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14화 (14/75)
  • 6. 사귀는 사이니까 (1)

    서영이 눈앞에 보이자 비죽, 웃음이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태욱을 보자마자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이러고 있을 줄 몰랐다는 것처럼. 사무실로 돌아온 건 그를 보기 위한 게 아니었나.

    태욱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는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초밥집 봉투가 보였다. 평소 해치우듯 끼니를 해결하는 그가 가장 자주 먹는 메뉴였다. 당연한 것처럼 봉투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점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향한 그의 시선을 느낀 서영은 얼른 봉투를 등 뒤로 감추었다. 태욱에게서 다시 웃음이 터졌다. 행동이나 감정이 눈에 훤히 보이는 여자라 재미가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더 다가가도록 만들었고, 그 어리숙함이 생각지도 못한 기쁨을 주었다.

    바로, 지금처럼.

    “나 주려고 사 왔어요?”

    태욱이 서영에게로 다가서며 물었다.

    “아, 그게…… 제, 제가 먹을 거예요.”

    거짓말도 어쩜 이리 못 하는지.

    “윤 대리, 생선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아, 그랬는데 이번만…….”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서영은 단 한 번의 유도심문에 곧장 거짓말이 들통나 버렸다. 잠시 태욱을 노려본 그녀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기 싫다는 것처럼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곧 무언가를 찾는지 이곳저곳을 뒤졌다.

    서영이 찾아낸 것은 접이식 우산이었다. 비가 오나. 태욱은 뒤돌아 창가 쪽을 바라봤다. 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늦은 도시의 밤을 적시고 있었다.

    정말 우산이 필요해 들른 건가. 그렇다면 서지훈 차장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소리가 되었다. 태욱은 그것이 뭐라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또 서영을 지켜보는 지금 순간에는 두통이 찾아오지 않았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밖에 비 많이 와요. 팀장님도 어서 마무리하시고 들어가세요.”

    태욱의 앞까지 다가온 서영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그녀의 손에는 초밥집 봉투가 들려 있었다. 정말 그의 몫이 아닌 건가.

    태욱은 서운함마저 느꼈다. 오늘 아침 그녀를 위해 샌드위치를 주문하느라 수많은 시선들을 감내했는데. 생색을 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그냥 서영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머리가 아파서 일을 많이 못 했어요.”

    태욱이 잘 들어가라는 인사 대신 자신의 상태를 알렸다.

    “……네?”

    서영이 계획대로 돌아봤다.

    “마침 가지고 있던 두통약은 다 떨어졌고.”

    그의 말에 서영은 잠시 고민하듯 서 있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초밥 봉투와 우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녀는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곧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표정이 밝았다. 태욱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심장 쪽이 간지러웠다.

    “여기, 두통약이요. 저번에 비상용으로 사 둔 게 있었어요.”

    서영은 다행이라며 태욱에게 두통약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아 들 생각은 하지 않고 잠자코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시선을 느낀 서영이 고개를 들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이내 제 할 말만 했다.

    “우선 하나만 드셔 보시고, 괜찮다 싶으면 더 드시지 마세요. 두 개까지는 괜찮은데 빈속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아요. 팀장님 분명히 저녁도 거르시고…….”

    서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차라리 그를 위해 사 왔다며 초밥 봉투를 내미는 게 덜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었나 싶었다. 야근하고 있을 태욱이 마음에 걸려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그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초밥을 사 가지고 사무실로 올라오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늘 그의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고 모든 생각의 회로가 꼬여 버리는 것만 같았다.

    “누가 사 온 초밥 보니까 더 배고프긴 하네요.”

    태욱이 놀리듯 서영을 바라봤다.

    “……이거 드세요.”

    서영은 조용히 봉투를 내밀었다.

    “윤 대리 먹는다면서요?”

    “거짓말이었어요.”

    그녀가 이실직고해 버렸다.

    “같이 먹읍시다.”

    “네?”

    태욱은 서영의 손에서 봉투를 빼앗아 들고 탕비실로 향했다. 그녀가 거절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행동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서영은 태욱을 따라 탕비실로 들어섰다. 냉장고에서 음료수 두 개를 꺼내 온 그는 테이블 위에 늦은 저녁을 차렸다.

    서영은 어쩐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훈과의 대화가 불편해 저녁을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밥조차 거르고 일한 태욱보다야 자신이 나았다.

    모두 그가 대단하다고만 했지, 그가 얼마나 힘들게 본인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다크서클 하나 내려오지 않는 그의 지독함을 신기해할 뿐, 그가 무엇을 참아 내는지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았다.

    서영이 사 놓아둔 두통약도 사실 태욱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탕비실 냉장고에 쓰러지듯 기대앉아 통증을 참아 내던 날 이후, 그녀는 늘 태욱의 표정을 신경 쓰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엔 모든 종류의 두통약을 그녀의 서랍 깊숙이 넣어 두게 되었다.

    어쩌다 한 번씩 탕비실 약상자가 빌 때면 부리나케 채워 넣었다. 알아 달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태욱이 덜 힘들었으면. 언제부턴가 그를 향한 서영의 마음엔 걱정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눈부신 면보다 감춰진 인내심에 더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열심히 살면, 당신이 얻는 건 무엇인가요?’

