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12화 (12/75)

5. 끝도 이미 정해진 관계 (2)

[같이 출근합시다. 집 앞으로 데리러 갈 테니.]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 서영은 자신이 여전히 꿈을 꾸는 건 아닌지 눈을 비벼야 했다. 오전 6시 4분. 분명 오늘 새벽에 보내온 문자가 맞았다. 왜 이러는 거야, 대체. 그녀는 큰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연극 놀이를 허락하긴 했지만 그녀에게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는 당장 오늘 아침부터 일을 진행하겠다는 듯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상대가 먼저 이끌어야 따라오는 타입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했을 테니.

서영은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러나 칫솔에 치약을 짜는 순간 불쑥 반항심이 일었다. 고분고분 따라다니는 척하다가 확 폭탄을 던져 버릴까. 그가 물었던 것처럼 미친 척 잠자리부터 원한다고 말할까. 허나 그런들, 강태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수룩한 여자 하나 상대하는 것쯤 그에겐 쉽겠지. 서영은 포기하듯 칫솔질을 시작했다. 가짜 애인 역할은 도대체 어떤 일을 말하는 걸까. 도통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남자를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으니 그녀에게 연애라는 건 어려운 분야였다. 그런데 그걸 연극까지 해야 한다고? 차라리 꼴도 보기 싫다고 욕을 듣고 부서 이동 당하는 게 속은 편할 것 같았다.

“나으하테 에 그래에 저마알!”

칫솔을 입에 문 채 서영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때 문밖에서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서워. 차라리 5년 전으로 돌아가는 게 나았다. 강태욱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 따윈 없었을 테니까.

“아침은 했습니까?”

이렇게 다정하게 굴지 말라고, 그 부탁부터 해야 하나 싶었다.

서영은 밖에서 20분이나 기다리게 만든 부하 직원에게 온화한 얼굴로 아침 식사를 챙기는 상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 우리는 상사와 부하가 아니라고 했지. 그럼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아침 잘 안 먹어요.”

그녀는 나름 머리를 써 대답했다. 안 먹었다고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어디든 가서 간단히 먹자고 말할 얼굴이었으니. 그렇다고 안 먹은 걸 먹었다고 말하는 건 양심에 찔렸다. 나름 씻기도 전부터 팀장님이 집 앞에 대기하고 있는데 아침 같은 걸 생각할 수 있겠냐고 떠올린 시비조의 뒷말은 삼켰다. 출근 전부터 눈빛 쏘임을 당할 순 없으니까.

“이런, 모닝커피랑 샌드위치 사 왔는데. 나만 먹어야겠군요.”

놀리는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서영은 자꾸만 올라서려 하는 태욱의 입꼬리를 놓치지 않고 캐치했다. 네네. 마음대로 하세요. 전 눈 딱 감고 잠든 척하며 옆자리만 채울 테니.

“사 온 사람 성의가 있으니 한 입 먹어 봐요.”

차에 오르고 곧장 출발할 줄 알았는데 태욱은 샌드위치 봉투부터 열었다. 그것도 서영이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의 모닝 세트였다. 이 남자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데. 아니다. 어쩌면 이런 것까지 전부 다 파악해서 작전을 짠 것일지도. 철두철미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 샌드위치 별로 안 좋아합니다.”

서영은 자꾸만 비딱한 반응을 하게 되었다.

“……그럴 리가.”

태욱이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말투로 받아쳤다.

“그럼 매일 아침 7시 반에 회사 정문 옆 스마일샌드위치 앞에 줄 서 있던 사람은 누굴까요? 내가 한두 번 본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럽니다.”

화르륵. 서영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스마일샌드위치 하나가 곱게 들려졌다. 거짓말해 봤자 내 손바닥 안이라는 것처럼 태욱이 웃었다.

이 남자는 이상하게 그녀와 단둘이 있을 땐 웃음이 헤펐다. 그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웃을 때마다 서영은 심장이 콩닥거렸다. 짝사랑하는 남자와 한 공간에 있으면서 그 상대의 웃음을 바라보고 있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제발 웃지 좀 말라 할 수도 없고. 서영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샌드위치 포장을 뜯었다.

“……잘 먹겠습니다.”

“이것도 같이.”

