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16화 (16/75)

7. 이렇게 우습게 (1)

늦봄을 만끽하기 좋은 주말이었다. 서영은 원룸 베란다에 쭈그리고 앉아 흩날리는 벚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을 보금자리로 정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베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벚꽃 잔치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맘때였을 것이다. 하루 종일 발품을 팔며 이사할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우선은 회사와 가까워야 했고, 그녀가 가진 예산과도 금액이 맞아야 했다. 하지만 이쪽이 맞으면 저쪽이 마음에 들지 않는 식으로, 생활환경이나 조건들이 모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를 않았다.

귀하디귀한 전세 매물에다가 또 2년 뒤면 이사 가야 할 텐데 뭘 그렇게 까다롭게 고르냐며 부동산 중개인도 거의 지쳐 갈 즈음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김에 들른 장소가 여기였다. 지대가 높은 옛 동네인 데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에 위치한 원룸이었다. 매일 걸어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예산은 조금 아낄 수 있었지만 회사와도 거리가 있었고, 무엇보다 생활하기가 너무 불편했다.

중개인은 그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좋다며 한번 구경이나 하자고 그녀를 이끌었다. 기대 없이 들어간 장소에서 그녀는 무언가에 홀리듯 베란다 앞에 섰다.

흩날리는 벚꽃이 절정을 이룬 모습만으로 모든 게 용서되는 장소였다. 서영이 넋을 놓고 밖을 바라보고 있자 중개인은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이 매물의 장점만을 읊어 댔다.

‘요즘 이런 꽃나무들 한눈에 볼 수 있는 데가 흔한가? 저기 큰 나무들 밑에 보면 정자도 있어요. 이 동네 어르신들 바람 쐬는 곳인데 거기서 낮잠 자면 꿀맛이지. 젊은 사람들 일한다고 스트레스 좀 많이 받아요? 그렇게 힘들 때 힐링이 따로 있어. 이렇게 좋은 공기 마시면서 계절 지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보는 게 최고지. 어디 따로 놀러 갈 필요가 없…….’

‘여기로 할게요.’

더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며, 서영은 중개인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이 집의 명당 자리를 오롯이 즐기고 싶었다. 서영이 꿈꿔 왔던 곳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대학 때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다. 사회 초년생이 되었을 땐 지하 단칸방도 감사해야 할 형편이었으니 지금의 장소는 꿈같기만 했다. 아니, 이곳에 이사 올 때만 해도 모든 꿈을 이룬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이전보다 회사와의 거리가 멀어져 아침잠을 줄여야 했고, 아침저녁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필요 이상의 체력을 소진했으며, 가장 결정적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벚꽃은 단 몇 주만 행복감을 안겨 준 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봄이 지나면 시끄러운 매미 소리와 싸워야 했고, 장마철엔 태풍 때문에 창문을 부여잡아야 했으며, 그나마 단풍을 구경하며 위로받을 수 있는 가을이 지나면 시베리아 벌판 같은 겨울과 맞서 싸우느라 감기를 달고 살아야 했다.

전세니까. 2년만 참으면 된다니까. 그렇게 지난날의 자신을 꾸짖으며 사계절을 보내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서영은 요즘 1년 중 가장 행복한 주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의 5년 짝사랑 강태욱 팀장의 가족을 만나러 가야 하는 날이었다.

태욱이 오늘까지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마무리하고 저녁쯤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들떠 선잠을 자 버렸다.

새벽 일찍 일어난 서영은 계획에도 없던 대청소를 했고, 벚꽃 구경하다가 이른 아침을 먹은 후 또 베란다로 나왔다. 지겨울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꼭 누군가와 닮았다.

서영은 그 사람을 생각하며 잠시 웃었다. 그날 밤, 자신이 했던 미친 짓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키스도 아니고, 볼에 잠깐 입맞춤을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태욱이 자꾸만 그녀를 재미있어하는 게 심통이 나서 벌인 그녀 나름의 복수였다.

그녀 혼자만 좋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의 애인 역할을 해 주면 뭐든 들어준다고 했으니 이 정도는 그도 이해하리라 생각했다.

