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9화 (9/75)
  • 4. 서두를 것 없이 (2)

    그들의 두 번째 식사 메뉴 선택권은 서영에게로 넘어왔다. 당연히 태욱이 원하는 장소로 향할 줄 알았던 그녀는 급하게 생각하느라 지선과 갔던 닭발집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만약 지선이 알게 된다면 고개를 내저을 메뉴 선택이었다. 강태욱과 닭발이라니. 그것도 협상을 위한 자리인데.

    그녀의 눈앞엔 매운 닭발이 놓여 있었고, 태욱은 신기하게 그 음식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이런 걸…… 좋아하나 보죠, 윤 대리는?”

    “아니, 자주 먹는 건 아니고. 스트레스받을 때면. 아무튼 갑자기 메뉴를 정하라고 하셔서 생각나는 게 이곳밖에 없었어요. ……죄송해요.”

    결국 사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는 관계인가. 닭발이 구워지는 모습을 보던 서영은 그것이 자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불판 위에서 하염없이 타들어 가는 운명. 그녀의 마음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맛이…… 없진 않군요.”

    태욱은 처음 먹어 보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평소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이라고도 말했다. 정말 돌이켜 보면 그는 생각보다 잘 먹는 사람이었다. 한정식집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서영보다 닭발을 집어 가는 횟수가 더 많았다. 그래도 너무 많이 드시면 내일이 힘드실 수 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구울 테니까 윤 대리도 좀 먹어요.”

    어느새 서영은 태욱에게 집게를 뺏겨 버렸다. 겉옷을 벗고 와이셔츠까지 걷어 올린 그가 닭발을 굽기 시작하자 서영은 알 수 없는 괴리감이 들었다. 유신건설의 최고 인기남인데. 지선이 이 상황을 봤다면 서영에게 눈을 부라렸을 것이다.

    “이 대리님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태욱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닭발과 함께 술을 먹던 날, 지선에게서 뒷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태욱과 지선의 남편인 박훈재 변호사가 고등학교 동창이고, 그 사실을 지선 역시 결혼하고 얼마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걸.

    지선은 왜 숨겼느냐고 남편에게 따졌고, 훈재는 당신이 강태욱을 볼 때 어떤 눈빛인지 아느냐고 맞받아쳤단다. 친구라는 걸 밝혔으면 그를 강태욱에게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썼을 것 아니냐며, 제대로 정곡을 찔러 지선이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렸다고 했다.

    지선은 태욱을 유신건설의 하나뿐인 연예인처럼 바라봤지만, 서영은 태욱과 훈재가 외모적으로 크게 비교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태욱이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강한 인상의 미남이라면 훈재는 이름처럼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스타일의 남자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사내 인기투표에서 훈재에 대한 표심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선이 그와 비밀 연애 후 결혼 발표를 했을 때 한동안 그녀의 자리에는 무서운 물건들이 놓여 있기도 했다. 그걸 또 가만히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의 지선은 사내 보안 팀과 공조해 CCTV를 모조리 돌려 보며 그 범인을 찾아냈고, 사과의 반성문까지 받아 냈다. 그 이후로 어느 누구도 박훈재 변호사 책상 위에 커피나 초콜릿 등 팬심을 드러내는 선물들을 올려놓지 않았다.

    지선은 자신이 닭발을 끊지 못하는 이유의 8할은 박훈재오리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 외모가 강태욱 정도 되는 줄 안다고 착각이 아주 대단하다며, 이럴 때일수록 태욱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켜야 한다고 그녀는 사내에서 비밀스럽게 만들어진 태욱의 팬클럽 회장까지 맡았다.

    “그냥…… 팀장님 이런 모습 보면 혼날 것 같아서요.”

    서영은 불쑥 자신의 책상 위에 커터 칼을 놓고 간 범인을 찾아냈을 때의 지선의 눈빛이 떠올랐다.

    뒤늦게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태욱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씩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게 이 여자의 매력인가 싶었다. 그와 있으면 음식조차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불편해하면서도 술의 힘을 빌려 과감하게 고백까지 내지른 여자였다. 중간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평상시엔 또 누구보다 평범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그런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게 태욱에겐 신선한 호감으로 다가왔다.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은 위치에 있는 게 지금의 그였으니까. 서영과 있으면 웃음이 잦아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내가…… 함부로 닭발 같은 거 구우면 안 되는 사람이었군요.”

    태욱은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 말을 받았다. 서영은 그의 웃음에 홀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걸. 그녀는 그의 다른 모습을 자신이 알게 된 게 뿌듯했다. 날카롭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도 멋지긴 했지만 천진하게 웃을 때의 태욱은 상대를 무장 해제 시키는 면이 있었다. 아무렴 잘생긴 남자가 해맑게 웃는데 안 좋을 이유가 없었다.

    “팀장님 팬클럽까지 있는 거 모르시는구나.”

    그가 자꾸 웃자 서영도 말을 꺼내기가 편해졌다.

    “거기, 윤 대리도 가입되어 있습니까?”

    또다시 허를 찌른 물음이었다. 서영이 말을 못 하고 얼굴을 붉히자 태욱은 대답을 들었다는 것처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선의 권유에 가입하긴 했지만 활동까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팬심 이상으로 태욱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모두에게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영은 자꾸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연신 물잔을 들었다.

