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24화 (24/75)
  • 9. 내가 왜 이러는지 (3)

    서영과 유린이 만난다는 사실을 훈재가 알게 되고, 태욱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사연은 이러했다. 아무래도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서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한 지선은 다시 그녀의 책상으로 다가갔고, 수첩에 적혀 있는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지유린. 어쩐지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떠오를 것 같았는데 그때 남편 훈재에게 전화가 걸려 왔고 지선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라 여기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주말에 다툰 게 마음에 쓰였는지 꽃까지 들고 서 있는 남편을 보고 지선은 언제 화가 났냐는 듯 마음이 풀렸다.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훈재에게 다가서려던 그때였다.

    “생각났어!”

    “뭐가?”

    “지유린이 누군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훈재는 표정이 굳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태욱과 결혼할 뻔한 여자. 유신건설과 여러 가지 사업으로 얽혀 있는 건양물산의 막내딸이었다. 그 여자의 이름이 자신의 와이프 입에서 흘러나오자 그는 의아했다.

    “무슨 플라워 페스티벌인가. 거기서 대표랍시고 꽃 들고 서 있는 사진을 내가 쫙쫙 찢었지. 그 여자일 줄이야…….”

    그다음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 지선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큰일 났어, 여보!”

    지선은 훈재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지유린이 누군지 알아 버린 게 그렇게 큰일 날 일인가. 그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곧장 상황을 설명하는 아내의 말을 듣고 나자 그조차도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더군다나 태욱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전으로 내려가 신사업 부지를 돌아보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사실을 알려야만 할 것 같았다. 파혼하는 것으로 제대로 정리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가. 그 여자와 서영이 만나서 할 얘기란 게 무엇일지는 뻔했다.

    그도 여기저기서 얻어들은 게 있어 지유린이 어떤 여자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재벌 집 막내딸들 중에서도 소문이 나쁘기로 유명했다. 소문이 그저 소문이 아니란 걸 그는 확실히 알았다. 친한 연수원 동기 중 재벌가 자제들의 사건 사고를 처리하는 일로 골치 아파하던 녀석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입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게 그 여자였다.

    그렇게 온전치 못한 사람을 태욱의 짝으로 갖다 붙인 손 회장의 의중은 알 길이 없었지만, 녀석의 가정사를 모르지 않는 그로선 핏줄이 더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여자의 뻔뻔한 사생활이 들통나 태욱이 파혼했을 땐, 누구보다 그가 제일 기뻐했다. 일을 위해서, 유신을 가지기 위해서, 태욱이 지유린과 결혼식장에 들어갔다면 그는 더 이상 태욱의 친구로 옆에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녀석에게 구세주가 등장했다. 능구렁이 강태욱의 말을 들으면 거짓말 같으면서도 표정에서는 감출 수 없는 진심이 드러났다. 사랑이라는 게, 감정이란 것이 그랬다. 나도 모르게. 세상없을 영업 팀 싸가지 대리가 평생 그의 옆자리를 지킬 동반자가 된 순간부터 훈재는 인생에 운명이라는 게 있다는 걸 믿게 되었다.

    “이 자식아……. 전화 좀 받아라!”

    훈재는 입술을 깨물며 연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건 지선도 마찬가지였다. 서영이 말렸어도 그녀가 따라갔어야 할 자리였다.

    훈재에게 태욱의 파혼 사유를 전해 듣던 날 그녀는 팬클럽 회원들을 모두 소집할 뻔했다. 어떻게 강태욱과 결혼 약속을 하고도 그런 짓을.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것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뒤흔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으나, 그랬다가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란 남편의 차갑고 이성적인 저지에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깨갱 하며 조용히 울분을 다스렸다.

    “우리 윤 대리 눈에 눈물 나게 하면 강태욱이라도 가만 안 둬!”

    지선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훈재의 핸드폰에서 태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머리는 차갑게 식어 갔지만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화가 날 때 태욱은 늘 반대였다. 심장은 죽은 것처럼 가라앉았고, 머리는 그 이유를 향해 집요해졌다. 이겨야 했고, 해결해야 했고, 어느 누구에게도 약점을 보여선 안 되었다. 자신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 태욱은 서울의 초입에서 차를 세웠다. 차단했던 번호를 다시 해제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전화는 곧장 연결되었다.

    “더럽게 구는 게 취민가.”

    예의를 차릴 것도 없이 태욱이 일갈했다.

    ― 어떻게 알았어요? 내 취미, 훗.

    유린이 깜찍하게도 웃었다. 역겨움에 태욱의 미간이 뒤틀렸다.

    “이런다고 달라질 거 없다는 거, 그쪽이 더 잘 알지 않나?”

