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귀는 사이니까 (2)
손 회장의 책상 위로 파파라치 사진들이 떨어져 내렸다. 차 문을 열어 주고,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남자에게서 그가 알던 손자 강태욱의 모습은 없었다. 헛웃음을 터뜨린 필성은 앞에 선 윤창수 변호사를 올려다봤다.
이 집안 일만 30년이었다. 은퇴할 나이가 지났음에도 손 회장이 그를 옆에 붙여 두고 있는 건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으며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을 지킨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이미 장남의 아들인 철민이 윤 변을 자신 쪽으로 포섭하기 위해 수차례 물밑 작업을 했다는 걸 손 회장은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윤창수는 자신이 모시는 분은 손필성 회장 한 분뿐이라는 말만 꺼냈다고 한다. 그는 이제 갑자기 쓰러져 유명을 달리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기에 이자의 지나친 충성심이 때론 아집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두 수를 앞서 내다보는 걸지도 모른다. 손필성이 사라진 유신그룹의 미래에 대해서. 그 자리를 차지할 인물로 장남의 하나뿐인 외동아들 손철민이 유력하지만 그는 유신을 제대로 이끌어 갈 재목이 아니라는 평가를 이미 마음속으로 내렸을 수도 있었다.
필성의 자리는 가져다주는 정보를 듣고 결정을 내릴 뿐이었다. 진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그 문제를 직접 파서 알아낸 윤창수라는 소리가 되었다. 그에게 일부러 태욱의 신변을 알아보라고 시킨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손철민이 아니라면 강태욱은 가능성이 있는가. 이제 그가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일지도 몰랐다. 언제나 힘으로 해결하려는 옛날 방식도 믿을 수 있는 체력이 뒷받침될 때나 가능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쇠약해졌다. 그걸 이 집안 사람 중 모르는 이가 있을까. 필성은 점점 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진짜란 소리야?”
사진만으론 전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강태욱이 어떤 놈인데. 어쩔 땐 그보다 더 위에 서서 자신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이 집 안에서 겪은 치욕과 참아 온 복수심 때문이란 걸 알았다.
손 회장은 그게 태욱에겐 오히려 득이 될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가 ‘손’이 아니라 ‘강’으로서 회장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손’의 피가 아니라고 여길 사람은 태욱 본인 말고 아무도 없었다. 먼저 떠난 아들은 영원히 풀어지지 않을 한으로 남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필성의 마음은 태욱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걸 앞의 윤창수가 모를 리 없었고. 손 회장은 윤창수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진짠들, 가짠들,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강 팀장이 이렇게 도전장을 내민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꾸민 일이라고 해도 여러 가지로 손해가 큽니다. 게다가 같은 신사업 팀에서 근무하는 직원이라, 회사에 금방 소문이 퍼질 겁니다. 손 이사 쪽에서야 단비 같은 이슈죠. 어떻게든 일을 크게 만들어서 강 팀장이 더 이상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윤창수의 시나리오를 들으며 손 회장은 다시 사진 한 장을 들어 올렸다. 태욱이 어쩐 일로 웃고 있었다. 태욱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서도 그의 주변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탐욕 따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손 회장은 신경질적으로 사진을 던져 버렸다.
“멍청한 새끼.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만든 거야!”
“건양 쪽에서도 분명 이 일을 걸고넘어질 겁니다.”
“뭐? 감히 주제도 모르고! 막내딸 바람기 잡아 달라고 사정사정해서 내 열 번 접고 혼사를 추진하겠다고 했거늘. 핏줄 단속도 못 시켜서 남자 새끼랑 나뒹구는 걸 걸려 놓고선 이제 와서 적반하장이야? 어디 한번 해 보라고 해. 내가 다시는 그 건양 나부랭이들이랑 말을 섞나.”
“회장님.”
창수는 처음부터 이 일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손 회장의 잘못이란 걸 충고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것이 필성의 문제점이었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 외에는 보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 태욱이 앞장서서 유신을 끌고 가고 있지만 손 회장의 굳은 방식으로는 이제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물며 핏줄의 혼사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필성은 이번에 제대로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 태욱이 여자를 더 알아봐. 집안이나 평소 행실 같은 거. 내가 한번 보자고 했으니 조만간 데리고 올 거야. 보면 알겠지. 거짓말인지, 진짠지. 그놈이 이제…… 내 무덤까지 파 놓고 쓰러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구나. 허허.”
필성은 머리가 아파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다른 한 손으론 창수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그럼, 쉬십시오.”
문을 닫고 나온 창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비록 지는 해일지라도 관록이 있는 손 회장이 손자를 꺾을 것인지, 아니면 그 단단하던 손필성을 기어이 무너뜨리는 새로운 인물이 탄생할 것인지. 그걸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결론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 ◇ ●
“네. 알겠습니다.”
태욱은 전화를 끊고 옆에 앉은 서영을 바라봤다.
