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19화 (19/75)
  • 8. 연극인 게 확실한데 (1)

    한눈에 봐도 고가의 옷들만 파는 명품 숍 앞에 태욱이 차를 세웠다. 그의 본가로 인사를 드리러 가기 두 시간 전이었다. 나름대로 격식 있는 옷으로 차려입고 나왔지만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태욱은 어쩐지 부족하다는 얼굴이었다. 서영은 마음이 불편했으나 그의 뜻대로 따라 주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그녀의 자존심을 세워서 무엇 하랴. 지금은 그저 연극을 하는 것일 뿐인데. 그가 이끄는 대로 그녀는 적당한 옷을 사 입기 위해 명품 숍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어머나, 강 팀장님!”

    두 사람이 들어서자 매니저로 보이는 직원이 태욱을 알아보고 얼른 문 앞까지 뛰어나와 인사를 건넸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짧게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여자 옷 좀 볼 수 있습니까?”

    태욱의 말에 매니저는 얼른 시선을 옆의 서영에게로 옮겼다. 찰나 견적을 매기듯 여자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곧장 미소를 머금은 매니저는 서영을 깍듯이 모시며 VIP 룸으로 안내했다.

    “혹시 좋아하시는 스타일이 있으세요? 제가 볼 땐 피부가 희고 팔다리가 늘씬하셔서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매니저의 과도한 평가에 서영은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어야 했다. 이런 곳에 와 본 적이 없기에 어떤 옷을 골라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남자조차 제대로 사귀어 본 적 없는데 그 가족을 만나러 가야 하는 일부터 생겼으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건 맞았다.

    “어려운 자리에 가야 해서……. 조용하고 차분한 디자인으로 골라 주세요.”

    매니저는 서영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고 곧장 고급지고 단정한 투피스와 원피스 몇 벌을 피팅 룸에 가져다주었다.

    서영은 그 옷들 앞에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도치 않게 신데렐라 놀이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이 많아 봤자 지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순하게 넘겨야 했다.

    서영은 매니저가 가져다준 옷들 중 가장 어두운 네이비 톤 투피스를 집어 얼른 갈아입었다. 밝은색은 어쩐지 그녀를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것 같아 잘 입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무채색 라인만 입다 보니 옷장엔 비슷한 색감의 옷들만 가득 차 있었다.

    한번은 지선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그녀의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있었다. 갑자기 들르게 된 거라 갈아입을 옷이 없어 무엇이든 얻어 입어야만 했는데, 그때 지선이 건넨 건 밝은색 원피스였다. 그저 옷 스타일만 바뀌었을 뿐인데, 지선은 다른 사람 같다며 인증 샷까지 남기려 했다.

    왜 우중충한 색들만 입느냐고, 뭐든 튀어야 사는 세상에서 옷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아느냐며 그녀는 또다시 설교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수긍되는 말이었다. 이성에게 인기 있는 부류들 중엔 밝고 화려한 면이 많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을 꾸미고 가꾸며 사랑해야 다른 이들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서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변화보다는 안정적인 게 좋았다. 오래 신은 신발이 편했고, 집 앞 단골 미용실이 좋았고, 읽고 감동받았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행복감을 느꼈다.

    태욱에 대한 마음을 오랫동안 놓지 못한 것도 그런 성정 탓일 수도 있었다. 이제는 벗어나야지. 처음으로 오래 마음을 준 무엇에 대해 그녀가 먼저 돌아서려 시도했다가 지금의 상황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큰일 난다고, 작년에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서영은 옷을 다 입은 후 거울 앞에 섰다. 평소 입지 않았던 스타일이라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다른 윤서영이 되어야 했다. 강태욱의 애인이라는 여자. 서영은 천천히 피팅 룸의 문을 열고 나섰다.

    “어머나……. 제가 이럴 거라고 말씀드렸죠? 너무 우아하게 잘 어울리세요.”

    대기 의자에 앉은 태욱의 옆에 서 있던 매니저가 서영을 보고는 제 안목을 은근히 강조했다. 태욱은 핸드폰으로 전송된 업무 보고를 읽다가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다.

    서영은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지만, 이목구비가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고 팔다리가 늘씬해 조금만 꾸며도 인상이 달라 보일 거라는 건 그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장점을 조금이라도 더 드러내려는 부류가 있었고,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도 존재했다. 후자가 서영이었다.

    “나쁘진 않은데, 좀 밝은…… 분위기의 옷은 없습니까?”

    태욱은 마치 곧 론칭할 인테리어 공간을 미리 돌아보고 문제점을 지적하듯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서영은 마음대로 하시라며 포기하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연극 놀이의 장난감이 되어 주기로 했으니 마음대로 꾸며 보라지. 입이 일자로 굳어지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얼굴에 인내의 웃음을 만들었다.

    매니저는 왜 없겠느냐며 곧장 그녀를 돌려세워 다시 피팅 룸으로 들여보냈다. 콕 집어 그녀가 가장 꺼려 하던 밝은 톤인 크림색 원피스를 두 손에 쥐여 주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서영은 얼른 그가 원하는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태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업무 통화를 하고 있었다.

