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22화 (22/75)
  • 9. 내가 왜 이러는지 (1)

    “진짜야?”

    태욱과 훈재는 늦은 점심을 먹으며 남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법무 팀 선에서 해결이 가능한 문제들은 훈재에게 맡겼고 태욱은 자신이 꼭 확인해야 할 것부터 체크하며 밥을 먹었다. 그러니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 없었다. 씹는 둥 마는 둥 하며 밀린 서류들에 눈을 박은 채 집중하고 있는데 맞은편의 훈재가 불쑥 앞도 뒤도 없는 말을 물었다.

    고개를 들어 친구를 바라본 태욱은 곧 무슨 뜻인지 눈치챘다. 그 덕에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물잔을 들었다. 훈재는 태욱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긴장하며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걸 저 녀석이 왜 그렇게 궁금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짜 같아 보여?”

    태욱이 오히려 되물었다.

    그럼 그렇지. 한 번 만에 대답할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훈재는 주말 동안 와이프 지선과 함께 머리를 굴려 추리한 내용들을 꺼내 놓았다.

    “너야 능구렁이 백 단인데 그럴 수 있지. 근데 윤 대리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서 우리도 좀 헷갈려. 진짠지 가짠지.”

    “윤서영이 거짓말 못한다고 누가 그래?”

    태욱은 다시 한번 그녀의 깜찍한 행동을 떠올렸다. 어수룩한 말투와 착해 보이는 눈이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어 더 뒤흔든다는 걸 아무도 모를 것이다. 상처를 치료해 주겠다고 불러 놓고는 눈조차 맞추지 못했다. 그를 바라보게 만들고 싶도록.

    왜 좋은지 물어도 겉도는 말뿐이었다. 당신이 알아서 뭘 하느냐고. 안다고 달라질 게 있느냐고. 모든 걸 체념한 듯 가라앉은 눈가가 그의 죄책감을 들쑤시고, 급기야 그녀에게 벌을 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도록 만들었다.

    겁 없이,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가져다 대는 행동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몰캉한 입술을 물고 도망치는 혀를 붙잡아 거칠게 빨아 대면 반성하지 않을까 하고. 그 달콤한 얽힘이 결국엔 그의 발등을 찍는 행동인 줄도 모르고. 아랫도리가 단단하게 일어서며 뱃속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명백한 욕망이었다. 서영이 막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도 그때는 다음을 알 수 없었다. 태욱은 어떻게 오피스텔로 되돌아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날을 떠올리며 작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남녀 사이 문제야 당사자만이 아는 거지만.”

    훈재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마누라가 윤 대리 갖고 노는 거면 네 용안이 온전치 못할 거래.”

    “뭐?”

    하하. 태욱에게서 어이없는 실소가 터졌다. 그래도 나름 왕들에게나 붙이는 ‘용안’이라는 말을 쓰며 그의 얼굴을 높여 이른 것에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 건지. 태욱은 자신과 서영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피던 지선이 불쑥 떠올랐다.

    “너는, 그걸 바라는 눈빛인데?”

    훈재는 들켰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이지선이 얼마나 독종인지 너도 잘 알 거야. 우리 결혼 발표하고 본인 책상이 테러당했을 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 사람들 다 잡아다가 똑같이 복수한 여자야. 피 묻은 면도날도 있었는데, 그게 사실은 토마토케첩이고 어디 회사 제품인지까지 알아냈을 땐 나…… 조금 무서웠다.”

    “지금은 안 무섭다는 걸로 들리네.”

    “야.”

    가볍게 웃은 태욱은 자료를 정리해 일어났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을 여유도 토마토케첩의 브랜드까지 알아내는 사람들에게나 있는 것이었다. 오늘도 지방 출장이 두 건이었다. 부지 시찰까지 겹치면 밤이 되어서야 겨우 서울에 도착할 것이다. 지금부터 서둘러야 한다는 소리였다.

    “간다. 넌 천천히 먹고 와라.”

    “인마, 그래서 오늘이 며칠짼데? 어? 설마, 진도부터 뽑은 건 아니지? 야!”

    뒤에서 들려오는 훈재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태욱은 고급 한정식집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 시간을 확인한 뒤 재킷 안에 숨어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일에 관한 연락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한 여자에게서 와 있을지도 모를 흔적을 찾았지만 깨끗했다.

    “후…….”

    이런 여잔데 갖고 노는 게 가당키나 하겠나. 태욱은 점심을 먹었느냐는 문자를 썼다가 그대로 지워 버렸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서영 쪽이었다. 왜 그렇게 입을 맞췄는지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출근을 하고,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 부서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서지훈 차장과도 여전히 다정한 모습으로 차를 마시고 업무 이야기를 나눴다.

