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추측과 단념, 망상과 오해 (1)
태욱이 눈을 떠 앞을 바라봤다. 서지훈 차장이었다.
“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서 차장이 들어섰다. 태욱의 앞으로 다가온 그가 책상 위에 놓인 서영의 사직서를 확인하고 태욱과 눈을 맞춰 왔다.
“아무래도 충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설득에 실패했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친한 척을 하며 다니더니. 같은 대학을 나왔다고 했던가. 늘 붙어 있듯이 함께 일했던 시간들은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처럼 사람 하나 붙잡지 못한 서 차장은 항복의 깃발을 들고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섰다.
“내가 만나 보죠.”
“……네?”
태욱의 반응은 의외였다. 서영이 아무리 마케팅 팀의 에이스라고 해도 전체의 눈에선 그저 한 부서의 대리일 뿐이었다. 누가 퇴사하고 어느 신입이 부서 이동을 하는 것까지 신경 쓸 자리는 아니었다. 그저 부서의 책임자들에게 일임할 문제였다. 그리고 이제까지도 그렇게 일을 처리해 오던 사람이었다. 지훈은 태욱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팀에 중요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태욱이 오히려 지훈에게 되물었다.
“아,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많이 힘들어했다는 걸 몰랐습니다. 제가 챙기지 못한 것도 맞고요. 쉬고 싶다는데 붙잡는 건 업무 능률적으로도 회사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서 차장.”
태욱이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 조용히 그를 불렀다.
“네. 팀장님.”
“여기, 신나서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나부터가 3일 연속 야근 중입니다. 서 차장 말대로라면 나도 업무 능률적으로 회사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겠군요.”
“…….”
지훈은 더 이상 말을 가져다 붙일 수 없었다.
“버티고 참는 것도 업무 중 하나입니다.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붙잡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퇴사의 이유가 과부하라면 업무부터 다시 분담하고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이라면 윤 대리의 자리에 어느 누가 들어와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서 차장이 더 잘 알 거라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지훈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솔직히 그의 속마음은 서영을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5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그였다. 대기업에 안정적인 직장이었지만 그만큼 업무 강도가 센 편이었다. 만약 서영이 그와 결혼이라도 한다면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일을 할 수 있을까. 사내 연애를 암묵적으로 금지하는 회사 분위기에 맞추다 보면 누구 하나는 부서 이동이나 퇴사를 결정해야 했다. 지훈은 지금이 어쩌면 가장 적합한 시기라는 생각을 했으나 총괄 팀장인 태욱이 반대하고 나선다면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윤 대리 생각이 워낙 확고해서 설득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오후에 대전 부지 다녀온 후에 내가 면담하죠. 그렇게 전달해 주세요.”
태욱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서류를 잡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지훈은 어쩔 수 없이 돌아서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서영이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왔지만 그는 그저 웃어 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본 태욱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업무에 집중한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달라 보이기도 했다. 지나친 추측일 뿐이라 생각하며 지훈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퇴근 시간을 넘기고도 한 시간은 지나 있었다. 서영의 배 속에서는 눈치 없이 꼬르륵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속도 불편했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상태가 아니라서 점심을 건너뛴 탓이었다. 한 끼 정도 무시했다고 이렇게나 솔직하게 욕구를 표현하는 몸이라니. 이 상황에서 눈치를 잊은 자신의 배 속을 원망하기도 우스웠다.
서영은 인터넷 서핑을 그만두고 시계를 바라봤다.
[조금 늦습니다. 미안합니다.]
태욱에게서 온 문자는 간단했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오히려 당당한 느낌이었다. 그가 면담을 요청했다는 말을 지훈에게서 전해 들었을 때 서영은 잠시 얼이 빠진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고백이라면 회식 때 그렇게 무시하고 끝난 문제가 아닌가. 퇴사 때문이라면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부서 책임자인 지훈의 선에서 처리하고 넘어갈 일이었다. 부서 직원들의 퇴사와 입사에 일일이 관여하는 총괄 팀장이 어디 있다고. 무엇보다 그는 이사진에 버금가는 일을 처리하며 일주일의 반은 지방으로 출장을 다녀왔으며, 야근이 일상인 사람이었다.
