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끝도 이미 정해진 관계 (1)
차가 본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박 비서가 그를 마중하러 나오는 순간에도 태욱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던 서영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이야기는 잘 마무리 지었다. 그가 원하는 걸 얻었고, 그녀도 동의했다. 잠시 자존심을 부리기는 했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태욱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고,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그녀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했다.
급작스러운 결혼 종용과 파혼 문제가 없었다면 그 여자의 고백을 흘려들었을 것이다. 태욱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다가온 여자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사내에서도 그의 팬클럽이 생길 만큼 그는 어디에서나 인기가 많았고,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때는 그것이 부담이 되어 짜증스러웠지만 배부른 소리 작작 하라는 친구 훈재의 경고에 겸손이란 걸 챙겨 보기도 했다.
만약 어머니 정애가 손 회장의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학교는 제대로 졸업할 수 있었을까. 가난에 허덕이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찍부터 기술을 배웠을 테고, 자신에게 상대를 구워삶을 수 있는 사업 머리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겠지.
외모 또한 계급을 보여 주는 하나의 허울일 뿐이었다. 그가 명품 옷을 입지 않고, 외제 차를 타지 않았다면 그저 반반한 얼굴과 큰 키가 전부인 별 볼 일 없는 남자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유명 건설사의 팀장 자리에 앉아 많은 사람들을 호령하고, 든든한 배경을 가진 이로 평가되니 앞다투어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드는 거겠지.
모두들 태욱이 이렇듯 회의적인 사람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보이는 대로 믿는 세상이었다. 뭐가 진짜인지도 모른 채 인생을 살아갔다. 그 역시 남들에게 보이는 그 껍데기를 내려놓지 못해 아직도 할아버지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오셨어요, 도련님.”
“네. 잘 지내셨죠?”
유신그룹 일가의 잡일을 모두 도맡아 하고 있는 박 비서는 손필성 회장의 어떤 점을 내려놓지 못해 한평생을 그의 그림자로 살고 있는 걸까. 태욱은 한 번씩 본가를 찾을 때마다 그런 물음을 가졌다.
일곱 살이던 그가 어머니와 함께 이 집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만났던 사람이 박씨 아저씨였다.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시다는 말을 건네곤 어머니의 손에서 짐을 받아 들던 남자는 지금의 그처럼 젊었다.
“저야 늘 똑같습니다. 도련님은 더 멋있어지신 것 같네요.”
집안사람 모두 그에게 각종 허드렛일을 시켰다.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자리였다. 잠도 편히 잘 수 없었으며 손 회장이 부르면 자신의 딸이 아프다고 해도 곧장 달려가야만 했다. 결국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해 지하 창고에서 숨죽여 우는 그를 훔쳐보던 어린 날의 강태욱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러니 제가 건방져지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늘 경고하시잖아요.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태욱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래서 더 쓸쓸했다. 박 비서는 아니라는 말 대신 그저 웃어 주었다. 눈가에 주름이 늘어 이젠 손 회장과 친구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이는 그가 훨씬 어렸지만, 살아온 인생이 달랐고 이젠 삶의 흔적이 몸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손 회장은 늘 곧 초상 치를 준비를 해야 할 것처럼 굴지만, 그가 누구보다 건강에 신경 쓴다는 걸 이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알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수발을 드는 일을 눈앞의 박 비서와 어머니 정애가 도맡아 하고 있다는 건 태욱만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어머니는요?”
“오늘 선불사 다녀오셔서 피곤하신지 일찍 들어가셨어요.”
현관 앞에 다다르자 박 비서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신에겐 편하게 말해도 된다 일렀지만, 그는 절대 반말하는 법이 없었다.
‘편해지면 당연한 줄 알게 됩니다.’
박 비서는 스스로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편해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다는 걸 태욱도 모르지 않았다. 이 집에 들어선 순간, 그는 당당히 유신그룹 손자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학교에서든 어디서든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 힘이 무섭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달콤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이 다른 손자인 게 그나마 그를 현실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는 ‘손’씨 핏줄을 버리고 어머니를 선택했다. 그리고 태욱을 낳았다. 당연하게 자신의 성을 붙여야 했지만 그는 아내의 성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지금 시대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손씨가 아니라고 해서 그가 손가의 자손이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분명히 그는 아버지 손인주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고, 의심할 것 없이 할아버지 손필성의 손자였다. 그럼에도 목 안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그를 압도할 때가 많았다.