손 회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그녀의 집 앞에 거의 도착할 즈음이었다. 태욱은 잠시 차를 세우고 전화를 받아야겠다고 말했다. 서영은 그럼 자신은 이만 내려 걸어가겠다고 했지만 태욱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태욱은 전화를 받았고, 짧은 몇 마디만 주고받은 뒤 금방 통화를 마쳤다.
“할아버지세요.”
“아…….”
그제야 태욱은 서영을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워낙 성격이 급하신 편이라. 이번 주말 괜찮겠어요?”
“네? 그, 그렇게 빨리……. 음, 어쨌든 뵙긴 뵈어야겠죠.”
서영이 걱정하고 있다는 게 표정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태욱도 점점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잠깐 얼굴만 뵙고 나올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태욱의 말을 듣고 나자 서영은 걱정이 조금은 수그러드는 듯했다. 어차피 그가 그녀에게 어떤 역할을 원하고 이 일을 꾸민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신인데 연극이나 거짓말이 가당키나 할까. 서영은 그냥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네. 무슨 일 생기면 뭐, 팀장님이…… 책임지시겠죠.”
서영이 그녀답지 않게 웃어넘겼다. 태욱은 생각지 못한 그녀의 태도에 잠시 어이없는 미소를 보였다.
믿고 맡기겠다는 것인지, 안 되면 혼자서 도망치겠다는 건지. 헷갈리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녀와 이런 작당 모의를 하는 게 스릴 있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동안 태욱은 회사에 몸 바쳐 일하느라 연애 같은 건 사치라고 생각하며 아예 제쳐 두고 살았다. 결혼한 훈재가 뒤늦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번 만나 보라며 억지로 사진을 들이밀 때도 마음에선 아무런 반응도 일지 않았다. 급기야 주인을 잘못 만난 네 얼굴과 몸이 아깝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그도 자신의 인생이 조금 허무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여자에 대한 특별한 거부 반응이나 사랑을 믿지 않는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존경했고, 언젠가 그도 그런 사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연한 꿈일 뿐 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여자가 이제껏 없었으니까.
“내가 어디까지 책임질 줄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해요?”
태욱의 뒤늦은 대꾸에 서영이 그를 바라봤다. 차에서 내릴 타이밍만 보고 있는데 이 남자는 자꾸만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고.
이제 조금은 편해진 줄 알았는데 서영은 오히려 전보다 더 긴장되었고 가슴속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이제 그런 말 하셔도 안 쫄아요.”
서영이 단단히 일렀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태욱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암튼, 그만 놀리세요. 요즘 그 재미로 사시는 거, 눈에 다 보이거든요. 저도 사람이라서 한 번씩은 기분 안 좋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서영이 다다다 말을 뱉고 차에서 내려 버렸다. 그녀 딴에는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게 흡족해서 슬쩍 미소 지으며 원룸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뒤쪽으로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오늘 초밥 고마웠어요.”
서영은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사람을 너무 잘 다뤘다. 그래서 그녀가 속절없이 빠져 버렸고,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다시 덫에 걸린 것이다. 모든 걸 그의 탓으로만 돌리고 싶어 서영은 주먹을 불끈 쥐고 몸을 돌렸다.
“진심이세요?”
불쑥 그런 물음이 나와 버렸다. 태욱은 잠시 웃더니 그녀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서영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것처럼. 모두 욕심이 불러온 망상이었다. 서영은 주먹을 더 꽉 쥐었다.
“거짓말 같아요?”
그가 웃음을 지우며 물었다.
“연극하자고 하시니 이것도 그런 건가 싶어서. 아, 뭐…… 제가 당연한 걸 물었네요. 죄송합니다.”
“헷갈려요?”
태욱이 물러나지 않고 파고들었다. 서영은 그를 잠시 바라봤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아뇨. 팀장님은 그러실 분 아니란 거 알아요. 저도 조심할게요. 할아버님 뵈러 가려면 그래도 나름 연인처럼 보여야 하는데 이렇게 하나하나 헷갈려 하고. 좀 웃기죠? 앞으로는 더 능숙하게 잘해 볼게요.”
서영이 말을 이을수록 어쩐지 태욱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도대체 이 남자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요. 노력해 봅시다.”
짧게 대답한 태욱이 흐린 웃음을 머금고 돌아서려는데 이번엔 그녀가 그를 불렀다.
“팀장님.”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저, 한 번쯤은, 이란 생각도 들었고, 오늘이 아니면 영영 못 할 것 같기도 했다.
한 발 앞으로 다가선 서영은 발끝을 올리고 태욱의 볼 근처에 쪽, 하고 입맞춤을 남겼다. 불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감행한 이는 태욱이 아니라 서영이었다.
“……사귀는 사이니까. 이 정돈 하는 게 맞겠죠? 그럼.”
서영이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듯 벗어나려는 순간, 당연한 것처럼 단단한 손에 팔이 붙잡혔다. 태욱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좀 더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나. 그런데 왜. 서영은 억울해 그와 시선을 맞췄다. 태욱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숨이 막힐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