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21화 (21/75)

8. 연극인 게 확실한데 (3)

“그렇게 불쌍하다는 표정, 별로 안 좋아하는데.”

별채를 빠져나와 차에 오르고, 아무런 대화 없이 서영의 집 앞까지 도착했다. 태욱은 그녀가 한 번씩 자신을 돌아보며 어떤 얼굴을 하는지 눈치챘지만 앞만 보고 운전에 집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고, 그랬기에 손 회장 밑에서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지금은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든 집어 던지는 사람. 그런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 온 남자라는 걸 서영에게 들키는 순간, 그는 전혀 다른 감정에 휩싸였다. 처음부터 이런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본가에 데려온 것이지만 날아오는 물건들로부터 서영을 보호하며 그가 느낀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부끄럽다는 생각을 언제 해 봤던가. 유신이란 울타리로 들어서기 위해 손 회장의 방 문 앞에 무릎을 꿇고 비는 어머니의 모습을 훔쳐보았을 때였나. 전학 간 학교의 담임선생님이 왜 아버지와 성이 다르냐며 물었을 때였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원망하던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부모를 탓하는 것뿐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나.

그래서 태욱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 어떤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선 감정 없이 살아야 했고, 덕분에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손 회장이 던진 물건 따윈 두렵지 않았다. 얼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 테다. 하지만 서영이 그를 이리도 안타깝게 보는 건 어째선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통쾌하다고 웃어…… 드릴까요?”

서영의 한마디에 태욱이 웃어 버렸다. 그가 웃자 서영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어쨌든, 오늘 고마웠어요. 들어가서 쉬어요.”

그녀에게 오늘 하루가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지 그가 더 잘 알았다. 더 이상의 감정 노동은 시키고 싶지 않아 끝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서영이 내리지 않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더 할 말이 있어요?”

태욱이 물었다.

“안 바쁘시면…… 얼굴 상처, 치료하고 가세요. 밴드라도 붙이시는 게…….”

무슨 얘기인가 싶어 서영에게 눈을 맞춘 태욱이 그 뜻을 알고 작게 웃었다.

“살짝 스친 겁니다. 괜찮아요.”

태욱은 자연스럽게 거절했다. 서영도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정말로 그를 동정이라도 하는 걸까. 그의 불행이, 직접 본 손필성의 모습이 그녀의 감정을 복잡하게 얽혀 들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의 상처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서영이 인사를 건네고 차에서 내렸다. 큰일을 치른 건 맞는지 그제야 다리가 후들거렸다. 서영은 천천히 원룸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입구의 계단에 앉아 버렸다. 가방을 옆쪽에 내려놓고선 무릎 사이에 무거운 머리를 묻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 모든 걸 태욱에게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후. 큰 한숨을 내쉰 서영은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5층에 도착했다. 천천히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현관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는 것조차 잊은 채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 생수병을 꺼내 물 한 잔을 마시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저절로 낮의 일이 떠올랐다. 태욱이 이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의 소파에 기댄 채 잠들어 버린 그를 바라보며 그녀 또한 단잠에 빠졌었다. 그게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집 안은 어둡고 고요하기만 했다. 이게 청승인 걸까. 서영은 곧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우선 불편한 원피스부터 갈아입고 싶었다. 편안 잠옷을 꺼내 놓고 손으로 더듬거리며 등 뒤의 지퍼를 내리려는데 현관 쪽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 늦었다.

덜컥 겁이 난 서영은 살금살금 현관 쪽으로 걸어가 우산 하나를 붙잡았다. 그러곤 문에 달린 도어 렌즈로 밖을 내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누, 누구세요?”

“나예요.”

분명 태욱의 목소리였다. 서영이 놀라 현관문을 열자 그가 서 있었다.

“티, 팀장님…….”

“그 치료, 아직 유효합니까?”

그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구급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소파 아래에 마주 앉았다. 여전히 크림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서영은 불조차 켜지 않은 채 연고를 꺼내려 하는 중이었다.

“불은 켜야 하지 않겠어요?”

“아.”

태욱의 지적에 서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의 불을 켰다. 그제야 세상이 환해진 기분이었다. 평상시에도 밝게 지내는 편이 아니라 작은 조명만 켤 때가 많았다. 그게 습관이 된 그녀는 어두운 공간에서도 행동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습니다.”

“네?”

구급상자에서 연고를 꺼내던 서영이 태욱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슈퍼 앞에 차 세우고 담배 사서 나오는데 5층 여기만 어두워서…….”

그래서 걱정이 되어 찾아왔다는 말처럼 들렸다. 서영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내리고 연고를 짜는 데 집중했다. 면봉에 약을 묻힌 뒤 다시 고개를 들어 태욱과 눈을 맞췄다. 상처가 눈 쪽에 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영은 애써 상처에만 집중하며 약을 살살 발랐다.

