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10화 (10/75)
  • 4. 서두를 것 없이 (3)

    “무슨……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일단 타요. 데려다줄 테니까.”

    멍해진 얼굴로 되묻는 서영의 물음을 단번에 삼키고 그는 다시 자신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 말을 꺼낸 이유를 알고 싶으면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처럼. 서영은 태욱의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다시 그와 한 공간에 갇히게 되었다.

    “서 차장이 있는 곳이 어디예요?”

    태욱이 내비게이션을 실행시키고 목적지를 입력할 준비를 했다.

    “아, 잠시만요.”

    서영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지훈이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어차피 택시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었다. 태욱의 차를 얻어 탄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꺼낸 말의 의미가 궁금했다. 필요하다는 것. 그 안에 숨겨진 의도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핸드폰을 돌려 태욱에게 위치를 보여 주려는데 마침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자 지훈이었다. 그녀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차장님. 지금 팀장님이 태워 주겠다고 하셔서 가려는 길이에요.”

    ― ……아. 괜찮아. 안 와도 될 것 같아.

    “네?”

    서영은 기다리고 있는 태욱을 보곤 당황하며 되물었다.

    ― 근처 있는 친구 불렀어. 해결했다고 전화한 거야. 괜히 미안하게 됐네.

    “아……. 다행이네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 그래. 그럼…… 내일 봐. 조심해서 들어가고.

    “네. 차장님도 쉬세요.”

    통화를 종료하고 서영은 태욱을 바라봤다. 그는 이미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헛웃음을 내놓고 있었다. 뒤늦게 그를 두고 가려 했던 자신의 행동이 미안해졌다. 서영은 최대한 오해 없이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게, 차장님 차에 문제가 생겨서…….”

    “됐습니다. 이미 해결됐다고 하니 중요한 것도 아니고. 윤 대리 집은 어딥니까?”

    “네?”

    태욱은 여전히 내비게이션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여기서 지하철 타고…….”

    “가는 길에 내가 한 말, 설명하죠.”

    그는 짧게 그녀의 거절을 막았다. 첫 면담 때도 거절했는데 두 번이나 그러는 건 염치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에게 들어야 할 말도 있으니 서영은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주소를 불러 주자 곧 차가 출발했다.

    한참 도시를 달렸지만 태욱에게선 아무 말이 없었다. 운전하는 사람에게 재촉할 순 없으니 서영도 조용히 기다렸다. 차 안에는 낮은 볼륨의 클래식 음악만 흘렀다. 다시 어색하고 답답한 공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아 서영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시의 불빛은 아름다웠다. 해외에서 온 바이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서울의 야경이라고 언젠가 지선이 말했던 게 떠올랐다. 익숙하게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어느 순간 특별해지는 것. 서영은 지금 태욱과 한 공간에 있는 시간이 그랬다. 이런 일들을 수없이 바라고 상상했으면서도 정작 그게 현실이 되니 즐기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문득 운전하는 그의 얼굴을 더 눈에 담아 두어야겠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서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태욱을 바라봤다. 그는 팔 하나를 창가 쪽에 기댄 채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분위기에 압도된다는 것이 이런 건가. 그의 옆모습은 앞보다 더 서영의 시선을 붙들었다.

    “훔쳐보는 걸 좋아하는군요, 윤 대리는.”

    그녀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태욱은 신호에 차가 멈추자 서영 쪽을 바라봤다. 눈동자가 깊은 우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위험하면서도 또한 흔들림 없이 덤덤했다. 서영은 마주친 눈빛을 피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든 꺼내야 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녀가 유도심문에 넘어가듯 대답하자 태욱이 웃었다.

    “모를 수가 있나.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는데.”

    “……보이는 걸 어떻게 해요.”

    서영은 오히려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직원들이 다 그렇게 보진 않습니다.”

    그는 또 날카롭게 현실을 지적했다. 맞는 소리였다. 좋아하는 마음이 감춰질 리 없었다. 그가 모를 것이라 생각한 건 그녀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알고도 무시하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이제껏 짝사랑을 끌고 온 걸지도 몰랐다. 이제는 정말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였다.

    “제가 팀장님을 좋아하는 게, 어디에 쓸모가 있나 보죠?”

    몇 단계 건너뛴 물음에 태욱은 이제야 대화가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신호가 바뀌고 다시 출발하게 되자 그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이야기에 집중하겠다는 의도 같았다.

    “이미 눈치챘으면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아까 한 말 그대로, 나는 지금 윤서영 대리가 필요합니다. 파혼에 대한 상황은 엿들었을 테니 알 테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게 나한테 다른 사람이 있다고 밝히는 거예요. 그 거짓말이 성립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한 상황들이 있어야 하는데, 윤 대리가 거기에 적합한 사람이더군요.”

