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13화 (13/75)
  • 5. 끝도 이미 정해진 관계 (3)

    서영이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부터 그랬다. 그를 보고 놀라 잠깐 뒷걸음질 쳤으면서,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당당하게 고개를 드는 행동이 귀여웠다. 점심을 먹었느냐는 질문에 곧장 오늘 구내식당에서 먹은 메뉴들을 읊었을 땐 잠시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이렇게 시시한 것에 시선이 온전히 붙잡힐 일인가. 태욱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서영에게 저녁 약속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잠시 서운하기도 했다. 혼자 먹은 저녁이 얼만데. 또한 오늘은 출장의 여파로 야근까지 예고되어 있었다. 그녀와 여유롭게 저녁을 먹을 시간 따윈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워져 버렸다. 마주 보고 밥을 먹은 게 몇 번이나 된다고. 일련의 감정들이 다 장난 같아 태욱은 그저 웃어넘겼다.

    애초에 진지해질 생각조차 없이 꺼내 든 계약 만남이었다. 나는 내가 필요한 걸 얻고, 너도 네가 원하는 걸 가져가라. 그 이후에 우리의 관계는 깔끔하게 끝내면 된다. 마지막까지 예고해 둔 정확한 계약이었다. 그녀가 흔들린다고 해도 그는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손 영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유치한 연극일 뿐이었다.

    잠시 헛웃음을 내놓은 태욱은 곧장 표정을 지우고 언제나처럼 차갑고 서늘한 강 팀장으로 돌아갔다. 신사업 팀 안으로 들어선 그는 어디에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서영의 저녁 약속 상대가 지훈이란 것을 알았을 때 태욱은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서지훈 차장이 윤서영이란 여자에게 부서 팀원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챈 때문이었을까.

    당연히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영의 눈길은 그에게 꽂힐 때가 많았고, 태욱은 헷갈렸다. 그러다 서영이 그에게 고백한 순간, 안심했다. 서지훈이 아니라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실한 고백 앞에서 승리감을 느꼈다. 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남자 새끼니까. 이유는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티 나는 서영의 눈길이 싫지 않았다. 그가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면 놀라던 그녀의 반응이 재밌기도 했고, 욕심조차 담기지 않은 오롯한 호감이 지친 그에게 힘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힘내세요, 팀장님.’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출장을 다녀와 공항에서 곧장 출근한 어느 날은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였다가, 점심까지 거르고 회의 자료를 볼 때면 ‘배 안 고프세요?’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모두 같은 눈빛이었지만 또 조금씩은 달랐다. 어느새 그것이 그에게 위로가 되는 줄도 모르고.

    태욱은 퇴근 준비를 마친 뒤 지훈과 다정하게 웃으며 사무실을 벗어나는 서영을 지켜봤다. 마음만 먹으면 어깃장을 놓을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돌아갈 곳을 잘라 내 버린다면 그것만큼 이기적인 게 또 있을까.

    그는 요 며칠 자꾸만 감정적으로 변하는 자신을 반성했고, 더 이상 서영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태욱은 쌓여 있는 검토 자료로 시선을 내렸다. 곧 그의 미간이 좁혀졌고 한 곳으로만 신경을 집중했다.

    ● ◇ ●

    “……뭐?”

    “……모르셨구나. 차장님은 알고 계실 줄 알았어요.”

    서영은 마치 업무 보고를 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손수 검색해 예약한 저녁 장소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한 주먹만 한 스파게티를 예쁜 그릇에 담아 내놓는 먹는 맛보다 보는 맛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었으며, 음악과 은은하게 풍기는 향까지. 데이트 코스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커플들이었다. 지훈은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흥분해 있었다. 진작에 이런 곳으로 데려올걸.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너무 망설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삼아 서영에게 좀 더 가깝게,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감정으로 다가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메인 메뉴가 나오기도 전에 꺼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그런 줄은…… 그랬구나.”

    지훈은 앞에 놓인 물잔을 다급하게 들어 올렸다. 서영의 고백은 간단했다.

    ‘저, 강 팀장님…… 좋아해요.’

    이제 와서, 그것도 그가 억지를 부려 만든 자리에서 작정하듯 꺼낸 말은 허무한 웃음을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의 감정을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고백조차 차단해 버리겠다는 잔인한 거절의 방식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은.

    “뭐, 회사에서 그런 사람이 한둘인가요. 아무튼 차장님한테 말하고 나니까 속은 후련해요.”

    서영이 한숨을 내놓으며 웃었다.

    “강 팀장은 알아?”

    지훈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한 채 물었다.

    “네.”

    서영은 또 짧게 대답했다. 아무 일 아니라는 것처럼. 지훈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가 서영의 마음을 몰랐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항상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그건 동경이라 생각했다. 그가 아는 윤서영은 강태욱을 정말로 욕심낼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자신에게 말하는 이유는 뭘까.

    “퇴사 번복한 것도 그 때문이야?”

    이건, 묻지 말아야 할, 그러니까 그의 옹졸함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지훈은 참을 수가 없었다. 서영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고 해도, 지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여자였지만, 그는 이미 그런 여자를 마음에 품어 버렸다. 쉽게 감정을 접을 수가 없었다.