“아.”

“아파요?”

그럴 리가. 그가 또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지…… 마세요.”

서영이 심통 난 목소리로 경고했다.

“왜?”

태욱이 되물었다.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서영은 태욱의 눈빛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러면서 잘도 치료해 주겠단 소리를 했다.

“그냥, 이상해요. 팀장님, 웃는 거.”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말할 순 없으니까.

“인상 팍팍 쓰는 게 윤 대리 스타일인가?”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모습도 멋지긴 했다. 태욱은 무언가에 열중할 때 미간을 좁히고 인상을 썼다. 저러다 주름질 텐데. 별걱정을 다 하며 그 모습을 넋 놓고 감상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인상을 쓴 채 부서장들에게 서류 뭉치를 던질 때는 어쩐지 통쾌함마저 느껴졌다. 그녀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를 꿰뚫어 보며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날카롭고 예리한 힘은 태욱만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앞에서 자꾸만 웃었다. 웃는 방법조차 모르는 남자인 줄 알았는데 웃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처럼 그녀 앞에선 표정이 풀렸다. 마치 자신이 그를 웃게 한다는 착각이 들도록.

그가 전에 만났던 여자에게도 이랬을까. 진심은 아니어도 평소의 모습은 나타나게 될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생각의 끝에는 그와 만났을 여자들을 질투하고 말았다.

“……다 됐어요.”

그의 시선을 피해 밴드까지 꼼꼼하게 붙여 준 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태욱이 단단한 손길로 팔을 붙잡아 그녀를 다시 앉혔다. 놀라 바라본 그의 눈빛엔 못마땅함이 새겨져 있었다.

“왜 대답 안 해요?”

뭘. 아슬아슬한 그의 장난은 여전히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무슨…… 대답이요?”

“윤 대리 스타일.”

오늘 낮 자신의 어디가 좋으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던 태욱은 이번만큼은 꼭 듣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중요한가. 어떤 점 때문에 그를 좋아하게 됐는지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당신이 안 아팠으면 했어요. 마음이 갔어요. 그러다 보니…….’

시시한 말이 나올 게 뻔해 서영은 그 질문을 피했던 것이다.

“이렇게…… 끈질긴 스타일은 싫어해요.”

또 태욱에게서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터졌다. 전혀 예상 못 한 답이었지만 싫진 않은지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서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다고 생각할 즈음, 그는 그녀의 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싫어하기 전에 사라져야겠군요.”

그가 간단하게 웃으며 겉옷을 챙겼다. 서영도 원했던 행동이지만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태욱이 계속 이 집에 있기를 바란다는 것처럼. 감정의 파고를 더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그를 보내는 게 맞았다. 서영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태욱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그가 신발을 신고 돌아서자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곧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태욱이 가만히 현관에 서 있었다. 서영은 멀뚱히 그를 바라봤다. 움직임이 없자 곧 현관 등이 꺼져 버렸다. 무슨 할 말이 남았느냐고 물으려는데 태욱이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다시 불이 켜지고, 눈앞엔 그가 서 있었다.

“사귀는 사이에 하는 거.”

“…….”

“오늘은 없습니까?”

화라락. 여지없이 서영의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끝까지 장난을 치고 싶은 건가. 서영은 복잡해진 머릿속에 계속해서 물음표를 던지는 게 힘겨워 짧게 웃고는 그에게로 다가섰다.

“원하신다면요.”

깊게 생각할 건 없었다. 거절하는 것도 이젠 지쳤다. 오히려 행동은 과감해졌다. 예전처럼 쪽, 하고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두 번째라 그런가. 그때처럼 심장이 터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할 일을 마친 서영이 올렸던 발뒤꿈치를 내리는데 곧 허리가 단단한 팔에 붙잡히며 두 발이 공중에 떠 버렸다.

“시시한 거 말고.”

태욱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췄다. 천천히, 가볍게. 그게 끝인 줄만 알았다. 그래야 맞았다. 짧게 입술만 닿고 떨어지던 순간, 그는 더욱 가까이 그녀를 당겨 안으며 갈급하게 입술을 머금었다.

그의 혀가 일방적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입 안을 열었다. 휘젓듯 뜨겁고 사나운 감각이 서영을 뒤흔들었다. 혀가 이리저리 얽히고 입술이 거칠게 빨렸다. 끈적한 숨이 오가고 뱃속이 울리자 서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하아……. 팀장님.”

그를 가까스로 밀어 내고 그녀는 억눌린 신음을 터뜨렸다.

서영의 입술만이 아니라 숨조차 삼켜 버린 태욱이, 태연하게 서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전혀 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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