    ‘언제 가장 행복해요?’

    ‘행복할 순간마저 놓치고 살지는 마세요.’

    주제넘은 생각들이 넘칠 때면 서영은 그를 바라보지 않고 잠시 짝사랑을 쉬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끝낼 순 없었다. 다시 돌아가 버리는 마음. ‘사랑’이라는 독한 속성을 그녀는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태욱이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

    “아, 네.”

    서영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젓가락을 들었다. 태욱이 좋아하는 흰살생선 쪽은 손도 대지 않고 계란말이나 새우만 몇 개 입으로 가져갔다. 서영이 먹기 시작하자 태욱도 젓가락을 들었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평소보다 그의 식사 속도가 빨랐다. 서영은 그게 흐뭇하면서도 짠했다.

    “여기…… 요즘 배달도 한대요.”

    서영의 말에 태욱이 고개를 들었다.

    “저녁 꼭 챙겨 드시라고요. 지금은 괜찮으실지 몰라도 나중에 고생하세요. 저희 아버지도 젊었을 때 밥도 못 먹고 일하셨대요. 그게 지금 위장병의 원인이 돼서 늘 후회하세요.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 거라고…….”

    태욱은 잠시 먹는 것도 멈추고 서영을 빤히 바라봤다.

    “아…… 제가 좀 말이 많았죠? 죄송해요. 얼른 드세요.”

    “앞으론 윤 대리가 나랑 먹어 주고 퇴근하면 되겠네.”

    “……네?”

    “그래야 빨리 회사에 소문도 돌고, 내 파혼 문제도 해결될 것 같은데.”

    “아…….”

    서영은 순간 무언가를 기대한 자신의 마음이 우스웠다.

    “그래서 오늘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뭘요?”

    “우리 집 어르신이 윤 대리를 보자고 하세요.”

    “저, 저를요? 왜요?”

    상상조차 못 했던 일처럼 서영이 놀랐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보고 싶어 한단 소리예요. 시간 끌어 봤자 좋을 거 없으니까, 큰 산부터 빨리 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렇죠. 그러려고 우리가 이러고 마주 앉아 있는 건데. 그리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서영은 태욱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대단해 보였다.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꾸미고 행동까지 취하다니. 그녀로선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서영은 걱정부터 앞섰다. 아무리 연극이라고 해도 태욱의 가족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그녀는 금방 정리되지 않았다.

    “뭘 하려고요?”

    “네?”

    태욱은 어느새 초밥을 다 비우고 포장 용기를 정리하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할아버지만 만나 주면 됩니다. 뭐 그 전에, 우리 집 가족 관계부터 설명을 해야겠네요.”

    태욱은 간단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혼자 날 키우셨고. 그렇다 보니 여러 사정상 할아버지가 계신 본가로 들어가게 됐어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다시 말하면 내 혼사에 최고 권력을 쥔 실세는 할아버지란 소리가 되겠죠?”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무수한 소문들로만 떠돌았다. 유신 회장의 숨겨 둔 손자라느니, 배경 좋은 집안의 외동아들인 게 틀림없다는 말까지. 여러 가십들이 나돌았지만 그 안에 일찍 아버지를 여읜 상처가 있는 남자라는 얘기는 없었다.

    “음…… 동정을 바라고 말한 건 아닌데.”

    태욱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서영의 표정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그게…… 동정이라뇨. 그냥, 힘드셨을 것 같아서…….”

    서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에겐 이런 말들도 어쩌면 상처를 모르는 이들이 건네는 껍데기뿐인 위로일 수 있었다. 태욱은 이미 수백 번 겪어 본 반응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서영의 마음을 더 안타깝게 만들었다.

    “힘들었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저녁도 못 먹고 야근 중이었잖아요?”

    태욱은 어깨를 으쓱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영은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갑시다. 태워 줄게요.”

    탕비실 문을 열며 태욱이 말했다.

    “네? 아뇨.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직 일도 남으셨는데, 전 앞에서 택시 타고 가면…….”

    서영이 급하게 거절하자 태욱이 도로 문을 닫고 나란히 서 있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서영은 그의 행동 중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때가 가장 힘들었다. 피하지도 못한 채 그녀는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태워 주세요, 해 봐요.”

    “네?”

    태욱이 뜬금없이 말했다.

    “그 말 들으면 두통이 사라질 것 같아서.”

    거짓말. 그래, 원래 이런 데 능통한 남자였다. 하지만 눈빛은 진심 같았다. 그래서 서영은 헷갈렸고, 그가 미워졌고, 또 그만큼 좋아져 버렸다. 이렇게 그녀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흔들 수 있는 남자는 위험했고, 피해야 했으며, 어쩌면 이런 웃기지도 않는 연극 놀이에 동참하라는 제안에 예스라고 말한 걸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노’라고 말할 기회를 놓친 그녀였다.

    “그렇게…… 태워 주고 싶으시면, 그러세요.”

    하. 태욱에게서 헛웃음이 터졌다. 서영도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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