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6화 (6/75)
  • 3. 인생은 짧고, 사랑만 남는다 (1)

    그다음 날부터 태욱이 일주일간 중국으로 출장을 가는 줄은 몰랐다. 서영은 평소처럼 일찍 출근해 업무를 보았고, 한 번씩 그와 조용히 걸었던 벚꽃 길을 떠올리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점점 청승이 심해지는 걸 보니 그저 퇴사만이 빠른 답이었다.

    태욱이 출근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또 궁금해져 버렸다. 팀원들과 담소를 나누면서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침부터 외부 일정을 소화하고 출근한 서 차장이 그녀를 탕비실로 따로 불렀을 때에야 왜 그가 나타나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공중에 붕 떠 버린 그녀의 사직서 소식까지.

    “보, 보류라고요?”

    “그래. 아침부터 전화해서 그러시더라고. 윤 대리가 어제 그렇게 말한 거 아니야?”

    지훈은 어젯밤 서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태욱을 만났는지, 그리고 퇴사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했다. 팀장이 따로 면담을 할 정도이니 그도 어느 정도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이 따로 만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태욱이 평소와 다르게 개인 면담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 퇴사하겠다고 분명하게 말씀드렸어요.”

    당연히 그렇게 마무리될 줄 알았다.

    “나한테는 보류라던데. 새벽 비행기 타기 전에 통화했어. 자기 돌아올 때까지는 처리하지 말고 있으라고. 누구 말이 맞는 거야? 어제 만나서 무슨 얘기 했는데?”

    “아……, 그냥.”

    서영은 지훈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시시콜콜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주저하며 입을 닫자 지훈은 더 마음이 쓰였다. 좀 더 강하게 입장을 대변하며 그의 선에서 마무리 지었어야 했나. 후회가 들기도 했다.

    “암튼 일주일만 더 기다려 보자. 후임이야 인사이동하면 금방 정해질 거고. 우리 팀 윤 대리 자리야 누구든 오고 싶어 하는 자리잖아.”

    지훈도 당연히 사내에 도는 가십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서영의 자리가 강태욱 팀장의 집무실이 잘 보이는 명당이고, 마케팅 팀이라면 한 번쯤 거쳐 가도 나쁘지 않은 부서라는 것을.

    “그렇긴 하죠. 일단…… 알겠습니다. 중간에서 차장님만 입장이 난처하시네요, 죄송합니다.”

    서영은 공과 사를 구분하듯 지훈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지훈은 그게 못내 서운하고 아쉬웠다. 서영이 그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면 위로를 핑계 삼아 힘이 되어 주고, 자연스럽게 선배와 동료 이상의 감정을 느끼도록 다가설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서영은 늘 선을 딱 지켜 그를 대했다. 그게 평소 부서 책임자로서 그녀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는 편했지만 그녀에게 다른 마음을 먹고 나니 때때로 벽처럼 느껴졌다.

    “윤 대리 일이 내 일이지. 난처할 게 뭐 있어? 팀장님이 이번 일엔 평소랑 좀 다르시네. 뭐 그게 다 윤 대리 업무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 이번 도시사업 광고도 성공했고, 여러 가지로 놓치기 아까운 인재라 그러시는 거 같으니까 좀 더 기다려 보자고.”

    지훈은 일부러 서영이 듣기 좋은 말을 덧붙였다. 그녀가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하고 싶었다.

    “저 좋게 생각해 주시는 건 차장님뿐일 거예요. 정말 여러 가지로…… 감사하고 죄송하게 생각해요.”

    서영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퇴사 문제로 가장 피해를 본 사람을 꼽자면 당연히 지훈이었다. 아무리 괜찮은 후임자가 들어온다고 해도 팀원들끼리 조율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걸 중간에서 관리하고 해결점을 찾아 줘야 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만약 서영이 퇴사하지 않는다면 전혀 필요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미안하면 근사한 밥 한번 사.”

    지훈은 이때다 싶었다.

    “근사한…… 밥이요?”

