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렇게 우습게 (3)
“이 대리는 그래도 눈치가 있는 줄 알았는데.”
네 명이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으니 원룸 안이 꽉 차 보였다. 서영은 자신의 옆에 앉은 태욱이 아직은 낯설어 조금 거리를 두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캐치한 지선은 여전히 음흉한 눈빛으로 태욱을 바라봤다.
“제가 우리 자기, 아니, 윤 대리를 아주 많이 아끼거든요. 사귀는 사이라고 하셨지만, 아직 그렇게 가까워 보이지는 않아서. 여기 둘만 두고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대, 대리님!”
얼굴을 붉힌 서영이 다급하게 지선을 불렀다.
태욱이 전화를 걸어 온 이후부터 지선은 지독하게 서영을 취조했다. 지선이 한번 목표를 정하면 어떻게든 성과를 얻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는 걸 서영도 알았기에 피할 길이 없었다.
언제부터 전화 통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느냐. 서영에게 접근한 강태욱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을 역이용하려면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같이 머리를 맞대 보자. 지선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신이 나 한 시간이 넘는 동안 떠들어 댔다.
거기다 대고 태욱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말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지선을 붙잡고 있으라 했으니 서영은 그 부분도 생각해야 했다. 한꺼번에 여러 상황이 벌어지니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생겨야 하는 사이 아닌가…….”
서영과 달리 태욱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이 대리가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아까운 주말을 회사 동료 부부랑 마주 앉아서 날려 버리길 바라는 겁니까? 그건 진짜 윤 대리를 아끼는 게 아닌 것 같은데.”
“티, 팀장님.”
서영은 태욱과 지선의 눈치를 동시에 보느라 진땀을 뺐다. 그 사이에서 훈재만이 지금의 상황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와이프와 친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러니까, 진짜…… 윤 대리랑, 너랑, 사귄다는 소리야?”
훈재는 이 집에 들어와 태욱에게서 서영과 사귄다는 말을 들은 이후, 지금까지 똑같은 질문을 총 다섯 번 반복했다. 지선은 자신의 남편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당신 친구가 그렇다잖아. 요새 귀가 잘 안 들려요, 여보?”
귓가에다 대고 속삭이듯 ‘여보’ 소리를 내놓자 훈재는 소름이 돋아난 얼굴로 지선을 응시했다. 지선은 그때서야 아차 싶었다. 훈재의 성감대는 귀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하루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수가 있었다.
지금껏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살았는데 그걸 잠시 잊고 있었다.
“실수예요, 여보. 실수. 실…….”
“일어나.”
훈재가 지선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훈재 씨.”
“태욱이 말이 맞잖아. 두 사람이 사귀는 거면 우리가 눈치 없이 여기 있는 게 맞겠어? 맨날 윤 대리한테 좋은 후배 소개해 주라고 날 달달 볶아 놓고선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굳이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지선은 표정이 사라진 태욱의 얼굴을 보고선 슬금슬금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탐색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서영을 혼자 두고 가자니 마음이 불편했지만 제 코가 석 자였다.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태욱과 달리 후줄근한 남방 하나만 걸친 훈재가 초라해 보이자 미웠던 마음은 또 안쓰러움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어 버렸다.
지지고 볶고, 바람 잘 날 없는 게 사랑이고, 결혼이라는 걸 서영에게 보여 주는 것 같아 민망했지만 어쨌든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제법 잘 어울려 그녀도 기분이 좋았다.
이왕이면 서영의 인생 동반자로 황태자 강태욱은 어떨까. 그녀 나름의 김칫국을 아낌없이 마셔 대며 눈치 없는 부부는 조용히 집을 빠져나갔다.
“박 변호사님이랑 같이 계신 줄 몰랐어요.”
갑자기 둘만 남게 되자 서영은 어색한 나머지 할 말을 찾아서 꺼냈다.
“박 변이 소개팅해 준다고 했었군요.”
“네?”
태욱은 내내 그 생각을 했었는지 서영의 물음엔 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솔직하게 말하면 박훈재 주변엔 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뿐이에요.”
그의 말에 서영이 갑자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팀장님도 그 주변 사람이잖아요.”
그녀의 웃음에 태욱은 또 한 번 단단히 붙잡고 있던 마음속 무언가가 제멋대로 풀려 버리는 것 같았다. 서영을 만난 이후로 이상한 현상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게 싫지 않다는 게 더 아이러니했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태욱도 싱겁게 웃었다.
“솔직히 몇 번 소개팅 주선해 준다고 했는데 내키지 않더라고요.”
왜냐고. 혹시나 그에 대한 마음 때문이냐는 이기적인 물음이 차올랐지만 다행스럽게 서영의 뒷말이 그의 입을 막아 주었다.
“소개팅 같은 거, 저랑은…… 안 맞아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제 이야기를 주절주절해야 하는 것도 어렵고, 또 잘 모르는 사람인데 한 번 보고 호감을 갖는다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서영의 말처럼 그녀가 모르는 남자 앞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태욱은 어처구니없게도 그녀가 이런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그를 짝사랑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로 마음이 옮겨 갔겠지. 이제 와 그녀의 성격에까지 감사하고 있다니. 지금 그 마음을 이용하고 있는 자신의 죄책감조차 잊어버린 이기심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어디가…… 좋았습니까?”
