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추측과 단념, 망상과 오해 (2)
태욱은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서류를 훑고 있었다. 차 앞으로 천천히 다가선 서영은 조수석 쪽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태욱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대전까지 출장을 다녀온 고급 세단은 어느새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닦여 있어 그 안으로 몸을 들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어색한 몸짓으로 차에 올라탄 서영은 문을 닫은 뒤 가만히 앞만 바라보았다.
“뭐 좋아합니까?”
태욱이 서영 쪽을 보며 물었다. 서영은 그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지만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퇴사에 관한 면담을 빨리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배 속에서 또다시 배고픔의 신호를 보냈다. 그 소리가 태욱에게까지 전해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차 안은 너무 좁고 그의 귀는 너무 밝았다.
“금방 나오는 걸로 먹어야겠군요.”
“아뇨.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저는. 근처 해장국집이라도…….”
말을 꺼내 놓고 서영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면담의 장소로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태욱과 해장국은 어울리지 않았고, 그가 그런 음식을 먹는 모습 또한 상상되지 않았다.
“뭐, 어제 그렇게 마셨으니…….”
태욱은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서영은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는 솔직한 말로 상대의 입을 막아 버리는 기술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원래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당연히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일지도 몰랐다. 이런 남자에게 서영 자신처럼 쭈뼛거리며 한 박자 늦는 사람은 얼마나 답답할까.
“진짜…… 해장국 드시게요?”
“먹고 싶다면서요?”
태욱이 되물었다.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리자 서영은 지금 이 남자가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연유로 그녀를 붙잡아 저녁까지 먹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일 때문에 그녀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저녁 먹자고 하신 분은 팀장님이세요.”
서영이 가라앉은 얼굴로 대답했다.
“기분 나쁜 거예요?”
태욱은 눈치가 빨랐다. 단번에 그녀의 기분을 읽었다.
“굳이 저녁까지 사 주시면서 면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서 차장님한테 퇴사 이유 말씀드렸고, 그 생각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굳이 왜 지금까지 날 기다린 겁니까?”
“……네?”
“윤 대리가 거절해도 문제 될 거 있습니까? 어차피 나갈 사람인데. 팀장이 면담을 요청했다고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저녁까지 거르고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태욱이 서영을 보며 얄밉게 웃어 보였다. 이런 면도 있는 남자인가. 서영은 지금까지 그녀가 알고 있던 태욱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란 생각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의 말에 반박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지금이 부끄럽고, 또 서글펐다.
“팀장님 말씀대로 어차피 나갈 사람인데 잘 마무리하고 싶기도 했어요. 아니…… 아닙니다. 네. 이것도 어쩌면 잘 포장된 핑계겠죠. 솔직하게 말하면 제 자리가 누굴 거절하고 그럴 위치가 아니라서……. 거기에 너무 익숙해졌나 봐요.”
거짓 없이 마음을 내보이니 오히려 시원했다. 서영은 퇴사 결심을 한 게 잘한 일이라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태욱에게 이런 말도 건네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 저녁 식사는 거절하고 싶다는 겁니까?”
태욱은 서영이 선을 넘는 말을 건넸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꼭 밥을 먹으면서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내가 윤 대리와 꼭 밥을 먹고 싶은 거면?”
“…….”
그의 장난 같은 되물음에 서영은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어야 했다.
“기다리게 한 게 미안해서 그래요. 해장국은 다음에 기회 될 때 먹고, 오늘은 내가 잘 가는 한정식집으로 갑시다. 음식이 금방 나오는 편은 아니지만 기다린 시간만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어때요?”
태욱은 서영에게 허락을 구하듯 물었다. 분명 거절하고 멋있게 차 문을 열고 나서는 게 맞았다. 하지만 서영은 진심이 담긴 눈으로 ‘미안하다’고 하는 그의 사과와 ‘다음에’라는 여지를 두는 낱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벨트는 맸으면 하는데. 내가 해 줘야 합니까?”
“아. 아뇨! 제, 제가 할게요.”
서영이 화들짝 놀라며 얼른 벨트를 채웠다. 그 모습을 본 태욱은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그도 먼 거리를 운전하고 오느라 배가 많이 고팠다. 오늘 저녁은 샌드위치로 급하게 때우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차의 속도를 높였다.
한정식집은 예상과 다르게 남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욱과 어색한 공기를 견디며 목적지까지 오느라 서영은 바깥 공기가 너무나 그리웠다. 그가 차를 주차하자마자 얼른 문을 열고 내린 후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봤다. 답답했던 체증이 조금 내려가는 것 같았는데 곧 뒤에서 들린 그의 목소리에 다시 긴장한 서영은 심장이 뛰었다.