    “포크, 나이프 있는 곳. 몰라? 나한테 그 정도도 못 써?”

    그는 일부러 앓는 소리를 덧붙였다.

    “아, 아니에요. 당연히 사야죠. 제가 차장님한테 얻어먹은 게 얼만데.”

    서영은 아차, 싶었다. 안 그래도 퇴사하면 언제 한번 그에게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 대학 후배라는 이유로 그가 다른 팀원보다 그녀를 더 챙겨 주고, 아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게 다른 팀원들의 눈에는 차별 대우처럼 보일 테니 그녀가 조금 더 조심하는 게 있긴 했었다. 하지만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약속했다?”

    지훈이 재차 확인하며 새끼손가락까지 내밀었다. 서영은 그 장단에 맞춰 그녀의 손가락을 걸어 주었다. 뭔가 유치한 장난 같아 어색한 웃음이 났다. 지훈도 마찬가지인지 서영을 보며 아이 같은 미소를 보였다. 평소 그에게서 보지 못한 눈빛이라 잠시 둘 사이의 공기가 달라지는데 그 순간 탕비실로 누군가 들어섰다. 영업 팀 지선이었다.

    “손가락 걸고 뭐 해요, 두 사람?”

    “아.”

    서영도 지훈도 급하게 손을 풀었다. 마침 서 차장에게 전화가 들어왔고 그는 얼른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지선은 얼른 서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서 차장으로 바뀐 거야?”

    “아니에요. 그런 거.”

    서영은 고개와 손을 동시에 저었다.

    “윤 대리는 아닌지 몰라도 서 차장은 맞는 거 같은데?”

    지선이 음흉한 눈빛으로 지훈이 나간 문 쪽을 바라봤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눈치가 빠르기론 회사 내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그녀이니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말이지만, 서영은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감정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았다. 서지훈. 그에게선 태욱에게서 느꼈던 설렘과 떨림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서영은 또다시 어제의 봄밤이 떠올랐다. 정말 병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자기 오늘 저녁에 뭐 해?”

    지선이 뒤늦게 용건을 말했다.

    “저, 별다른 일은 없어요.”

    “그럼, 나랑 놀자.”

    “네? 집에서 기다리는 분…….”

    “그분, 출장 갔잖아. 강 팀장이랑 같이.”

    “아…….”

    서영은 탕비실 유리창 너머로 태욱의 텅 빈 집무실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은 해방이란 거지. 그 첫날을 축하하는 의미로, 오늘은 내가 쏜다. 뭐든 좋으니까 달려 보자고. 오케이?”

    싫다고 거절하면 퇴사를 기다리는 일주일이 조금 더 길어질 것만 같아 서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되었단 생각도 들었다. 퇴근 후 텅 빈 집으로 돌아가 멍하니 앉아 있어 봤자 태욱과의 시간들을 되새기는 일밖에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얼른 시간이 흘렀으면. 이 소란스러운 마음이 잠잠해지는 순간이 찾아왔으면. 서영은 그것만 빌고 또 빌었다.

    지선과 서영이 퇴근 후 저녁 겸 술자리의 안주로 선택한 음식은 매콤달달한 닭발이었다. 먹고 나면 그다음 날 화장실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민망함이 후유증으로 남지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는 최고인 메뉴였다.

    서영은 지선과 친해지고 퇴근 후 자주 어울려 다니며 평소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영업 팀이라는 특성상 술자리가 많고 거래처 사람들과 자주 식사를 해야 하는 지선은 맛도 있으면서 독특한 음식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상대의 마음을 홀리는 데 먹는 것만큼 좋은 미끼가 없다고 했다. 인간이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기분이 좋아지게 되어 있고, 그때야말로 영업의 피크 타임이라며 그녀의 노하우를 서영에게 설파하기도 했었다.

    매일 책상에 앉아 홍보 문구를 생각하는 서영으로선 알아 봤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들이었지만 그녀는 지선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서영보다 한 살이 많은 지선은 재치 있는 입담과 더불어 분위기로 상대를 제압하는 화끈한 매력도 지녔다. 한마디로 평범하고 수더분한 서영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끌리고 호기심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태욱을 좋아한 것처럼.

