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17화 (17/75)
  • 7. 이렇게 우습게 (2)

    두 번이나 무시했음에도 세 번째 전화벨이 울렸다. 태욱은 다시 핸드폰을 뒤집어 놓으며 이유를 떠올렸다. 이 황금 같은 주말에 녀석이 그를 찾는 이유는 뻔했다. 그러게 잘 좀 맞추고 살라 일렀거늘, 훈재는 신혼 초의 여느 부부들처럼 아주 전투적인 마인드로 주기적인 부부 싸움을 했다.

    그를 감쪽같이 속이고 결혼할 때는 언제고 아내와 다툰 날이면 꼭 태욱을 만나려 했다. 자신보다 더 우울하고 불쌍한 중생을 봐야 마음이 풀린다나 뭐라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받아 주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태욱은 오늘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급하고 바빴다. 저녁에 손 회장을 만나러 가기 위해선 낮 시간 동안 주말 안에 끝내야 할 일을 마무리해야 했고, 일이 예상보다 조금 더 일찍 끝나면 서영과 늦은 점심이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물론 점심은 온전히 그 혼자만의 즉흥적인 바람이었다. 서영과는 저녁에 만나기로 했으니 그녀가 다른 일이 있다고 하면 뜻대로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걸 알면서도 평상시보다 빠른 속도로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태욱은 자신의 모든 게 생경하고 낯설었다.

    예상하지 못한 입맞춤 또한 그랬다. 그저 볼에 입술이 닿은 것뿐이었다. 그 속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자꾸만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그에 대한 복수겠지.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문제였다.

    하지만 이상하도록 심장이 뛰었다. 이렇게 우습게, 그럴 수 있다고? 태욱은 그 당시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녀를 붙잡아 놓고 한참을 바라봤었다. 그런다고 답이 나올까. 머릿속만 더 복잡해졌다. 그 이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 고작 볼에 입맞춤 한 번 했다고 모든 게 흔들리는 게 그답지 않아서였다.

    태욱은 자신이 감정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이제껏 살아왔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만을 믿었다.

    지선과의 결혼 이후 업무 능률이 올라간 훈재를 보며 사랑이란 감정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면을 확인했었다. 그때 훈재는 태욱을 미친놈 취급했었다. 어떻게 감정까지 업무 능률로 환산하느냐고.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기는 집안에서 자라는 동안 영감에게 배운 것이라고는 이것뿐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그에게 감정의 순기능을 제대로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존경하긴 했지만 그에겐 너무 환상 같은 이야기였고, 손 회장의 밑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 러브 스토리는 때때로 상처가 되기도 했다. 돈, 명예, 핏줄까지 모두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남자의 최후는 자발적인 죽음이었다. 어머니와의 결혼을 통해 아버지의 인생에 남은 것은 아들 ‘강태욱’ 하나뿐이었다.

    고마움과 원망은 하나의 감정이었다. 태욱은 늘 가슴 안에 물음을 담고 살았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아버지가 그와 어머니에게 남긴 게 사랑인지, 고통인지 한 번씩은 헷갈려 모두 잊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런 순간마다 태욱은 잠든 어머니의 편안한 얼굴을 내려다봤다. 누구보다 아파했을 사람은 어머니였고, 모든 걸 감내하며 참아 온 이도 그녀였다. 태욱은 그저 제3자라는 생각으로 감정을 이성으로 되돌렸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현재를 살고 있는 강태욱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다시 서류를 붙잡는데 이번엔 핸드폰 벨 소리가 아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훈재가 그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훈재를 스카우트한 게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단칼에 절교하고 다신 보지 않았을 텐데. 태욱은 그때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일하는 거 안 보여?”

    태욱은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서류를 훑으며 대답했다.

    “점심 먹자.”

    네놈이랑 먹으려고 오전 내내 서류에 눈을 박고 있었는 줄 아느냐며 태욱이 고개를 들어 친구를 노려봤다. 그 강도가 평소보다 몇 배는 세서 훈재는 잠시 주춤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곧 그의 옆으로 다가가 책상에 걸터앉았다.

    “……기다릴게. 기다리지…… 뭐.”

    목소리가 아주 불쌍하게 기어들어 갔다. 태욱은 어쩔 수 없이 서류를 집어 던지듯 책상에 내려놓았다.