그날, 마치 혼이라도 낼 것처럼 그녀를 한참 동안 붙잡고 있던 태욱은 아무 일 없었던 듯한 모습으로 돌아와 서영을 집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다음 날, 회사에서 만난 태욱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볼에 입맞춤 한 번 한 게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서영 자신이 생각해도 그랬다.

원 없이 벚꽃을 보다 결국은 태욱을 생각하며 아침을 마무리한 그녀는 배가 조금 출출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인지 쥐가 난 다리를 끙끙거리며 이끌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매콤하고 상큼한 것이 당겨 하부장에서 비빔면을 꺼내는데 침대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나 태욱일까. 서영은 들고 있던 비빔면 따윈 던져 버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침대로 뛰어갔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화면을 확인하는데 예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어쩐지 아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서영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대리님.”

전화를 건 사람은 지선이었다.

― 자기, 헉, 혹시 집이야?

그녀가 헉헉대며 대뜸 물었다.

“네. 지금 집인데…….”

띵동띵동. 전화 너머로 그녀의 집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그녀의 집 초인종이 울리는 것이었다. 서영은 놀라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밖을 확인하자 핸드폰을 들고 서 있는 지선이 보였다. 그녀는 손부채질을 하며 땀을 닦고 있었다. 서영은 얼른 문을 열었다.

“대, 대리님.”

“어, 자기. 집에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지선이 그녀를 보며 누구보다 밝게 웃었다.

“아고. 일단 나 좀 들어갈게.”

좁은 현관을 막고 서 있는 서영을 뒤로하고 지선은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부엌을 찾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미안한데, 나 물 좀.”

“아, 네네.”

서영은 지금 벌어진 일에 놀라 멍하니 있다가 얼른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라서는 지선에게 건네주었다. 차가운 물을 받자마자 시원하게 원샷을 한 지선이 그제야 살겠다는 표정으로 서영을 바라봤다.

“목적이 다이어트야?”

“네?”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집. 그 목적 아니면 뭔가 해서.”

“아…….”

서영은 그제야 그녀의 물음을 이해하고 웃었다. 모두들 처음 이 집에 방문했을 땐 지선처럼 황당해했다. 이사를 하고 가족을 초대했을 때도, 친한 동창들을 불렀을 때도, 다들 같은 소리를 했다.

일부러 여기를 고른 거냐고.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게 만들려는 고단수 수법이냐는 질문을 들었을 땐 어떻게 알았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명당 자리를 보여 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빨래라도 해 주고 가겠다며 베란다 쪽으로 들어서려 하면 갖은 이유를 가져다 대며 막아섰다. 이곳을 혼자만 알고 즐기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서영은 드러내는 것보단 감추는 데 더 익숙했다. 나만의 공간. 비밀 일기. 아무도 모르는 짝사랑.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젠 한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다 실망하는 감정까지 경험하는 중이었다.

“자기, 여기서 이사 안 하면 남자 사귀긴 글렀다.”

지선은 아직도 숨이 찬 목소리로 충고했다.

“그렇게 많이 힘들어요? 전 이제 적응해서 괜찮은데.”

서영은 오히려 지선을 이상하게 보며 웃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처음엔 죽을 만큼 힘들던 계단 오르기를 이젠 숨조차 차지 않고 손쉽게 세 칸씩 올랐다. 체력을 소비한다고 생각했던 일이 체력을 단련시켜 준 것이었다. 이 집을 선택해서 좋은 점이 하나 더 생겼다.

“가끔 보면 자기도 참 희한하다니까.”

“지금, 대리님처럼요?”

서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받아쳤다. 그녀가 이곳에 불쑥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 아직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래 즉흥적인 면이 있긴 했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 그동안 서영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던 것도 아니었고, 몇 번 집 앞까지 태워다 준 게 전부였다.

5층에 산다는 소리에 그럼 올라갈 일 없다며 딱 잘라 말했던 사람이 지선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한 손엔 장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연신 땀을 닦으면서까지 서영을 만나러 온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유력한 이유가 떠올랐지만 서영은 지선이 본인의 입으로 말해 주길 기다렸다.

“그래. 맞아. 싸웠어. 우리가 결혼을 약속하며 정한 룰이 있는데 부부 싸움을 하면 공평하게 너 한 번, 나 한 번, 번갈아 나가기로 했거든. 그런데 오늘 내가 나가는 날이더라고. 망할…… 아, 미안. 자기한테 욕한 거 아니다.”