지독하게 나쁜 놈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물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서영은 태욱의 질문에 잠시 얼굴을 붉혔다.
이렇게 그의 말 한마디에 반응하는 그녀가 재미있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라 가볍게 생각했으면서도 모든 게 진심인 서영을 앞에 두자 태욱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꼭 말씀드려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녀가 끝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쓸쓸하게 웃었다.
“그래요. 밥 먹읍시다.”
태욱도 가볍게 웃어넘겼다. 굳이 심각해지면서까지 들을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중이었고, 감정이 들어가 상황을 어지럽게 만들어 버리면 원하는 걸 제대로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나만 생각하는 게 맞았다.
“파스타 잘하는 곳에서 산 겁니다. 먹어 봐요. 윤 대리 취향이 빨간 쪽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포장된 음식 중 토마토파스타가 서영의 앞에 놓였다.
이런 것까지 알고 챙기는 모습에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는 건 의미 없는 행동이란 걸 알게 되어서일까. 서영은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남긴 채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다.
유명한 곳에서 사 온 것이니 당연히 맛도 좋았다.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태욱은 잠시 흡족한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팀장님도 어서 드세요.”
“알겠어요. 잘 먹는 걸 보니 사 온 보람이 있군요.”
그는 다정하게 말했고, 서영은 화답하듯 밝게 웃었다.
지선이 만들어 놓은 음식까지 처리하느라 배가 심하게 불렀다. 소화도 시킬 겸 서영은 차를 만들었고, 태욱은 당연한 것처럼 그들이 식사했던 테이블을 치웠다.
괜찮다는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남은 음식들은 한 곳으로 모으고 재활용과 아닌 물건을 구분하는 모습에서 그의 깔끔한 성격과 자취 경력이 엿보였다.
집은 본가이지만 매일 야근을 하다 보니 주로 회사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지낸다고 어느 누군가에게 고급 정보처럼 들었던 기억이 났다. 혼자 살면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할 텐데. 서영은 그런 걱정들이 앞섰는데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누가 누구를 걱정할까 싶었다.
커피 두 잔을 드립으로 내려 와 소파 아래에 가져다 놓자 태욱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무리 철인이라고 해도 피곤할 만했다. 출장에 주말까지 반납한 채 근무를 한 게 몇 주째인지. 어쩌다 보니 그의 스케줄을 이곳저곳에서 엿듣게 된 서영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윤 대리가 무슨 생각 했는지 내가 맞혀 볼까요?”
태욱은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제라는 것처럼 말했다.
“저,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뭔가 들킨 기분이었지만 서영은 아닌 척 얼른 자신 몫의 커피를 들고 홀짝거렸다. 시선을 피하고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태욱은 이 재미난 상황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불쌍해 보여요?”
“아, 아뇨!”
서영은 변명하듯 황급히 소리쳤다. 그 모습에 태욱이 웃음을 터뜨렸다. 또 그에게 당한 걸까. 자신도 모르게 그를 동정해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그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니, 이런 동정 같은 건 아주 많이 받아서 이젠 인이 박인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서영은 태욱이 웃을수록 어째선지 점점 더 마음이 아팠다.
“여기, 땅의 기운이 좋은가……. 눈이 자꾸 감기네요.”
태욱은 정말 하품까지 했다. 3일 밤을 지새워도 다크서클조차 보이지 않던 남자인데. 서영도 신기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본가에 가는 건 저녁이니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다. 좀 쉬도록 놔둘까. 서영은 일부러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향했다. 공간의 구분이 없는 원룸이었지만 나름 크기가 커 소파가 있는 쪽과 부엌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서영은 식탁 의자에 앉아 잠시 태욱을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아 버린 상태였다. 불편해 보이긴 했지만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괜히 다른 오해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서영은 그를 바라보다 앉은 채로 스르르 식탁에 엎드리게 되었다.
손 위에 턱을 걸치고 시선은 태욱을 응시했다. 그가 잠든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을 테니까, 모두 눈 속에 담아 놓아야지.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그녀도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맛있는 음식을 아주 많이 먹었고, 주말이었으며, 창으로 봄바람까지 솔솔 불어왔다. 한동안 서영의 집 안에는 잠든 두 사람의 숨소리만 고여 들었다.
꿈이었나. 서영은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태욱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소파 쪽을 보자 그가 없었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헷갈렸다. 서영은 얼른 일어나 그가 잠들었던 소파로 다가갔다. 다행히 그의 겉옷이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간 거지. 서영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데, 베란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곳은 지선이 들이닥친 후 눈치채지 못하게 커튼으로 막아 놨었다.
설마. 그녀는 달려가 닫혀 있던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녀의 비밀 공간 안에 태욱이 서 있었다. 서영이 나타난 걸 눈치챈 그가 뒤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이 집…… 잠도 잘 오고, 뷰도 좋네요.”
날리는 벚꽃 사이로 그가 또 한 번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