    “또 왜 싸웠는데?”

    “몰라. 기억도 안 나. 뭐, 내가 기억하는 게 맞는다는 보장도 없고. 이것 때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전혀 다른 이유였어. 결국 그것 때문에 또 싸우지만.”

    정말 가지가지였다. 명색이 변호사면서 사랑하는 사람 마음 하나 제대로 맞히지 못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지선도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늘 논리적이고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던 박훈재가 매번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태욱은 사랑이란 게 정말 어떤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쨌든 오늘 점심은 안 되겠다.”

    태욱은 그 틈에서 남은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고 노트북 화면을 껐다. 그가 겉옷을 챙겨 일어서자 훈재가 포기하지 않고 따라붙어 물었다.

    “왜? 약속 있어? 거짓말하지 말고, 어차피 혼자 먹을 거잖아.”

    내일부터 신사업 팀 출입 명단에서 ‘박훈재’를 꼭 제외시키겠다고 다짐하며 태욱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섰다.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훈재는 당연한 것처럼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도시락 하나 사 줄 테니까 그거 들고 집에 가서 혼자 먹어. 괜히 돌아다니다가 이 대리한테 더 혼나지 말고.”

    “너 진짜 약속 있어? 혹시…… 여자 생긴 거, 아니지?”

    그럴 리 없다는 눈빛으로 훈재가 태욱을 바라봤다. 변호사라는 놈이 눈치가 이리도 없어서야. 그래서 황금 같은 주말에 이렇게 밖을 떠도는 것이라 생각하며 태욱은 훈재와 함께 회사 근처 유명 파스타 전문점으로 향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서영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함께 점심을 먹을 수 있는지 물어야 했지만 훈재가 따라붙어 그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안 된다고 하면 그가 다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두 명분을 포장 주문 한 뒤 훈재의 몫으로 하나 더 주문했다.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훈재는 태욱이 내민 점심을 받아 들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진짜 약속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를 따돌리기 위한 작전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추리가 되지 않았다. 이런 건 자신의 와이프 지선이 탁월하게 예측하는 편이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처량해진 훈재는 자신의 전화조차 받지 않는 지선이 몇 시간 만에 보고 싶어졌다.

    “받았으면 내려.”

    태욱이 차를 출발시키지 않은 채 조수석의 훈재를 바라봤다.

    “우리 집까지 태워 주는 거 아니었어?”

    “그거 도로 내놓고 꺼질…….”

    “아, 알았어.”

    태욱에게서 점심을 사수한 훈재는 얼른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녀석이 시위하듯 자신의 차 앞에 서서 택시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던 태욱은 얼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손을 가만히 두기가 힘들었고, 또다시 목 근처가 간지럽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들릴 줄 알았던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고 신호음만 길게 이어졌다. 전화받을 상황이 아닌 듯해 태욱은 통화를 종료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멍해지다 조수석에 놓인 음식점 봉투를 내려다보는데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았다. 한편으론 멋대로 점심을 같이 먹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게 우습기도 했다.

    태욱이 아직 택시를 잡지 못하고 서 있는 훈재를 다시 부르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자 서영이었다. 그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째선지 곧장 말이 튀어나오지 못했다.

    ― 여보세요? 팀장님? ……끊겼나.

    서영이 통화를 종료하기 전에 태욱은 입을 열었다.

    “점심 먹었어요?”

    ― 아뇨. 아직, 이요. 팀장님은요? 아직도 일하고 계세요?

    걱정하는 목소리에 태욱은 피곤이 눈 녹듯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얼른 서영이 보고 싶었다. 맛있는 파스타를 나눠 먹으며 영감을 골탕 먹일 작전을 짜고, 그의 농담에 반응하는 그녀를 놀리고도 싶었다.

    “빨리 끝났습니다. 점심 먹지 말고 있어요.”

    ― 네?

    “지금 가는 길이니까.”

    태욱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 저기, 점심은 안 될 것 같아요. 집에 누가 와 있어서…….

    어쩐지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감정에 뒤흔들리는 건 서영이 아니라 태욱 자신인 것 같았다. 당연히 서영이 혼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의 착각이 불러온 파급력은 컸다.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기에. 지금 그녀의 집에 함께 있다는 누군가를 향한 적대심까지 들었다.