    그의 목소리가 더없이 싸늘하고 냉정해졌다. 어떤 방식으로 서영을 괴롭혔을지 뻔했다. 그게 너무 손쉽게 읽혔다. 구역질 나는 재벌 판에서 꼭 나쁜 것만 골라 배운 것처럼 그녀는 그의 예상에서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행동했다. 손 회장의 안목이 탁월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 그 언니 세상 착한 척은 다 하더니 벌써 당신한테 일러바쳤구나. 나 막 혼내 주래요? 나이도 어린 미친년이 돈인지, 몸인지, 뭘 팔았든 간에 봉투 하나 받고 조용히 꺼지라고 해서 무서웠다고 그랬나. 그러니까 왜 멍청하게 이 진흙탕에 끼어들어선.

    “…….”

    태욱은 한순간 온몸의 모든 피가 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 근데 골라도 꼭 그런 여자여야 했어요? 나 자존심 상하게. 상대가 되어야 싸우기라도 하죠. 당신 할아버지는 이 쇼에 대충 백기 들고 받아들일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벌써 너무 재미있어지려고 하잖아. 나를 개무시하고 전화까지 차단하던 남자가 알아서 먼저 목소리도 들려주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나랑 결혼 안 하려고 밑에서 일하는 여자들 중에 대충 한 명 골랐는데 벌써 빠졌어요? 당신, 그렇게 쉬운…….

    태욱은 더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속이 울렁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허허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돈 좀 가진 인간들은 모두 이 모양인가. 자신이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손 회장의 핏줄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더할 수 없는 더러운 짓을 서슴없이 벌이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고고한 존재처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어디서부터 박살을 내 줘야 할까. 태욱은 그 타이밍만 노리며 살아왔다. 정말 잘못 걸려든 것은 지유린이었다. 그를 이 정도로 적의에 가득 차도록 만드는 인물은 흔하지 않았다. 태욱은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표정을 지웠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속에 깊은 우물이 패었다.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였다.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올라오는 한 여자가 보였다. 태욱은 그제야 차체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으나 그가 기다린 사람은 아니었다. 서영의 전화는 전원이 꺼져 버린 상태였고, 그가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집 앞에서 마주치는 것뿐이었다.

    올려다본 원룸 건물의 5층에선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혹시 지난번처럼 불을 꺼 놓은 채 잠든 것은 아닐까 싶어 여러 차례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가 시끄럽게 서영의 이름을 부르자 아래층 사람이 참지 못하고 올라와 경고를 날렸다.

    그길로 계단을 내려와 차에 몸을 기댄 채 담배만 피워 댔다. 혹시 몰라 훈재에게 전화해 서영이 갈 만한 곳을 지선에게 물어봐 달라 했지만, 그녀도 이미 추측되는 곳엔 모두 전화를 돌렸다는 답이 돌아왔다. 감쪽같이 사라진 여자는 도대체 어디서 방황하고 있는 걸까.

    태욱은 다시 담배를 찾다가 빈 갑만 남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일그러뜨렸다. 유린이 쏟아 낸 말들이 귓가에 되풀이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 당하지 않았을 모욕이었다. 그를 짝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지스럽게 밀어붙인 계약 만남이었다.

    자신에게로 던져진 돈 봉투를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태욱은 마른세수를 하며 낮은 한숨을 뱉었다. 누구를 탓할 필요조차 없었다. 모두 그가 벌인 쇼로 인해 돌려받은 대가였다. 차라리 서영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기라도 했다면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 수 있었을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여자가 그를 더 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더 이상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할 수 없어 태욱은 차에 올라탔다. 그사이 지유린이 더한 짓을 벌였을 수도 있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천천히 언덕을 걸어 올라오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태욱에게서 안도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앞에 서영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한 마음이었다. 급하게 차 문을 열고 내린 태욱은 그 자리에 굳어 버린 채 서 있어야만 했다.

    서영의 손에는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태욱은 허무한 동시에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이 와중에 장을 본 건가. 어제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자 그는 혼란스러웠다.

    “윤서영.”

    좀 더 다가선 태욱의 부름에 그제야 서영이 고개를 들었다.

    “어? 팀장님…….”

    태욱이 여기에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제야 가방 안의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녀가 흐릿하게 웃었다. 태욱은 신기했다.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왜 그 모든 걸 웃음으로 넘기려 하는지.

    “죄송해요. 핸드폰 꺼진 줄 몰랐어요.”

    그녀는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태욱은 대답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상황을 이해한 서영이 태욱의 앞으로 다가와 뒤늦은 보고를 했다.

    “지유린 씨……, 만났어요.”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민망하다며 웃었다.

    “이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진 것 같아요.”

    마치 경쟁 PT에서 미끄러져 아쉬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태욱은 그녀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웃는 서영을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와락 끌어안았다. 영문을 몰라 서영이 그의 품 안에서 푸덕거렸다.

    “묻지 말아요.”

    “……팀장님.”

    “내가 왜 이러는지.”

    “…….”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녀를 안고 나서야 태욱은 편안해질 수 있었다. 잠시나마 죄책감에서 벗어났다. 이것 또한 그의 이기심이겠지. 서영이 그에게서 벗어나려 움직이는 순간에도 그는 그녀의 따뜻한 품을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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