“이렇게 불편해하면서…….”
뒷말을 삼키며 웃은 태욱이 여유 있게 차 문을 잠갔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은 되었다. 이럴 거면서 고백은 어찌 했느냐는 눈빛이었다. 서영은 태욱의 눈을 피하며 식당 입구 쪽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태욱이 그런 그녀를 뒤따르면서 엷은 미소를 보였다. 어쩐지 그의 웃음이 잦아진 기분이었다.
“어머나. 강 팀장님, 연락도 없이.”
소담한 공간 안으로 들어서자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그들을 맞았다. 식당은 개별적으로 나눠진 방 몇 개가 전부였다. 태욱이 이런 곳을 좋아할 줄은 몰랐던 서영은 뒤에 서 있는 그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그가 잠깐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죠? 갑자기 생각나서 왔습니다. 자리 있습니까?”
예약하지 않으면 허탕을 칠 것이 뻔해 보이는 곳이었다. 서영은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욱과 또다시 둘만의 공간 안에 갇히는 건 고역이었다. 자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가까운 커피숍에라도 들어가 빨리 면담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없어도 팀장님이라면 만들어 드려야죠.”
그녀의 바람은 주인장의 친절한 미소와 함께 보기 좋게 날아가 버렸다. 태욱은 감사하다며 서영보다 먼저 사장님이 안내하는 공간으로 향했다. 서영이 그 모습을 지켜만 볼 뿐 움직이지 않자 그가 그녀 쪽을 돌아봤다.
“윤 대리, 이제 와서 도망가기엔 늦은 거 같은데.”
“도, 도망이요? 아닌데요. 화장실 가려고요. 먼저 들어가 계세요.”
서영은 얼른 핑계를 가져다 대고 화장실 팻말이 붙은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뒤쪽에서 또다시 태욱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그래, 이런 그녀를 놀리는 재미가 있겠지. 서영은 포기하는 마음으로 화장실을 다녀온 뒤 태욱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뭘 좋아합니까? 여긴 된장찌개가 메인인데. 김치찌개도 나쁘진 않습니다.”
태욱이 서영의 앞에 메뉴판을 내밀었다. 그는 이미 이 집의 음식을 모두 맛본 사람이니 볼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선택을 그녀의 몫으로 넘겼다. 서영이 잠시 메뉴판을 내려다보는 사이, 그는 익숙하게 잔에 물을 따르고 그녀 앞에 놓아 주었다. 그 물잔에 놀란 건 오히려 서영이었다. 번쩍 고개를 든 그녀가 태욱을 바라보고 있자 그는 또 잠깐 웃음을 보였다.
“혹시 이런 거 못 할 사람으로 봤습니까?”
“아, 그게…….”
“솔직히 할 기회는 별로 없어요. 여기도 혼자만 조용히 왔다 가는 곳이니까.”
그런 장소에 그녀를 데려왔다는 것도 서영은 의아했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무엇보다 그가 어제, 그녀의 고백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있다는 게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어떤 답도 하지 않았으니 거절한 것으로 봐야 맞았지만 그렇게 말조차 없던 사람이 다음 날 갑자기 면담 자리를 마련해서 저녁까지 사 주고 있는 게 정상적이지는 않아 보였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녀의 퇴사를 막고 싶은 것이라기엔 이제까지의 행동이 설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주 보기가 부담스럽지 않을까. 자신을 좋아한다는 여자에게 마음이 없으면서 이러는 건 냉정하고 심플한 평소 그의 품행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자 서영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바람둥이. 문어 다리. 나쁜 남자. 그에 대한 입증되지 않은 소문들이 많았다. 서영은 전부 다 믿지 않았지만 그가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었다.
“생각이 많은 편입니까?”
“네?”
서영이 놀라 움찔했다.
“메뉴를 못 정하는 것 같아서.”
“아, 저는…… 한식이면 다 괜찮으니까 팀장님이 알아서 주문해 주세요. 지금 배가 고파서 뭐든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영은 오랜만에 제대로 제 의견을 전달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태욱은 얼른 주인을 불러 간단하고 빠르게 주문을 넣었다. 특별히 더 신경 쓰겠다고 말한 주인이 문을 나서다가 서영을 바라본 시선엔 어쩔 수 없이 호기심이 가득했다. 여태껏 혼자서만 왔다고 했으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서영은 방석까지 깔린 자리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뭔가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색함과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는 연신 물잔을 들어 올렸다.
“무슨 얘기부터 할까요?”
태욱이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 했다. 서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잔을 내려놓고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로 했다. 퇴사에 관한 그녀의 확고한 의견을 전달할 때였다.
“나는 윤 대리 고백부터 얘기했으면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