태욱이 테이크아웃 컵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서영이 엉겁결에 받아 들자 그도 자신의 샌드위치를 꺼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그걸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이 계약 만남이 그녀에게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서영도 태욱을 따라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녀가 아주 좋아하는 불고기샌드위치였고, 맛도 금방 사 먹었을 때와 비슷했다. 안 먹겠다던 그녀가 태욱보다 빠르게 샌드위치를 삼켜 가자 그는 잠시 먹는 것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입가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왜, 왜요……?”

너무 급하게 먹어 입에 묻힌 걸까. 서영은 놀라서 입가 주변을 손으로 닦아 내려 했다. 그때 태욱이 그 손을 단단히 붙잡아 버리고는 다른 손으로 가게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물티슈를 꺼냈다.

“다이어트 중이라더니.”

태욱은 서영의 손에 티슈를 쥐여 주며 말했다. 태욱에게 잡힌 손이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어서 서영은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금방 파악하지 못했다.

“혹시 몰라서 하나 더 샀는데, 먹을래요?”

서영이 잠자코 가만히 있자 태욱이 말을 이어 가며 봉투를 뒤졌다.

“아, 아뇨. 팀장님 드세요. 저는…… 이것만 먹어도 되, 됩니다!”

서영은 손을 흔들며 극구 거절했다. 평소에도 하나만 먹으면 배가 차는 편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침을 잘 안 먹는다고 할 땐 언제고, 샌드위치를 두 개나 먹어 우스운 꼴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순간부터 서영은 남은 샌드위치를 조금씩 베어 먹었다. 그 모습을 본 태욱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집 앞에서 태욱과 아침을 먹는 게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러워 놀라울 뿐이었다.

샌드위치를 하나씩 나눠 먹고 든든한 배로 회사에 도착했을 때 신사업 팀 안에는 지훈 혼자만 출근한 상태였다. 태욱과 서영이 같이 사무실로 들어서는 모습을 본 그가 잠시 얼굴을 굳혔다.

지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서영은 놀란 나머지 태욱과 거리를 두기 위해 한 발 물러섰고, 그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녀의 손에 남은 샌드위치 하나를 들려 주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아예 같이 아침 먹었다고 홍보를 하세요.

“같이 출근했나 봐?”

서영이 자리에 앉자마자 지훈이 말을 걸어왔다.

“아……. 이 앞에서 만났어요.”

거짓말을 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지훈에게만은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됐지만 만약 그가 그녀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게 맞는다면 차라리 이렇게 오해하도록 두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도 짝사랑 중이면서 또 다른 이의 짝사랑에는 이리도 잔인하게 굴고 있었다.

“어제 면담은 잘 끝냈고?”

“네. 그것 때문에……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서영은 그래도 직속 상사인 지훈에게 가장 먼저 퇴사를 잠시 미루게 되었다는 말을 전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는 아침 시간, 공개된 자리에서의 통보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회의실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중요한 얘기야? 따로 부르고.”

회의실로 따라 들어온 지훈이 당연한 것처럼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의 행동에 서영은 잠시 의아했지만 괜히 다른 이들의 눈에 띄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자리에 앉은 서영은 우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퇴사 문제 말이에요.”

“그래.”

“당분간은 보류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녀의 말에 지훈은 예상만큼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그는 잠시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보다 강 팀장 입김이 더 센가 보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제가 다시 다닐 이유가 있다면 그건 차장님 때문이에요. 갑자기 그만둔다고 말하기도 했고, 차장님 입장을 전혀 생각 못 했던 것 같아요. 마무리 지을 광고들도 몇 개 남았고. 다시 생각해 보니까 너무 급하게 결정한 것 같아서 당분간은 더 다녀 보려고요.”

그게 몇 달이 될지 몇 주가 될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태욱이 말한 가짜 애인 역할이 언제쯤 정리될지 가늠되지 않았다. 하지만 태욱의 성격상 길게 끌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도 파혼 문제만 정리되면 금방이라도 그녀의 퇴사를 처리해 줄 것처럼 굴었으니까.

“아무튼, 잘 생각했어. 더 다니다 보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도 있어. 나도 몇 번 주머니에 사직서 넣고 다녔다는 거 모르지?”

“차장님이요?”

서영이 놀라 묻자 지훈이 해탈한 듯 웃었다.