    “불 앞에 있으니까 많이 덥네요.”

    서영이 난처해하자 태욱은 웃음만 지을 뿐 더는 파고들지 않았다.

    “이지선 대리랑 친하게 지내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아, 작년 하계 야유회에서 같은 방 쓰면서 많이 친해졌어요. 대리님이 저를 좋게 봐 주시는 것도 있고요.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요. 배울 점도 많고, 매력적인 분이시잖아요.”

    여자 강태욱이란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지선과 태욱, 어느 쪽에서든 발끈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지금은 그것이 태욱일 것 같아 서영은 잠깐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생각만 해도 좋아요?”

    “네?”

    태욱의 물음에 서영은 그와 눈을 맞췄다.

    “이 대리가 여러모로 사람을 끄는 점이 있긴 하죠. 그러니 박 변도 정신 못 차리게 만들다가 결혼까지 했고. 친구인 나한테 안 들키고 끝까지 비밀 연애 한 것도 대단한 일이니까.”

    “그러니까요.”

    서영은 맞장구를 치다 아차 싶어서 말을 멈췄다. 두 사람이 동창이라고 말해 준 지선이 이 사실을 모른 척하라며 신신당부한 게 생각나서였다. 훈재가 태욱의 소개로 법무 팀에 들어간 것이니 여러 가지로 난처한 점이 있어 사내에서는 서로 알은척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 두 분이…… 친구셨구나.”

    당황하며 어색한 연기를 펼치는 서영이 우스워 태욱이 물었다.

    “윤 대리는 길거리 돌아다닐 때 누가 자꾸 말 걸지 않아요?”

    “……저, 저한테요?”

    “도 좀 믿으라고.”

    어리숙하고 거짓말도 못할 것 같다고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서영은 그의 장난에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래, 시시때때로 표정이 바뀌며 상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남자의 눈에 그녀는 얼마나 쉬운 상대일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팀장님은 종교 있으세요?”

    서영이 진지하게 말하자 태욱이 잠깐 그녀를 바라봤다.

    “…….”

    “없으시면 제가 아는 신당이 있는데.”

    “…….”

    어느새 태욱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푸흡. 아, 죄송해요.”

    서영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누굴 속이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태욱이 잠깐 그녀를 의심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풀렸다.

    서영의 웃음을 바라보고 있던 태욱은 그를 상대로 장난이란 걸 치는 그녀가 낯설면서도 그게 또 귀엽다고 느껴져 헛웃음이 나왔다. 서영이 활짝 웃는 걸 보는 게 이번이 두 번째였다. 벚꽃 길에서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잠시 목이 간지럽기도 했다.

    “윤 대리는 절대 영업 팀은 못 하겠군요.”

    그다운 말에 서영이 입을 삐죽였다. 분위기가 점점 편해져 상대를 바라보는 데 익숙해질 즈음 서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습관처럼 테이블 위에 놓아두어 화면이 보였고, 태욱도 그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액정에 찍힌 이름은 서지훈 차장이었다.

    “아, 죄송해요.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서영은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전화까지 받지 않는다면 지훈에게 더 미안해질 것 같았다. 퇴사 문제 때문에 강 팀장을 만난 것이라 설명하는 게 맞았다. 그도 이 일에 관여된 사람이니 알릴 의무가 있기도 했다.

    “네. 차장님.”

    서영은 가게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 윤 대리, 얘기 중일 텐데 미안해.

    지훈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하게 느껴졌다.

    “아뇨, 괜찮아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 아, 차가 고장 나서 도로에 서 있어. 일단 서비스 불러서 정비소 보냈는데 깜박하고 가방을 두고 내렸네. 거기에 지갑까지 다 들어 있는데. 택시든 버스든 돈이 있어야 타지. 윤 대리는 회사 근처일 것 같아서. 혹시…… 와 줄 수 있어?

    지훈의 차가 몇 달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서영은 그의 난처한 상황이 이해가 되어 안 된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태욱과의 면담이야 내일이라도 회의실에서 나누면 될 것이다. 서영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그의 위치를 묻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온 서영은 태욱을 보며 미안한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팀장님. 차장님한테 일이 생겨서 제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태욱은 잠시 황당해하는 표정이었지만 곧 겉옷을 챙겨 일어섰다.

    “어쩔 수 없죠, 그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은 제가 계산할게요.”

    서영은 가방을 챙겨 재빨리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그럼 그러라는 듯 태욱은 별말 없이 가게를 빠져나갔다. 이대로 인사도 없이 가 버린 건가.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서영은 얼른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간 줄 알았던 태욱이 자신의 차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서영이 나오는 걸 보고는 그가 천천히 담배를 껐다. 제대로 인사는 하는 게 맞을 것 같아 서영은 태욱 쪽으로 다가갔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하실 말씀은 내일 회사에서 듣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 서영은 돌아섰다. 그때였다.

    “나도 윤서영 대리가 필요한데.”

    몸을 돌려 걷던 서영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다시 돌아서자 태욱은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멈춰 선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심장은 왜 이리도 세차게 뛰는 걸까. 서영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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