    “그럼, 할 수 없죠. 저녁에 통화합시다.”

    곧 죽어도 자존심은 지키겠다는 건가. 태욱은 밖에 서서 택시를 붙잡지 못해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남자와 자신의 처지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내리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강 팀장이 왜 전화한 거야? 왜, 왜? 응? 아, 저기, 대리님, 잠시만요!

    핸드폰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는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지선의 음성이 맞았다.

    “혹시, 이 대리랑 같이 있습니까?”

    태욱이 재빨리 서영에게 물었다.

    ― 아……. 갑자기 찾아오셔서 점심 해 주신다고.

    “어디 못 가게 붙잡고 있어요.”

    ― 네?

    서영은 태욱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내가 지금 가서 해결할 테니까.”

    통화를 종료한 태욱은 곧장 차의 클랙슨을 울렸다. 뒤돌아선 훈재가 운전석의 태욱을 바라봤다. 그가 입 모양으로 ‘왜?’라고 묻자 태욱은 고갯짓으로 조수석을 가리켰다. 태워 주겠다는 뜻을 이해한 훈재는 얼굴 위에 미소를 머금고 단숨에 뛰어와 차에 올랐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한테 너무했지?”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 부부는 대단하다.”

    “뭐?”

    훈재는 영문도 모른 채 차의 속도를 높이는 태욱을 바라봤다. 이렇게 급하게 운전을 하는 놈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영, 맛이 간 것처럼 이상했다. 훈재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안전벨트를 꼭 붙잡았다.

    “여기가…… 어디야?”

    집에 데려다주는 줄 알았더니 태욱은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 차를 세우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포장한 음식을 들고 내려 버렸다. 친구를 따라 차에서 내린 훈재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둘러봤다.

    재개발도 쉽지 않을 옛 동네였다. 볼 것이라고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나무 몇 그루가 전부였다. 높은 곳에서 보면 전망은 좋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훈재가 태욱을 돌아보자 그는 성큼성큼 걸어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아는 사람의 집을 찾아가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훈재는 얼른 그를 따라가며 다시 물었다.

    “누구 만나러 온 거냐니까?”

    “보면 알아.”

    태욱이 계단을 오르며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나름 머리를 굴려 보던 훈재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오피스텔 생활이 지겨워 집을 옮기겠다고 하더니 그 부지를 보러 온 것인가. 원룸 건물을 싹 밀고 여기에 큰 주택을 세우면 나름 살 만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동네라, 생활환경이 불편할 것 같다는 앞선 걱정부터 들었다.

    “혹시 여기에 집 세우게?”

    훈재의 물음에 태욱이 뭔 뜬금없는 소리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것도 아니면 뭔데? 여기 누가 살아? 근데, 헉, 도대체 몇 층에 사는데? 혹시 5층은…… 아니지?”

    요즘 운동을 조금 소홀히 했더니 훈재는 4층에서부터 조금씩 숨이 차올랐다. 당연히 태욱도 힘들어해야 하는데 녀석은 기계처럼 계단을 오를 뿐이었다. 일하느라 잠도 안 자면서, 대체 체력은 언제 키운 거야. 정말 미스터리한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태욱은 5층에 다다라서야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집 앞입니다. 몇 호죠?”

    그의 물음에 두 라인 중 왼쪽에서 벌컥 문이 열렸다. 태욱은 그 앞으로 다가가 섰고, 훈재도 그를 따라 뒤에 섰다. 곧 반가운 미소를 지은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팀장님. 여기까지 오…… 뭐야?”

    “당신…….”

    서로를 보고 놀란 지선과 훈재는 얼음이 되었다. 그 둘을 뒤로하고 태욱은 서영의 집 안으로 몸을 들였다.

    부엌에 서 있던 서영은 태욱을 보고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이렇게 집을 공개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들어가도 됩니까?”

    이미 현관에 서 있으면서 그는 뒤늦게 예의를 갖추는 것처럼 물었다.

    “네. 들어……오세요.”

    태욱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다시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한바탕 말씨름을 한 것 같은 지선과 훈재가 동시에 태욱을 바라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근데, 두 사람은 무슨 사이야?”

    태욱은 난처한 표정 하나 없이 대답했다.

    “우리 사귀는 사이라고 아직 말 안 했습니까?”

    그가 오히려 서영에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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