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5화 (5/75)
  • 2. 추측과 단념, 망상과 오해 (3)

    불편하게 먹었던 물이 뒤늦게 목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제대로 걸린 것만 같았다. 서영이 얼굴까지 빨개지며 기침을 하자 태욱은 얼른 자신의 물잔을 그녀 앞에 놓아 주었다. 서영의 물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급한 대로 그가 마셨던 물을 목 안으로 밀어 넣어 기침을 잠재우던 서영은 태욱과 물을 나눠 마셨다는 사실에 자신이 더 놀라고 말았다.

    “그거 알아요? 윤 대리 지켜보고 있으면 재미있어요.”

    “네?”

    “꼭 원맨쇼 보는 것 같다고 할까.”

    태욱이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모든 게 확실해졌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그저 유희거리로 받아들인 것이다. 서영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자존심도 상했다. 고백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당연히 약자로 여기는 것인가.

    “어제는…… 죄송해요. 그냥 잊어 주세요.”

    서영의 발뺌에 태욱이 이번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눈매는 더없이 차가워졌다. 전체 회의 때마다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 눈빛이었다. 서영은 쫄지 말자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손끝이 떨려 테이블 밑에서 두 손을 맞잡아야 했다.

    “윤 대리는 고백도 취소도 쉽군요.”

    태욱의 입장에선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백이 5년 동안 끌어온 감정의 결과물이란 걸 말할 순 없었다.

    “하나만 묻죠.”

    서영은 물잔만 바라보다 태욱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감정이 있어서 말한 건 맞습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서영은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만, 즉흥적인 마음이었어요. 술도 마셨고, 팀장님이 파혼하신단 말을 엿듣게 돼서 저도 모르게……. 통화하신 거 몰래 들은 것도 죄송합니다. 아무튼 신경 쓰실 필요 없으세요.”

    그는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얼굴이 뚫릴 것처럼 태욱의 시선은 단숨에 불쾌감으로 사나워졌다.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남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경험해 보니 평범한 서영이 상대하기엔 여러모로 벅찼다.

    “이미 신경 쓰게 해 놓고, 신경을 쓰지 말라니.”

    태욱이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을 했다.

    “내가 책임지고 있는 팀원이 고백을 했는데,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고작 하루지만 진지하게 고민해 봤고, 내 뜻을 전하려고 했는데. 하루 만에 취소라…….”

    서영은 뭔가 이야기의 흐름이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그녀는 또 ‘왜’라는 물음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 줄 것이라 생각하고 저지른 고백이 아니었다. 5년 짝사랑에 대한 마무리. 그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일방적인 한풀이였다.

    “이런 일이 잦은 편입니까?”

    “아, 아뇨.”

    서영은 얼른 대답했다.

    “그럼 내가 처음이에요?”

    태욱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음들이었다. 막다른 길에 서게 되면 서영은 모든 걸 이실직고해 버릴 것 같아 어떤 말도 쉽게 꺼내기 어려웠다.

    “…….”

    “불리해지면 입을 닫는 편이군요, 윤 대리는.”

    “아니, 그게 아니라……. 팀장님이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뭔지 모르겠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어제, 윤 대리가 날 원한 거였어요.”

    그는 사실 관계를 확실히 짚었다.

    “……무시하고 가셨잖아요.”

    그래 놓고 이제 와 이러는 그를 서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속상해서…… 사직서 낸 겁니까?”

    더 이상 숨기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서영은 솔직해졌다.

    “네.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도 이유가 되겠죠. 서로 마주하기 껄끄럽잖아요. 술 때문이라고 해도 원인을 제공한 건 저니까 제가 나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팀장님을 혼란스럽게 해 드렸으니,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서영은 솔직하게 털어놓아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그녀가 해야 할 말을 모두 전했으니 더 이상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서영은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껄끄럽다고 단정 지은 건 윤 대리 혼자 생각이지.”

    그의 대꾸에 서영은 잠시 태욱을 내려다봤다.

    “퇴사의 이유가 나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윤 대리가 책임질 일도 없고. 그러니까 앉아요. 처음으로 일행을 데려왔는데 밥 먹기도 전에 도망가면 내가 어떤 놈으로 보이겠어요? 더 이상 난처한 질문 안 할 테니까 밥만 먹고 가요. 강요 아니고 부탁입니다.”

    서영은 가방을 움켜쥔 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곧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심장을 조이던 남자는 어디 갔을까. 불쌍한 표정을 한 큰 개 한 마리가 그녀의 앞에 꼬리를 내리고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 이래서 5년을 좋아했지. 서영은 포기하듯 다시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태욱은 그제야 편안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다. 곧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이전만큼 불편하진 않았다.