“나는 뭐, 사람 아니야? 넘어질 때도 있는 거지. 그때 잘 일어나는 사람이 진짜 고수입니다, 윤서영 대리. 잘 해결됐지만 밥 사 달라는 건 취소 못 한다. 나 이번엔 진짜 거하게 얻어먹을 거야.”

지훈은 특유의 친근함으로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럼요. 언제든지 시간만 말해 주세요. 제가 예약 잡을게요.”

“오늘은 어때?”

“네?”

서영은 적극적인 그의 태도에 잠시 고민했지만 이제 와 거절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한 번은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 지선의 추측처럼 그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이참에 표현한다면 잘 거절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오늘이 가장 적당한 날일 수 있었다.

“약속 있는 거야?”

“아뇨. 괜찮아요. 그럼, 제가 장소 알아보고 오후에 알려 드릴게요.”

“그래. 그럼 난 오늘 점심은 건너뛰어야겠다.”

배를 만지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남긴 지훈이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서영은 잠시 누군가를 떠올렸지만 어차피 그와는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았다. 애인 역할을 해 준다고 했지, 그녀의 시간을 모두 그를 위해 비워 두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서영은 간단히 생각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약속이…… 생겼단 말이군요.”

팀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올라오는 길이었다. 외근을 나간 지훈은 오후 늦게 도착할 것이란 문자를 서영에게 미리 남겨 둔 상태였다. 저녁 약속까지는 무리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서영도 알겠다며 답을 보냈다.

혹시 몰라 바라본 태욱의 집무실은 비어 있었다. 오전부터 외부 미팅이 잡혀 있어 오늘은 하루 종일 사무실에 출몰하지 않을 것이란 정보를 관련 부서 직원에게 전해 들었다. 서영은 잘됐다며 안심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했고, 화장실에 들르느라 팀원들을 먼저 보낸 후 홀로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태욱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고 있었다.

“같이 저녁 먹자는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은 태욱이었다. 외근을 마친 후 곧장 복귀하느라 점심도 먹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단둘만 있어서 그런지 그는 스스럼없이 오늘 아침처럼 서영을 대했다. 점심은 맛있게 먹었느냐고. 저녁은 뭘 먹고 싶으냐고. 서영은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태욱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서 약속이 있다는 걸 곧장 눈치챈 그는 잠시 서운한 웃음을 흘렸다.

서영은 자신이 왜 변명하고, 미안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점심조차 먹지 못했다는 태욱의 말에 측은함과 안쓰러운 마음이 생겨나고 말았다.

“당연히 먹는 거 아니었나.”

“……네?”

태욱이 짓궂은 표정을 짓다 힘없이 웃었다. 왜 웃음에 힘이 없어 보일까. 서영은 이제라도 지훈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태욱과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이참에 애인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안을 만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미리 말하지 않은 내 탓도 있으니.”

엘리베이터는 곧 13층에 도착했다. 먼저 내리라는 듯 열림 버튼을 누른 채 기다리고 있는 그를 향해 그녀는 시선을 맞췄다.

“그래서 말인데요, 팀장님.”

태욱이 서영을 돌아봤다.

“팀장님이 말씀하신 애인 역할이라는 게…… 어떤 시간까지 비워 둬야 하나 싶어서요. 오늘 아침도 그렇고 저녁 시간까지 포함되는 건가요? 그럼, 주말은요?”

서영의 물음에 태욱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하면 다 비워 두는 겁니까?”

“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하루 종일 나랑만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하여튼 윤 대리는 협상하는 방법부터 잘못됐어요. 나를 이기려면 한참 멀었어.”

누가 이기고 싶다 했나. 서영은 괜스레 자신의 어수룩함을 지적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또 그녀가 시간이 안 된다고 말하면 다음으로 미뤄 줄 생각이었나. 그것도 아니면서 꼭 사람을 바보 취급 했다.

“을이 갑한테 무슨 협상을 해요. 아무튼, 오늘은 안 됩니다. 그럼.”

꾸벅, 인사를 건넨 서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신사업 팀 안으로 들어갔다. 심통이 난 것처럼 걸음이 다소 거칠어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태욱은 또 한 번 웃었다. 거래처 대표들과 전쟁 같은 말씨름을 하고 들어온 터라 온몸의 기가 다 빠진 느낌이었는데 그도 모르게 어느새 충전된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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