    서영은 가만히 서서 그가 돌아보길 기다렸다. 매니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얼른 오케이를 받고 여기를 벗어나고 싶어서 그녀는 성큼 단상을 내려가 태욱에게 다가섰다.

    “아닙니다. 그 문제는 저희 쪽에서 해결할 게 아니라 허가가 나면 그 이후에…….”

    “팀장님.”

    전화를 해도 눈은 이쪽을 보라고, 그를 불렀다. 태욱이 어느새 가지고 들어온 태블릿 PC로 허가 자료를 훑던 시선을 옮겼다. 서영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이건 마음에 드세요? 그녀는 눈빛으로 물으며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어색하고 부끄럽다고 느낀 감정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제가 다시 전화하죠.”

    태욱은 전화를 끊고 잠시 서영을 올려다봤다. 그게 너무 노골적이고 한참이나 걸려서 서영은 민망해지려 했다. 싫으면 싫다 말을 하지. 하여튼 맞추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다른 걸로 갈아입어 볼게요.”

    서영이 돌아서려는데 태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걸로 하죠.”

    그가 급한 일이 생긴 사람처럼 VIP 룸을 벗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서영은 황당해 가만히 서 있다 ‘오케이’란 생각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그를 따라나서려는데 뭔가 이상해 돌아봤다.

    태욱이 앉아 있던 자리에 그의 태블릿 PC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뭘 놓고 다니는 남자였나. 서영이 이상해 밖을 내다보자 그는 이미 가게를 벗어나 자신의 차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서영이 그의 물건을 챙겨 들었다.

    서영은 본인의 입었던 옷도 마저 챙겨 들고 뒤늦게 태욱의 차에 올랐다. 그는 조금 전 급하게 끊긴 전화를 다시 이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태블릿 PC를 건넬 타이밍을 잡고 있던 서영은 뭔가 아래가 허전한 느낌이라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크림색 원피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짧아 무릎 위까지 올라왔다.

    평소에 치마를 잘 입지 않으니 이런 부분까지 계산하지 못했다. 쇼핑백에 담긴 그녀의 옷으로 대충 가리는 게 나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 행동 자체가 태욱을 의식하는 것 같아 좀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다리를 보고 있을 남자도 아니고.

    그러는 사이, 고개를 들자 태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전화를 끊었는지 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지 않았다. 서영이 얼른 챙겨 온 태블릿 PC를 건네려고 하는데 그보다 먼저 그녀의 무릎 위에 담요 하나가 올려졌다.

    “덮어요. 신경 쓰이는 것 같은데.”

    언제 그것까지 보고 있었지. 하여튼 무서운 남자라 생각하며 서영은 담요로 무릎을 가린 후 태블릿 PC를 태욱에게 건넸다.

    “이거, 테이블에 두고 가셨어요.”

    차를 출발시키려던 태욱이 그녀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잠시 정지해 있었다.

    “아……. 고마워요.”

    그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물건을 받았다.

    “지금 가면 얼추 시간 맞을 겁니다.”

    “네.”

    태욱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말했다.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딱딱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자꾸만 그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 같아 서영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가 원하는 걸 모두 따라 주고 있는데.

    “이 옷 별로예요?”

    그 이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면 조금 늦더라도 가서 바꾸는 게 맞았다. 매니저를 통해 옷 가격을 전해 들었을 때 서영은 잠시 숨이 멈추기도 했었다.

    뭐, 그를 위한 연극에 사용되는 옷이니까. 옷값은 그가 지불하는 게 맞았고,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돌려주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과소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생각과 맞지 않다면 입지 않는 게 맞았다.

    “윤 대리는…… 별롭니까?”

    “네?”

    그가 오히려 묻자 서영은 황당했다.

    “아니, 팀장님이 맘에 안 드시는 것 같으니까 다른 걸…….”

    “내 마음엔 들어요.”

    태욱이 그제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런데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깊게 가라앉아 평온한 것 같으면서도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위험하게 타오를 것 같은 이중성을 띠었다. 이 불씨의 매개체를 알 수가 없는 서영은 그저 그의 짙은 눈빛을 받아 낼 뿐이었다.

    “그럼, 됐어요. ……출발해요.”

    서영이 앞을 보며 시선을 피하자 그제야 태욱에게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 미소가 얼마나 반가운지 그는 모를 것이다. 서영은 그가 모르도록 조그맣게 낮은 숨을 내놓았다.

    차가 출발하고 곧 태욱의 입에선 그와 말을 맞출 시나리오가 흘러나왔다. 기본 바탕은 현실과 같았다. 서영이 먼저 짝사랑을 시작했고, 그걸 알게 된 태욱이 마음을 받아 주어 사귀게 된 것. 지금 한창 서로를 알아 가는 중이고,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는 것까지.

    그의 입에선 거침없이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서영은 그저 태욱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크림색 원피스처럼 모든 게 서영을 불편하게 조여 왔다. 그중에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 고른다면, 신호가 걸릴 때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태욱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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