    때맞춰 방 안으로 들어온 주인장이 된장찌개가 담긴 뚝배기를 두 사람의 수저 옆에 하나씩 놓아 주었다. 갖가지 나물 반찬과 두루치기, 노릇하게 구운 고등어 한 마리가 테이블 중앙에 자리했고, 솥에 담긴 밥을 퍼 각자의 몫으로 덜어 준 주인장이 솥 안에 물을 부어 놓았다. 그녀가 나가자 태욱은 서영을 보며 얼른 수저를 들었다.

    “먹읍시다.”

    “……네.”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다더니 그는 정말 밥만 먹었다. 서영은 배가 고프긴 했지만 음식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편한 자리가 아니니 당연했다. 괜히 체하기라도 하면 며칠은 고생이니 그녀는 소화되기 쉬운 나물 종류에만 젓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언제 그걸 지켜봤는지 태욱은 나물 그릇을 그녀 앞에 밀어 먹기 편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서영은 잠시 심장이 두근거리고 말았다. 제발, 이러지 마. 잘해 주지 마. 그런 말들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어제의 뜬금없는 고백은 그저 객기로 저지른 실수라고 잘 무마시켰지만 떨리는 가슴을 숨길 만큼 그녀는 노련하지 못했다.

    “고기도 생선도 안 좋아하는 거면 시키지 말 걸 그랬습니다.”

    태욱은 뒤늦게 그녀에게 싫어하는 음식을 묻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했다.

    “아, 아뇨. 싫어하진 않는데…… 지금은, 다,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정말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이렇게 어수룩할 수가 없었다. 태욱이 원맨쇼를 보는 것 같다고 놀릴 만했다. ‘다이어트’란 말을 듣자마자 태욱은 서영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더니 그녀의 몸 쪽에 시선을 두었다.

    “여자들 기준은 모르지만 내가 볼 땐 마른 거 같은데.”

    “마, 마르긴요. 팔다리가 얇아서 그렇지 저 숨겨진 살이 많아요.”

    별소리를 다 한다 싶었다. 태욱은 또 그런가, 하며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생선은 괜찮지 않습니까? 그가 세심하게 가시를 바른 생선 살을 그녀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서영은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행동이 너무 다정해서 가슴이 뜨겁게 데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런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집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볼 수 있는 현실감 없는 남자였고, ‘다정’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를 회사가 아닌 곳에서 만난 적은 없지만 분명 그럴 것이라 추측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들은 모두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일 뿐이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먹어요.”

    어느새 그의 그릇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서영은 얼른 이 자리가 끝나길 바랐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지금이 소중해 시간을 끌고 싶기도 했다. 오락가락하는 감정은 짝사랑이 남긴 모순점이었다.

    “저도 다 먹었어요.”

    서영은 밥을 남긴 채 수저를 내려놓았다. 시간을 더 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국 그의 말을 정리해 보면 그녀의 고백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 때문에 퇴사할 필요가 없단 말을 하고 싶었던 거고, 그게 이 면담 자리를 만든 이유일 것이다. 이해되는 행동이었다. 어쨌든 그는 고백을 받았고, 그로 인해 팀원이 퇴사를 한다면 책임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서 없던 일로 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그럼 일어날까요?”

    태욱은 망설임 없이 벗어 둔 겉옷을 집었다. 정말 그는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선택은 서영 쪽에서 하라는 뜻이겠지.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이제 와 다시 말을 번복하는 것도 우스웠다. 서영은 마음을 다잡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가게 앞마당으로 나온 서영은 차 쪽으로 향하는 태욱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내려가는 버스는 없어요. 택시도 잘 안 올라오고.”

    그녀의 융통성 없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걸어서 내려가도 괜찮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태욱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밥만 먹고 일어나려고 했어요. 제 실수에 대해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퇴사에 대한 제 뜻은 똑같습니다. 그러니 잘 마무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서영이 제 말만 하고 돌아서려는데 태욱이 불쑥 그녀 옆에 따라붙었다.

    “밤이라 어두워요.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서영은 멍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태욱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또다시 재미난 표정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거지. 사람을 괴롭히는 게 취민가. 그래, 그러니 골치 아픈 팀장 자리에 앉아서 매일 부서 책임자들을 모아 놓고 답도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해결점을 찾아오라고 눈빛 하나로 목을 조르지.

    서영은 포기하듯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벚꽃이 떨어지는 늦봄이었고, 날리는 꽃들이 눈처럼 떨어지는 밤이었다. 이 모든 게 꿈인 것만 같아 서영은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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