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가 왜 이러는지 (2)
지유린과 통화를 마친 서영은 태욱에게 상황을 전할 생각으로 핸드폰을 들었지만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대전까지 내려가 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유린에 대해서 말한들, 지금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어차피 그 여자를 떼어 내기 위해서 서영이 애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니 한 번쯤은 만나는 게 맞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목소리만 들었음에도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걸 눈치챘지만 어째선지 피하고 싶진 않았다. 지선에게는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는 말로 둘러대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기 직전의 용사처럼 보이는 서영의 표정에 지선이 괜찮냐고 묻기도 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걱정 말라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 지유린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 호텔 라운지 괜찮아요? 내가 거기 게 아니면 잘 못 마셔서.
기선 제압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커피 한 잔에 하루 밥값을 지불하는 곳으로 기어이 불러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영의 전화번호까지 알아냈다면 그녀가 어떤 위치의 사람인지는 이미 파악하고도 남았겠지.
서영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로비에 들어섰다. 오늘따라 편안한 청바지 차림인 게 왠지 거슬렸지만 일부러 차려입는 건 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욱이 그녀를 연극 상대로 지목한 이유가 이런 평범함 때문이란 걸 알았다. 그러니 더 꾸밈없이 자신을 보여 주는 게 태욱의 파혼녀에게 그녀가 취해야 할 행동이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라운지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매니저가 그녀를 반겼다. 서영은 지유린의 얼굴을 알았기에 매니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괜찮다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곧 매니저는 웃는 얼굴로 서영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 라운지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서요. 찾으시는 분이 계셔야만 입장하실 수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현했지만 그건 완곡한 무시에 가까웠다. 얼굴이 뜨거워진 서영이 찾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가 날아왔다.
“내 일행이에요.”
서영은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그녀가 기사를 통해 보았던 여자가 맞았다. 아니,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더 도도하게 빛이 난다고 느껴졌다. 여자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휘감고 있는 부의 아우라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매니저는 곧 머리가 바닥에 닿을 듯 여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좀 전까지 그녀를 대하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서영은 기분이 나쁘기보단 씁쓸했다. 그녀가 이 매니저의 자리에 있은들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돈이 권력이 된 순간부터 세상은 언제나 갑이 원하는 대로 돌아갔다. 그걸 서영도 사회생활 하며 깨닫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순응하기도 했다.
“앞으론 조심해 줘요.”
고개 숙인 매니저에게 유린은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한마디를 더 했다. 그러고는 서영에게 시선을 맞춘 후 창가 쪽을 가리켰다.
“우린 좀 앉을까요?”
유린은 서영보다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빛나는 힐이 라운지 바닥을 디딜 때마다 박자를 맞추듯 또각또각,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 발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여유였다. 서영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는 약속을 잡고, 그녀보다 뒤늦게 나타나 이곳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매니저를 훈계하고, 본인이 원하는 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이 모든 게 스물여섯 여자가 한 행동이었다.
서영은 그녀를 뒤따르며 잠시 웃어 버렸다. 재벌 집 막내딸이라고 했던가. 세상에 무서운 게 있을까 싶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나요?”
서영이 자리에 앉자 유린이 물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무례하다고 따질 성격도 아니었기에 서영은 으레 남들에게 하듯 웃어 주었다.
“그래요, 뭐. 강태욱이 고른 사람이니 뭔가 다르긴 하겠죠.”
유린의 입에서 흘러나온 태욱의 이름이 낯설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남자의 이름을 당연한 것처럼 함부로 입에 올렸다.
서영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불러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왜 태욱이 이 여자와 결혼하지 않으려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어른 대접을 바라는 꼰대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었다. 서영이 그와 업무를 함께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점이었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뭐죠?”
서영 역시 이런 여자에게 더 이상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뭘 것 같아요?”
입꼬리를 올린 유린이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뭐든…… 제가 할 말은 없습니다.”
“얼마 받고 하는 거예요?”
다짜고짜 날아온 질문은 그녀의 미모와는 다르게 저급했다.
“…….”
“아니면 몸인가. 그 남자가 몇 번 자 줄 테니 애인 행세 해 달라고 했어요?”
서영은 휩쓸리지 않기 위해 테이블 아래에서 두 손을 움켜잡았지만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수치심으로 하얗게 변해 가는 그녀의 얼굴을 재미난 구경거리처럼 바라보던 유린은 명품 가방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거, 그쪽이 상상도 못 할 액수의 돈이에요. 나도 남자 때문에 빡쳐서 돈 쓰는 건 처음이니까, 재미있는 경험 했다고 칠게요.”
유린이 테이블 위에 봉투를 올리고 서영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거 받고, 조용히 꺼져 줘요.”
