었다. 서영은 잠자코 태욱의 이목구비를 차근차근 감상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의 얼굴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게 될 만큼 완벽했다. 분위기 있게 자리 잡은 눈매와 깎아 놓은 듯 쭉 뻗은 코, 도톰하고 날렵하게 올라선 입술. 늘 길게 다물어진 채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입가가 한 번씩 올라갈 때면 가슴이 설레는 게 당연했다.
태욱이 잘 웃는 남자라는 걸 어느 누가 알까. 서영은 자신이 그 사실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만족했다. 유린을 만난 후, 복잡하던 생각이 오히려 간단하고 명확해졌다. 그가 유신의 손자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도 우스웠다. 어차피 그녀와 그의 관계는 연극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얻을 것만 생각하면 됐다. 지금 이 모든 게 환상이라면 그녀는 아주 달콤한 꿈을 꾸고 싶었다. 서영은 슬그머니 태욱의 쪽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쪽.
서영의 입술이 짧게 태욱의 입술에 닿았다. 그걸 기다린 것처럼 그의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섰다. 태욱이 서영의 손을 잡은 채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깊이 맞물린 입술은 금세 진한 키스가 되고, 그녀의 몸은 태욱의 상체 위에 안긴 꼴이 되었다. 심장이 뛰었고, 몸이 뜨거워졌다. 태욱은 어느새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