이렇게 자주 싸우는 게 결혼 생활인가. 서영은 지선이 신기하면서도 대단해 보였다. 마치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힘겨루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 아니던가.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뭐 그런 충고 하면 나, 자기 다신 안 본다. 졌는데 어떻게 이겼다고 생각하라는 거야? 애초에 말부터가 이상하잖아. 나도 꼭 모든 일에 이길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다 받아 줄 맘도 없어. 이건 맞춰 가야 하는 일이라고.”

“아무리 말하셔도 결혼도 안 한 제가 이해하겠어요?”

서영은 한 번씩 핵심을 찌르곤 했다. 지선은 그 말엔 동의한다며 웃었다.

정말 여기까지 찾아올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요리를 거부한 훈재가 슬그머니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잡는 순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요리가 취미인 지선은 주말엔 무조건 한 끼는 집밥을 해 먹어야 했다. 하지만 그 취미가 맛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처음 몇 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맛있다며 음식을 다 먹어 주던 훈재가 어느 날 진지하게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맛집이니 음식을 시켜 먹자고.

그렇다면, 알겠다고.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는 대신 당신이 환장하는 침대에서 하는 놀이는 주말 동안 쉬는 게 어떠냐고 맞받아쳤다.

훈재는 그것과 그게 어떻게 같으냐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말 잘하는 변호사답게 여러 가지 판례를 가져와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길로 지선은 집을 나와 마트에서 장을 봤다. 어디서든 요리를 해야 이 울분을 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나는 사람은 서영뿐이었다. 그녀라면 자신의 요리를 난도질하듯 평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지선은 이 5층까지 기다시피 올라온 것이다.

“이번에는 뭐 때문에 싸우신 건데요?”

서영의 물음에 지선이 가져온 장바구니를 열며 짧게 대답했다.

“요리.”

설마. 지금 여기서 요리를 하겠다는 소린가? 그런 물음을 담은 눈빛으로 서영이 쳐다보자 지선이 최대한 착하고 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자기가 내 요리 먹어 보고 싶다 했잖아. 나, 진짜 많이 발전했다니까?”

왜 요리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선은 자신이 정복하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이렇듯 매달리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이제껏 자신이 목표한 것을 모두 이뤘다. 회사에서도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영업 팀 에이스로 활약을 했고, 자꾸 눈에 거슬리는 남자를 아예 자신이 차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요리는 아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란 자신의 좌우명을 철저히 실천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 저녁에 약속 있는데 거기서 토하고 싶지 않아요.”

솔직한 대답에 지선이 서운한 눈빛을 했다.

“자기까지 이럴 거야? 알았어. 그럼, 부엌만 빌려줘. 내가 요리하고 내가 다 먹을 테니까.”

지선의 풀 죽은 부탁에 서영은 더 이상 거부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선도 평일 내내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요리라는 취미로 푸는지도 모르겠다. 서영이 이 집의 베란다에 앉아 멍하니 벚꽃을 구경하는 것처럼.

각자의 힐링 포인트는 달랐지만 모두 행복해질 권리가 있었다. 특히나 제 주변 사람들은 더더욱 그랬으면 좋겠다. 그녀는 기꺼이 지선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주었다.

“근데 저녁 약속 상대가 누구야?”

재료 손질을 하던 지선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비밀이요.”

지선과 마주 앉아 콩나물을 다듬던 서영은 당황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동안 태욱과 자주 부딪치면서 조금 대담해진 것 같기도 했다.

“오호. 비밀이라. 그러니까 더 궁금한데?”

지선이 눈을 흘겼지만 서영은 넘어가지 않으려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시금치도 씻으면 되죠?”

“응. 땡큐.”

서영이 싱크대에서 시금치를 씻고, 지선이 남은 콩나물을 마저 다듬을 때였다. 식탁 위에 놓인 서영의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서영은 놀라 고개를 획 돌리고 지선을 바라봤다. 사태를 파악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지선이 서영의 핸드폰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강태욱…… 팀장인데?”

지선이 씨익, 악마 같은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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