특히나 큰아버지의 무리와 할아버지와 피를 나눈 친척들은 모두 그가 ‘강’씨라는 것에 반응하듯 선을 긋고 제대로 된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모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손 회장이 그의 성을 ‘강’에서 ‘손’으로 바꿔 주지 않는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강’이든 ‘손’이든.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손 회장은 태욱을 작은 건설사에 입사시켰다. 네 능력을 발휘해 보라는 시험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판은 마련됐고 보여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태욱은 이미 그 회사의 지분을 유신이 절반 이상 비밀리에 확보해 두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다려 온 순간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손 회장은 그가 다니던 회사를 유신그룹 산하로 합병했고, 그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릴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사촌 형인 철민을 유신건설의 상무이사로 취임시켰다. 그가 일궈 놓은 밭을 그대로 꿀꺽하겠다는 심산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사내에서는 철민이 유신전자에서 유신건설로 자리를 옮긴 이유가 손 회장의 뿌리인 건설 사업을 확장시키고 후계자 수업을 마무리 짓기 위함이란 소문이 돌았다. 노인의 처세술은 고약하다 못해 악랄했다.
그 마지막 정점이 그를 물건 취급하듯 선 시장에 내놓는 것이었다. 태욱은 노인의 행동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모든 노력들이 유신 일가를 배부르게 만들 정략결혼으로 이어지는 밑바탕이 될 줄은 몰랐다. 손 영감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를 본가로 불러 결혼 날짜를 통보했다. 여자를 만나기도 전에 상견례 일정을 말하는 할아버지 앞에서 태욱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싫습니다.’
딱 한 마디만 내놓고 돌아서 나왔다. 어머니 정애가 그를 따라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지만 듣지 않았다. 뻔했다. 끝도 없이 이용당하다가 쓸모가 다하면 내쳐지겠지. 처음 이 집 안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가족이란 건 말뿐이었다. 그에게 손가의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그와 어머니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였다. 그렇게 선을 그었으면서. 허무한 헛웃음이 터졌다.
이제는 그가 보여 줄 때였다. 자신은 함부로 이용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유신을 끌어안고 평생을 고개조차 숙이지 않은 채 살아온 양반에게도 이길 수 없는 핏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은가. 받아 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손자라 욕하면 그 몫은 이미 충분히 바쳤다고 말할 수 있었다. 태욱이 이제껏 잠자는 시간까지 반납한 채 지금의 회사만을 위해 살아온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양반이니.
집 안으로 들어선 태욱은 별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시에서 무릉도원을 즐기는 이가 바로 손 영감이었다. 만들라 하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여기 있었다. 산과 바다가 한 공간에 집약되어 노인의 입맛대로 차려졌고 그의 심신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에게 치열한 인간 세계는 발아래의 일이 된 지 오래니 심심한 것은 당연했다. 생각할 것이라고는 더 오래 살지 못하는 한恨뿐이니, 그 한풀이를 핏줄들에게 하는 중이었다.
똑똑.
태욱은 손 영감의 방 문을 두드렸다. 그가 도착하기 전 전화를 넣었으니 아직 잠들진 않았을 것이다. 곧 화가 잔뜩 묻은 칼칼하고 꼿꼿한 음성이 들려왔다. 태욱은 큰 숨을 한 번 내쉬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온 골프공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벽에 부딪친 후 바닥에 떨어졌다.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삽 하나 들고 맨땅에서 유신을 일군 양반이라 그런가.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다.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골프채를 들고서 그의 발 앞에 기도록 만드는 게 특기인 사람이었다. 그런 노인을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지 않는 희한한 독종이 태욱이었다. 골프채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가격한다고 해도 맞으면 그뿐이었다. 죽기밖에 더 할까.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보내고 죽음에 초연해진 지 오래였다.
“파혼? 누구 맘대로?”