    “차장님께 다 설명드리지 못하는 거…… 이해해 주세요.”

    “뭔가 있긴 있나 보네.”

    지훈이 날카롭게 말을 뱉었다.

    서영은 잠시 지훈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태욱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고백한 건 혹시나 모를 오해를 처음부터 잘라 내기 위해서였다. 태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와 계약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남자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그는 괜찮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괜찮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누구보다 짝사랑의 감정에 대해 가장 잘 알았다. 만약 지훈이 그녀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지금 그녀와의 관계는 계약에 의한 것이라 처음부터 선을 긋는 태욱처럼. 서영은 그래서 마음을 비우기 쉬웠고, 감정이 가벼워졌다. 단지 그녀의 긴 짝사랑에 대한 위로로 그와의 추억을 남기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그녀에게 주어졌고, 끝도 이미 정해졌다.

    “주제넘은 말일지 모르겠지만…… 강 팀장, 일적으론 완벽할지 몰라도 사적인 감정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야. 특히나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을 힘들게 할 스타일이지.”

    “……그런가요.”

    서영은 지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그게 선배로서 후배를 걱정하는 마음이든, 좋아하는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아 속 좁게 이간질하는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녀도 이젠 강태욱이란 남자를 어느 정도 알게 되어 더 이상은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

    “좋아한다니, 이미 결혼에 파혼 소식까지 알고 있을 테지만…… 그 뒷이야기가 간부들 사이에서 시끄러워. 강 팀장이 손 이사 경쟁 상대라는 건 윤 대리도 알 테고. 그러니 손필성 회장의 숨겨 둔 손자라는 소문도 도는 거겠지. 이번에 결혼하기로 한 여자가 건양물산 막내딸이라는 걸 보면 손자가 아니라도 빵빵한 뒷배경을 갖고 있는 건 이미 확인된 거 아니겠어? 그런 남자가…….”

    “차장님.”

    서영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지훈을 불렀다.

    “그래. 내가 치사해 보이지?”

    그는 인정하듯 웃어 버렸다.

    “이런 말로 윤 대리, 아니, 서영이 네 마음 정리될 거라고 생각한 것부터 내가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란 거, 증명하는 것일 테니까.”

    “차장님.”

    결국,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영은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애초부터 태욱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지훈의 마음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 건 그녀 자신이 되어 버렸다. 마주 볼 수 없는 사랑이란 건 어쩔 수 없이 한쪽을 우스운 꼴로 만들고 말았다.

    “알았어. 그만할게.”

    “죄송해요, 선배.”

    “아니, 사과하지 마. 네가 왜 사과를 해? ……어차피 다 알게 될 감정이었잖아. 너도 숨기지 못하고, 나도 숨길 수 없는걸. 지금은 너한테 미안하다, 죄송하다,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그건…… 네가 이해해 주라.”

    끝을 맺듯 결론을 내린 지훈은 메인 메뉴가 차려지자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시작했다.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 없어 서영은 물잔만 들었다.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지훈에게서 그녀 자신의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 ◇ ●

    쌓인 자료가 반 정도 줄어들 즈음 두통이 찾아왔다.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지만 요즘은 좀 괜찮아지나 싶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은 쥐고 있던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게 만들었다.

    태욱은 안경을 벗고 머리를 등받이에 기댔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하나, 둘 숫자를 세면서 통증이 사라지길 기다렸지만 이번엔 스쳐 가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당연했다. 출장 일정을 무리하게 당겼고, 다녀와서도 제대로 잠든 기억이 없었다. 철야를 하고도 끄떡없어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그는 그 부족한 잠 때문에 두통을 친구처럼 달고 살아야 했다.

    태욱은 감았던 눈을 뜨고 늘 두통약을 넣어 두는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역시나, 빈 통만 남은 채였다. 탕비실에서 비상약이라도 꺼내 먹어야 하나 잠시 생각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이상하도록 의욕이 없고 마음도 가라앉았다. 이유는 하나로 모아지는 것 같았지만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 고집스럽게 자료를 보는 일에 매달렸다. 그게 두통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태욱은 쿡쿡 찔러 대는 듯한 통증에 관자놀이를 검지로 누르며 다시 의자에 몸을 뉘었다. 방금 스치듯 확인한 벽시계의 시간은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헤어졌으려나. 7시쯤 밥을 먹기 시작하면 넉넉잡아 한 시간, 커피라도 마시면 두 시간. 데려다주는 것까지 거절하지 않는다면 서영은 지금쯤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전화라도 해 볼까. 통화가 연결되면 무슨 말을 하지. 평소에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던 생각들이 찾아들자 태욱은 자신이 더욱 우습게 느껴졌다. 차라리 질투 난다는 말을 하는 게 더 그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 갑자기 사무실 입구 쪽에서 작은 불빛이 들어왔다. 누군가 신사업 팀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태욱은 한 시간 전쯤 자신 혼자만 남아 있다는 것을 분명 확인했다. 누가 물건을 놓고 간 건가. 확인도 할 겸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참에 탕비실에 들러 두통약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 누군가와 대치하듯 마주 본 채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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