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연극인 게 확실한데 (2)
태욱이 본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사이, 대문 쪽으로 올라온 서영은 거대한 저택의 크기에 한 번 놀라고, 그 집 앞에 새겨진 문패의 이름을 보고 두 번 놀랐다. ‘손필성’이라니. 이런 이름이 흔할 리 없었다. 그녀는 현실감이 없어진 표정으로 멍해져 버렸다.
“일부러 감춘 건 아닙니다.”
그녀의 옆에 다가선 태욱이 서영의 표정만으로 모든 걸 읽고서 덤덤히 변명했다.
“말 안 한 게…… 감춘 거죠.”
서영이 어두워진 낯빛으로 읊조렸다.
“화내는 겁니까?”
그가 오히려 웃으며 물었다. 감정 표현이 자유로워진 서영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반가웠다. 그에게 시선조차 맞추지 못할 때도 귀여웠지만 제 할 말은 하면서 표현하는 서영은 태욱이 정말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가 동등한 관계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상대는 친구 훈재 정도뿐이었다. 모두들 적군과 아군, 그 두 가지 논리로만 그에게 다가오고 멀어져 갔다. 연인을 사귄다면 이런 모습일까. 내 감정보다 이 사람의 표정을 더 많이 살피게 되고, 그러면서도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욕심이 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중성이 생겨났다.
“화난 게 아니라, 놀란 거예요. 진짜…… 팀장님이 손 회장님 손자일 줄은 몰랐어요.”
서영은 여전히 무거운 표정으로 태욱을 올려다봤다.
“뭐, 상관있습니까?”
태욱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곧 관리인의 대답이 들리고 대문이 열렸다. 서영은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생각했다. 상관없다. 태욱의 물음은 어쩌면 맞는 말이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서영은 복잡해진 표정을 감추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그때 그녀의 아버지뻘 되는 남자가 뛰듯이 걸어와 태욱을 반겼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선 서영에게도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박희태라고 합니다.”
“아, 네. 윤서영입니다.”
서영은 어른의 인사에 허둥대며 같이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옆의 태욱이 그녀의 지나친 행동에 주의를 주듯 팔을 살짝 붙잡으며 박 비서를 소개했다.
“이 집 일을 오래 봐주신 분이야. 할아버지 비서 일도 하시고.”
태욱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서영에게 친근한 반말을 썼다. 꼭 몇 년은 만난 사이처럼 구는 그의 행동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내놓기도 민망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은 얼어 버려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비서분은 서영을 의심스럽게 보지 않고 돌아서 그들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태욱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서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많이 긴장했어요? 걱정할 거 없습니다. 나만 믿고 따라와요.”
그가 그녀를 이끌듯 손을 붙잡았다. 태욱의 손은 따뜻했다. 서영은 잠시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다 그러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몇 살이에요?”
“네?”
“본인 나이, 몰라요?”
“고모.”
본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리허설부터 꼬인 기분이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큰 거실이 나왔고, 그녀가 대기 의자에 앉자마자 와인 잔을 든 젊은 여인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별채로 넘어가는 응접 공간에서 박 비서에게 손 회장의 위치를 묻던 태욱이 뒤늦게 예상치 못한 인물을 발견하고 표정이 굳은 채로 다가왔다.
“올해 서른이고, 윤서영이라고 합니다.”
서영은 그녀의 질문에 뒤늦게 대답했다. 왠지 낯이 익은 그녀는 태욱이 고모라고 부르기엔 너무 젊어 보였지만 풍기는 분위기에서 그의 느낌이 묻어나는 걸 보니 피가 섞인 사이인 건 확실해 보였다.
“난 서른아홉. 태욱이 고모예요. 손은림. 유신아트센터 관장.”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어떤 잡지에서 마주한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잡지의 내용도 또렷이 기억났다. 손필성 회장이 두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늦둥이 외동딸이라는 것. 그러면서 알게 된 손 회장의 가족 관계는 아들 둘, 딸 하나였다. 장남은 지금 유신전자의 오너인 손인국 사장이라고 했으며 둘째 아들에 대한 정보는 별달리 없었다. 어떤 이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혼자 날 키우셨고. 그렇다 보니 여러 사정상 할아버지가 계신 본가로 들어가게 됐어요.’
서영은 야근하던 그에게 초밥을 사다 준 날 밤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퍼즐을 맞춰 보면 태욱은 지금 세상에 없는 손 회장의 둘째 아들이 낳은 핏줄인 게 되었다. 아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성이 ‘강’씨였다. 당연하게 서영은 그가 손 회장의 외손자가 아닐까 추측했는데 머릿속이 다시 꼬여 버린 기분이었다.
“우리 강 팀장이 처음으로 여자를 집에 데려온다기에, 내가 일부러 달려왔어요. 근데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해서 이 와인을 따 버렸더니, 요 모양이네. 이해해요, 서영 씨.”