서영은 유린의 무례함에 오히려 더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상상도 못 할 돈이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돈 봉투를 내려다보던 서영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돈 때문에 그 사람 만나고 있진 않아요. 그리고…… 우리가 몸을 섞든 말든 그쪽한테 말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차분하고 정확한 시선이 유린에게 꽂혔다.
하. 하하. 유린의 입에선 어이없는 웃음이 끊기듯 이어지며 터져 나왔다. 생긴 것답지 않게 담력이 강한 편인 건가. 아니면 강태욱을 등에 업어 겁을 상실하고 시건방을 떠는 것인가. 유린은 서영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자신에게 대적할 여자를 데려올 것이었다면 조건이 어느 정도는 맞아야 할 것 아닌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으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무색무취의 타입이었다. 평범하다 못해 내세울 것이 단 한 하나도 보이지 않는 평균 이하였다. 유린은 이런 여자들의 습성을 너무나 잘 알았다. 가장 약한 지점이 무엇인지까지도.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퇴직했고, 어머니는 어린이집 원장. 장녀로 태어났고,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어릴 때 사고로 죽었음. 그것 때문에 일찍 철이 들었는지 부모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항상 품행 바르게 살았고. 그리고 이성 교제 경험은 전혀 없다는데, 맞나요?”
유린이 방금 전 보고받은 내용을 나열하듯 읊자, 눈빛이 흔들리던 서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쉬워. 그래서 재미가 없을 정도였다. 고작 이런 여자를 옆에 끼고서 건양의 딸을 무시한 채 전화까지 차단시킨 건가.
유린은 어느새 매니저가 가져다 놓은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한 번에 마셨다. 쓰고 깊은 맛이 언제나 그녀의 심장을 떨리게 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만든 남자가 강태욱이었다. 그녀를 거부하며 가져다 붙인 핑계가 색달라서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그래서 앞으로 이 여자를 사랑하겠다는 것인가. 그러기엔 그가 가진 배경과 욕망이 너무나도 크고 높았다. 괜한 시간 낭비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 주려면 앞의 여자를 괴롭히는 수밖에 없었다.
“재벌들 결혼이라는 게 이래요. 한없이 더럽고 구려요. 근데 나나 강태욱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을걸요. 당신이 아직 모를 뿐이지. 그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
“…….”
무표정의 서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내 언니 같아서 충고하는 거예요. 더 진창으로 빠지기 전에 그만두고 빠져요.”
서영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유린은 그녀가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조연이잖아요, 그쪽.”
유린은 마지막 한 방을 날리고 돈 봉투를 챙겨 일어났다. 처음부터 이 여자가 돈을 받아 갈 것이란 계산은 하지 않았다. 그런 여자였다면 강태욱이 옆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돈’이란 것의 생리를 잘 알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 왔으니 그 부분에서만큼은 통하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유린이 또다시 자신만의 구두 소리를 내며 여유롭게 라운지를 벗어났다. 서영은 그녀가 사라진 이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창밖만 바라봤다. 서울 하늘엔 어느새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 ◇ ●
텅 빈 부지 앞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태욱은 자신이 이런 쪽으론 운을 타고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사업 문제만큼은 그랬다.
모두가 포기하고 돌아선 일도 그가 나서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행운이 찾아들고 명쾌하게 해결점이 나왔다. 건설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게 완성되지 않은 집에선 어느 누구도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포기하면 결국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사업은 과정보다 결과였고, 그 완성품을 가장 그럴싸하게 선보이는 자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마련이었다. 태욱은 눈을 감고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세워질 프라이빗 타운 하우스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가 일을 하면서 가장 짜릿하게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을 꼭 방해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이 존재했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들자 익숙한 이름이 찍혀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덧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무슨 용건이든 일과는 관련이 없을 거라고 100프로 확신했다.
태욱은 훈재의 전화를 거절하고 통화 목록에서 다른 이름을 찾았다. 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대전에서 출발한다면 잠시 얼굴 정도 볼 시간밖에 안 되겠지만, 그럼에도 그래야만 오늘 하루가 제대로 마무리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통화음이 이어졌지만 서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제의 뜨거운 키스가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태욱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부지를 좀 더 돌아봤다. 잠시 후, 주머니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 박훈재였다. 태욱은 그렇게 원하니 화풀이나 할 생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 인마, 왜 전화를 자꾸 씹어!
“업무 용건 아니면 끊는다.”
또 이 녀석은 무슨 죄인가 싶어 태욱은 맘을 한 번 접었다.
― 윤 대리가 지유린 만나러 간 거 같다는데, 너 알고 있어?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 내려던 순간이었다. 태욱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둘의 이름이 한 문장에 같이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누가…… 누굴, 만나?”
말을 하면서도 태욱의 발은 이미 자신의 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운전석에 올라 급하게 액셀을 밟으며 욕을 뇌까렸지만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세게 핸들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