모든 이해와 타산이 맞아 들어간 일인데. 그걸 네가 감히 멋대로 끊어 내느냐는 노여움이 담겨 있었다. 태욱은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골프공을 발로 붙잡은 뒤 허리를 숙여 집어 들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 노인이 서 있는 골프 퍼팅매트 위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손 영감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그가 원한 목표였다.
자신의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노인이었다. 예전 ‘유신’이 클 수 있었던 건 그 벼락같은 성질 때문일지 몰라도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얼굴조차 보지 않고 외국 거래처들과 계약을 했고, 그들은 유신이 가진 기술력만 필요로 했다. 대우받고 싶어서 파트너를 고르지 않았다. 그런 이들은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걸 요구하며 상대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기를 원할 뿐이었다. 그러니 이런 강제적인 감정 소모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건양이든 성화든 하나만 건드리지 그러셨어요.”
“……뭐?”
“이제 우리가 그쪽에 할 말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지유린이 날뛰는 건 회장님 책임이 큽니다. 보통이 넘는다는 건 처음부터 아셨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결혼만 하고 그 뒤론 네놈 알아서 하라는 거 아니냐! 너한테 도움만 될 여자야. 그런 든든한 뒷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손 이사 치고 오를 수 있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손 이사한테도 똑같이 말씀하시면서 성화 갖다 붙이셨습니까?”
태욱의 기습 공격에 손 영감의 당당하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소리야.”
발뺌하는 데는 선수인 양반이었다.
“손주 장사 한다고 이미 소문 다 났습니다. 제가 이 집안 핏줄이라는 거 광고하신 효과는 손 이사한테서 보실 테고, 저한테는 회장님 자리 놓고 간 보시는 건가요? 판을 잘 펼쳐 놓았는데 미친 말 하나가 뜻대로 움직이질 않아서 난감하시겠습니다.”
손 회장은 노여움을 참지 못해 그저 입만 벌린 채 태욱을 지켜볼 뿐이었다. 머리 좋은 녀석이니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행동 자체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날뛰는 말 한 마리쯤은 길들이는 재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판을 깔아 놓았는데, 그 말이 시작부터 다른 방향으로 뛰었다. 이 경주 자체가 불만이라는 것처럼. 손 회장은 이제 웃음이 나왔다.
“혼자 힘으로 다 알아서 할 수 있다, 이 말이냐? ……건방진 놈. 네놈 뒤에 유신이 없으면 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 어미 보고도 몰라? 기어이 이 집으로 들어와 내 수발 들며 몇십 년을 살고 있는데, 네놈이라고 다를 것 같으냐?”
어머니 정애를 들먹이는 말에 태욱은 잠시 주먹이 쥐어졌다. 냉정하려 했지만 가슴 안에서 불기운이 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스스로를 컨트롤했다. 그게 손 회장과 자신의 차이점이었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거라. 구경하는 것이 내 취미니.”
두 사람 중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선전포고였다.
“네. 그럼, 앞으로 제 혼사는 제 의사에 맡기신다는 뜻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하. 손 회장에게선 가소로운 탄성이 터졌다.
“결혼 같은 건 아예 생각 없다는 소린 안 하는구나.”
“당연하죠. 만나는 사람 있습니다.”
골프채를 내려놓고 소파로 향하던 손 회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태욱을 돌아봤다. 어디서 거짓말을. 만약을 대비해 그가 붙여 놓은 사람들이 몇 명인데. 그랬다면 이미 그의 책상에 사진들이 놓여 있어야 했다. 손자가 무슨 일을 꾸미려 하는지, 그는 머리를 돌려 보았다.
“그럼, 데려와.”
망설임 없이 명령했다.
“그러죠. 시간 잡아 보겠습니다.”
태욱에게서도 곧장 대답이 흘러나왔다.
손 회장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잠시 지켜보던 태욱은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린 후 방을 빠져나왔다. 오늘 밤 무수한 시나리오를 쓰며 계산기를 돌리느라 영감이 잠들지 못할 거란 걸 태욱은 확실하게 장담했다. 어쩌면 이 집안에서 가장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손필성 회장이었다. 그런 그에게 태욱이 낭비할 감정 따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