    도리어 변한 건 태욱이었다. 집무실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열 번을 바라보면 한 번 정도 눈이 마주칠까. 아홉 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게 못마땅할 일인가. 태욱은 더 이상 사무실에 앉아 있기가 싫어 훈재에게 연락해 점심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곧장 외근 현장으로 가면 오늘 하루는 그녀와 마주치지 못할 것이다. 더 티를 내고 가까이 다가가야 소문이 퍼지고 손 회장의 복장이 터질 텐데. 그러려고 이 일을 꾸몄는데, 우습게도 그는 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태욱은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핸드폰을 던지듯 옆자리에 놓았다. 그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동이 울렸고, 그는 다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지유린]

    화면에 떠 있는 세 글자가 그를 더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린 그는 통화 목록으로 들어가 그녀의 번호를 차단했다. 다시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제발 눈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끈질긴 사람이 싫다던 서영의 말을 떠올렸다. 또다시 웃음이 나오려는 걸 막으며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었다. 어마어마한 주행 시간을 보고도 그는 동요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벚꽃이 날리던 계절이 언제였냐는 듯 열린 창으로 뜨거운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 ◇ ●

    잠깐 숨을 돌리자 어느새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서영은 오늘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러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날이었다. 그 원인이 어젯밤 태욱이 밀어붙인 키스 때문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유신그룹의 숨겨진 손자라는 사실보다 그것이 더 서영을 뒤흔들 줄은 몰랐다. 출근길 지하철을 기다리면서도, 회사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도, 그녀는 자꾸만 멍하게 넋을 놓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일까. 몸은 살짝 나른하게 붕 떠 있었고, 마음은 싱숭생숭했으며, 동료들의 말이 한 귀로 들어왔다가 머리에 입력조차 되지 못하고 반대쪽 귀로 흘러 나가 버렸다. 아무 의미도 없는 웃음만 헤프게 쏟아 냈다.

    키스가 대체 뭐라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니. 서영은 마음을 다잡고 평소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태욱이 있는 집무실 쪽으로 시선을 옮기지 않기 위한 그녀 나름의 발악이었다.

    사실은, 무서웠다.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채 놓아주지 않던 태욱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는 것처럼 허기진 눈동자. 모든 걸 집어삼켜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고 설득하는 듯한 검은 눈 안엔 뜨거운 불꽃이 일었다.

    그만. 여기서 멈춰야 한다. 더 가서는 안 된다. 서영의 머릿속에서 빨간불이 켜졌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들은 확실했다. 그는 장난일 게 뻔했고, 그녀는 분명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었다. 제정신을 차리자. 휘말리지 말자.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점심시간 이후 태욱의 스케줄은 모두 외근이었다. 잠깐씩 핸드폰을 주시했지만 연락은 없었다. 그에겐 별일이 아닐 것이다. 가족을 속이기 위해 가짜 애인까지 만들어 뻔뻔하게 연극을 펼치는 사람인데.

    서영도 일부러 그의 행동을 되짚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모른 척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빨리 시간이 흘러갔으면. 스톱을 외칠 수 없다면,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두렵다면, 끝을 보고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오늘은 데이트 안 해?”

    언제 다가왔는지 지선이 서영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 바, 바쁘시잖아요.”

    서영이 일부러 더 과장되게 웃었다.

    태욱의 폭탄선언 이후 지선은 어째선지 서영에게 더 이상 두 사람의 사이를 캐묻지 않았다. 분명히 그녀의 유도심문 몇 번이면 이 계약 연애가 들통날 게 뻔한데 마치 일부러 두 사람의 비밀을 알고 싶지 않은 것처럼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그래. 오늘 대전 갔다며? 출장 많은 사람이라 이래저래 서로 고생이다.”

    거기에 간 줄은 몰랐다. 태욱이 그녀에게 자신의 일상을 보고하지 않으니 남들에게 전해 듣지 않으면 그의 스케줄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사귀는 사이라고 했는데 그런 것조차 모른다고 할 수 없어 그녀는 또 흐린 웃음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또 너무 자주 만나는 것도 비추.”

    지선이 뒷말을 이으려다 주변의 눈치를 보고는 서영의 귀에만 들리게 속삭였다.

    “사내 연애라는 게…… 그렇잖아. 맨날 지겹도록 얼굴 보는 사인데 데이트까지 매일 해 봐. 일찍 질려 버린다고. 그러니까 자기가 좀 튕겨. 그 얼굴로 골 부리면 어떤 표정인지 좀 보게. 크크크.”

    지선은 그게 얼마나 통쾌할지 벌써부터 신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서영은 그녀를 따라 웃으며 생각했다. 태욱에게 그럴 일이 있을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또 어찌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와 그녀는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까.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게 맞았다. 서영은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했다.

    “그냥 집에 갈 거면 간단하게 한잔할래?”

    지선이 제안했다. 서영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서영의 핸드폰이 울렸고, 지선은 당연히 태욱일 것이라 예상했는지 작은 야유를 보내왔다.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뛰기 시작한 서영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태욱이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실망한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어 서영은 급하게 말을 만들었다.

    “오픈 하우스 이벤트 담당자한테서 연락 오기로 했거든요.”

    그렇구나. 지선은 얼른 통화를 하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서영은 자리에 앉으며 작은 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벤트 회사 담당자에게 연락이 올 일이 있긴 했다. 얼른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습관적으로 메모할 수첩과 볼펜을 잡았다.

    “네. 윤서영입니다.”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윤서영…… 씨?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소개받은 담당자는 남자였기에 조금 의아했다.

    “네. 제가 윤서영입니다만. 누구시죠?”

    ― 지유린이라고 해요.

    서영은 잠시 숨이 멈췄다.

    ― 강태욱 팀장 약혼자.

    당당한 말투엔 파혼의 흔적 따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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