    “강 팀장은 진짜 잊은 거야?”

    노릇노릇 잘 구워진 닭발 하나를 그녀의 앞접시에 놓아 주며 지선이 물었다.

    두 사람은 벌써 소주 두 병을 비운 상태였다. 서영은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주량이 센 편이었고, 지선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잘 마시는 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합이 잘 맞았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종종 서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잊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서영은 쓸쓸하게 웃으며 소주잔을 들었다.

    “내 유용한 소식통에 의하면 강 팀장 그 결혼 엎었다는 얘기가 있어. 아무 문제 될 게 없다니까 그러네.”

    언제 또 그의 파혼 소문이 돈 것일까. 정말 가십 하나는 빠르게 퍼지는 동네였다.

    “그거랑 상관없어요. 이젠 정리해야죠.”

    “내가 아쉬워서 그러지. 나는 서 차장보단 강 팀장 쪽이야. 원래 정반대인 사람한테 끌리게 되어 있거든. 자기야 호감 있는 거 맞고, 강 팀장도 혹시 모르잖아?”

    아니라는 걸 어제 확실하게 듣고 왔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서영은 지선이 의미 없는 일에 계속 마음을 쓰는 게 미안해서 입을 열었다.

    “사실 저 사직서 냈어요.”

    “뭐?”

    닭발을 굽던 지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좀 쉬려고요. 아직 서 차장님밖에 몰라요. 이 대리님한테는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동안 이 대리님 덕분에 잘 버틸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

    “뭐야, 왜 그래?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는 게 어디 있어? 합병하고 나서 다들 악착같이 버티려고 용을 쓰는데. 혹시 무슨 일 있었어? 누가 우리 자기 괴롭힌 건데?”

    역시 지선은 거짓말이 쉽게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영은 모든 일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들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태욱에 대한 미련만 더 남게 될 것이고, 지선까지 속상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괴롭히긴 누가 괴롭혀요. 그냥…… 번아웃이에요.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고 반복하는 게 지겹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아무튼…… 무슨 일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연애를 좀 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강 팀장이 아니다 싶으면 또 다른 남자 만나 보면 되잖아. 안 되겠다. 우리 신랑한테 좋은 후배 없는지 지금 바로 물어보자.”

    “아니, 그러지…….”

    말라고, 말리려 했지만 지선은 이미 핸드폰을 손에 들고 통화 버튼까지 누른 상태였다. 직장 동료의 소개팅 때문에 중국으로 출장 간 남편에게 이 밤에 전화를 건단 말인가. 서영이 알기론 지선의 남편인 박훈재 변호사는 아내의 음주 가무를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오늘 자리도 그가 출장 간 틈을 타 마련한 것인데 모두 들키게 생겼다는 걸 모르는 건가.

    “여보. 자기, 지금 통화 가능?”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았다. 지선의 눈은 이미 취해 있었다.

    “아니, 술? 내가? 나 여기, 지금 커피숍이야. 윤 대리랑. 윤, 서, 영, 대리. 몰라?”

    목소리 톤마저 너무 높았다. 서영은 괜스레 공범이 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얼른 전화를 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바디랭귀지를 해 보았지만 지선은 오히려 남편을 더 자극했다.

    “그래. 술 좀 마셨다, 왜? 내가 남자랑 마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 윤 대리랑 마시는데 당신이 왜 화를 내? 이렇게 간섭받을 줄 알았으면 나 이 결혼 안 했어. 누가 하자고 했다고? 내가? 이봐요, 박훈재오리 씨. 내가…… 어? 여보세요? ……강 팀장님?”

    조마조마하게 지선을 지켜보던 서영은 태욱을 지칭하는 말이 나오자 모든 동작이 일시 정지 된 채 숨을 멈추고 말았다. 박 변호사와 그가 함께 있는 건가. 그래, 같이 출장을 갔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네. 누구요? 아, 윤 대리요?”

    그런데 지선이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서영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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