    서영은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금 그의 말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연인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였고, 그게 그녀였으면 한다는 소리였다. 왜. 무례한 고백 따위를 했다고 해도 꼭 그녀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거짓말에 능통하지 못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잘 알 텐데 말이다.

    “제가…… 그런 연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두 번의 면담 모두 어수룩한 그녀를 놀리기에 바빴던 남자였다. 그랬으면서 연인 역할을 해 달라니. 지선과 몇 마디만 나눠도 그녀는 모든 걸 들킬 게 뻔했다. 그가 이러는 이유가 납득되지 않았다.

    “윤 대리가 연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어차피 나한테 호감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묻는 물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건…….”

    “원래대로 해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렇게 사람 마음을 이용하겠다는 건가. 서영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고 그녀도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부끄러움만 남은 짝사랑을 짧게나마 위로해 주기 위해서. 하지만 이 남자는 그녀의 감정을 이용해 자신의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려 하고 있었다. 뭘 기대한 걸까. 애초부터 무례하게 군 건 그녀였는데. 그러나 서영은 서걱거리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제가…… 싫다면요?”

    마지막 자존심을 부려 보고 싶은 걸까.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해 말을 뱉었다.

    “원하는 걸 말해 봐요.”

    태욱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협상 상대를 회유했을 그였다. 어차피 모든 건 그가 원하는 대로 될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왜 태욱이 팀장 자리까지 초고속으로 올라섰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서영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움켜쥐었다.

    “말하면 다 들어주실 건가요?”

    그녀가 되묻자 태욱은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잠자리든 뭐든. 윤 대리가 원하는 거면 다 들어줄 생각이 있습니다.”

    서영은 누가 가슴 안에 돌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먼저 가져 보고 싶다는 말을 건넸으면서. 그가 이러는 게 이해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고민해 볼게요.”

    서영은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은 그저 얼른 그와 함께 있는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선택권을 윤 대리에게 넘기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태욱의 말은 차분했으나 그녀의 당돌함에 대한 경고가 서려 있었다.

    “제가 한 실수에 대해서…… 책임을 지란 건가요?”

    그가 걸고넘어질 건 그것뿐이라 생각했다. 서영도 이제 머리가 이성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거절당할 부탁 같은 걸 할 남자도 아니었다. 그녀가 피할수록 더 목을 조이겠지. 그녀의 고백 이후 그가 했던 모든 행동들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면담과 식사 자리. 그녀에게 감정이 있는 것처럼 어두운 봄밤을 같이 걸어 주던 낯선 모습들. 그녀를 뒤흔들어 오해하게 만들었던 감정들이 모두 의도를 가진 계략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그래. 그 누구도 아닌 강태욱이었다. 회사 내에 떠도는 전설들이 수두룩한, 잠도 자지 않은 채 모든 업무를 쳐 내고도 피곤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는 남자였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런 감정에 흔들려 다정하게 행동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눈을 맞추고 건넨 말들. 크게 웃음을 터뜨리던 해맑은 모습들. 그 모든 것들에 배신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태욱이 서영에게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결국에 이 남자는 본인이 원하는 방향대로 그녀를 이용할 것이다. 버틴다고 달라질까.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했다. 서영은 생각을 다르게 했다.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는데.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애초부터 그걸 기대한 그녀가 잘못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 퇴사 문제도 확실하게 정리해 주세요.”

    “그거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어차피 내 일이 해결될 때까지만 보류인 거니까. 다 마무리되면 곧바로 퇴사 처리 해 주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해 두자면 사내에도 소문이 퍼질 겁니다. 최대한 윤 대리한테 피해 가는 일이 없도록 할 테니 이해해 줘요. 그럼…… 아마 퇴사도 자연스러울 겁니다.”

    사내 연애. 평범한 여직원과의 스캔들이 필요하다는 태욱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서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상사에게 무례한 고백을 건넨 뒤 쪽팔림을 참지 못하고 퇴사하는 것보다는 그와 연인 사이였다는 쇼킹하고도 부러운 비밀이 밝혀져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게 마무리에는 더 좋을 것이다. 모두 씁쓸한 연극일 테지만. 서영은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 역시 원하는 것만 얻자. 그 다짐만 되새겼다.

    그녀에게서 다른 말이 없자 곧 차가 출발했다. 서영은 곧장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만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태욱이 한 번씩 바라본다는 건 알지 못했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서영은 어쩐지 그 광경이 외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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