그의 고모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2층 난간 쪽으로 사라졌다. 태욱은 그 모습을 잠시 못마땅하게 바라봤을 뿐, 더 이상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처럼 그의 시선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고모는 신경 쓰지 말아요. 원래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태욱이 간단히 설명했다. 그가 서른넷이고, 고모가 서른아홉이니 어찌 보면 누나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재벌가의 실상은 여느 평범한 가족의 모습과는 다르니 서영은 그와 그녀의 관계가 어떨지 쉽게 예상되지 않았다. 와인 잔을 들고 자유롭게 저택을 누비는 여인이 어쩐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현실을 자각하는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걸까. 서영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통화 중이셔서 부르면 오라시고, 어머니는 며칠 전 절에 가셨다네요.”
그가 박 비서와 나눈 이야기를 그녀와 공유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일부러 보내신 것 같아요. 뭐든 본인 결정이 제일 중요하신 분이라. 나도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어요. 윤 대리가 어머니까지 상대하기엔 벅찰 테니까.”
태욱의 말도 맞긴 했지만 그의 배려가 둘 사이의 거리를 확실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네. 다행이에요.”
서영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리 어머니 만나 보고 싶지 않아요?”
“만나면…… 괜히 더 죄송할 것 같아요.”
서영이 차분해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태욱은 예상하지 못한 답인 것처럼 잠시 표정이 굳어지다 곧 그녀가 아는 편안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렇죠. 윤 대리는 이런 거짓말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박 비서의 호출을 받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한 10분, 그 안에 끝날 겁니다. 조금만 참아 줘요.”
다정하게 부탁한 태욱이 서영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를 따라 별채 쪽으로 걸어 들어가던 서영은 눈앞에 펼쳐진 공간에 저절로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태욱이 그런 서영을 옆에서 내려다보다 조그맣게 웃었다. 모두들 손 회장의 아방궁을 처음 볼 때면 똑같이 보이는 반응이었다.
특히나 이런 재벌가의 허상을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었을 그녀가 위압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태욱도 처음엔 그랬다. 일곱 살, 처음 이 저택으로 들어왔을 때 느꼈던 감정들이 아직도 생생하고 또렷했다. 어렸던 그를 열패감에 휩싸이게 만들었으며 또한 그로 인해 명확한 승부욕을 가지게 했다. 그렇게 자라난 사람이 바로 지금의 강태욱이었다.
서영은 잠시 태욱과 손 회장의 공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손필성 회장을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주요 뉴스 면에 등장할 때마다 거리감을 가지고 지켜봤을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태욱에게로 고정됐다.
꼭 그녀를 여기에 세워야 한다던 태욱의 저의가 궁금했다. 평범한 여자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당연하게 손 회장이 반대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일이 더 커지고 속이 시끄러워질 것이 뻔한데. 일부러 자신의 할아버지를 자극하려는 그의 속마음을 알 수도 없었다. 서영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태욱은 그녀를 자신의 뒤쪽으로 세웠다.
“딱 내 뒤에만 서 있어요.”
그가 등 뒤로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팀장님.”
“금방 끝나요.”
똑똑. 태욱은 방문을 노크했고, 곧 문이 열렸다.
“저 왔습니다.”
“…….”
서영은 태욱의 등 뒤에서 벗어나지 못해 손 회장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태욱은 보디가드라도 된 것처럼 그녀의 앞에 단단하게 서 있었다.
“앉아라.”
손 회장은 평소와 다르게 온화한 모습이었다. 세상의 눈을 의식하는 양반이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태욱의 입가엔 잠시 허무한 미소가 스쳐 갔다.
“그래서, 신사업 팀에서 일한다고?”
서영이 태욱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곧장 질문이 날아왔다.
“……아, 네.”
“이 녀석이 내 손자인 줄 알고 만났나?”
물음은 거침이 없었고, 정확하게 상대를 찔렀다. 서영은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마치 그가 이 집안의 핏줄인 걸 미리 알고 만난 것이냐는 의심 같기도 했다.
“이 사람은 몰랐습니다. 그런 질문 하실 거면 일어나겠습니다.”
태욱은 지체하지 않고 서영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그의 무례한 행동에 오히려 당황한 건 서영이었다. 손필성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뉴스 기사로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게 오히려 편했다. 태욱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이토록 손 회장에게 날카롭게 구는 이유는 뭘까. 그녀는 태욱의 마음을 자꾸만 살피게 되었다.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일 거면 왜 데려왔어?”
손 회장이 일어선 둘을 향해 일갈했다.
“이미 얼굴은 사진으로 다 보셨지 않습니까?”
그는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못 할 것도 없죠.”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 날아와 서영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퍽, 소리를 내고 바닥으로 떨어진 물건이 옆의 태욱을 쳤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서영은 놀라서 다시 눈을 뜨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눈가 아래에 길게 베인 상처가 생긴 게 보였다. 그때였다. 또다시 물건이 날아왔고 급하게 등을 돌린 태욱이 서영의 몸을 감싸며 끌어안았다.
“얼씨구.”
손 회장은 둘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던진 것은 소파에 장식된 쿠션 하나와 태욱의 파파라치 사진이 담긴 종이봉투였다. 늘 겁도 먹지 않고 날렵하게 피하던 놈이 오늘은 멍청하게 모두 맞아 주고 있었다.
그의 뜻대로 날카로운 봉투 끝이 태욱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는데도 필성은 이상하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연극인 게 확실한데, 쇼가 쇼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의 눈이 여전히 여자를 보호하고 있는 손자 태욱에게 꽂혀 떨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