오늘도 대전 부지를 둘러보러 가면서 굳이 돌아와 서영을 만나겠다고 했다. 그가 하려는 말이 뭘까. 서영은 하루 종일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술을 무기로 건넨 그녀의 무례한 고백에 대해서 사과라도 받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해 주고 말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다른 이유로 퇴사할 마음을 먹었고,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그에게 고백한 것이었다.
서영은 저절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왜 술을 넘치게 먹어 가지고서는. 혼자서 깔끔하게 마음 정리를 하고 퇴사하면 되었을 텐데. 그랬으면 지금처럼 태욱의 얼굴을 보는 일이 껄끄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녀의 마음을 안다고 달라질 것이 없는데.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서영은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윤 대리, 퇴근 안 해?”
옆 부서의 이지선 대리가 서영의 자리로 다가왔다. 지훈 다음으로 회사에서 가깝게 지내는 그녀는 신사업 팀에서 유일하게 태욱에 대한 서영의 마음을 눈치챈 사람이었다. 서영이 혼자만의 짝사랑이라고, 깊은 마음이 아니라고 먼저 선수 치듯 말을 돌리자 그녀는 이해한다며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만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비밀 사내 연애를 끝내고 결혼에 골인한 그녀는 예전처럼 서영과 함께 시간을 나눌 여유가 줄어들었다. 오늘도 먼저 퇴근한 남편을 회사 앞에서 기다리게 하고, 남은 업무를 전속력으로 처리하느라 마스카라가 다 번진 줄도 모른 채 서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아직 일이 남았어요.”
서영은 태욱과 면담이 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럼 지선은 무슨 이유인지 물을 것이고, 그녀는 퇴사와 더불어 회식 자리에서의 고백 사건에 대해서까지 모두 털어놓고 말 것이다. 지선은 없던 일도 털어놓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영업 1팀의 에이스였다.
“하여튼 적당히 하라니까. 서 차장도 퇴근하고 없네, 뭘 그렇게 열심히 충성해. 그렇다고 연봉 더 올려 주는 것도 아닌데. 나 봐라. 결혼했다고 핵심 사업엔 다리도 못 걸치게 하고, 잡무만 왕창 몰아줬잖아. 내가 이런 대우 받으려고 코피 쏟으면서 계약 따낸 줄 아나. 더러워서 그만두고 싶어도 이번 달 카드값이 지옥이고, 또 우리 강예인 님이 여기 계시니까…….”
지선이 태욱의 집무실을 올려다보며 말을 꺼내려다 서영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잠깐 잊었다며 눈짓을 보냈다. 서영은 괜찮다며 웃었다. 태욱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가 어디 한둘인가. 게다가 결혼한 사람들도 그저 태욱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힐링이 된다고 했다.
이 회사 안에서 드라마 속 팀장과 모습이 동일한 사람은 강태욱 한 명뿐이라고. 오죽하면 여직원들의 1순위 희망 부서가 신사업 팀일까. 서영은 자신의 자리가 공석이 된다면 이곳에 앉으려는 경쟁이 치열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전 조금만 더 하고 갈 테니까 이 대리님은 얼른 가서 쉬세요.”
서영이 얼른 대화를 정리했다. 태욱이 언제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우리 신랑 밑에서 기다리는데 이러고 있다.”
지선이 뒷걸음질 치며 서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누군가와 부딪쳐 몸을 휘청거렸다. 그녀를 붙잡은 손길은 강태욱 팀장의 것이었다. 지선이 눈을 키우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팀장님. 퇴근하신 거 아니었어요?”
당황해 얼굴이 붉어진 지선이 말까지 더듬으며 태욱을 바라봤다.
“일이 남았습니다. 이 대리는 이제 퇴근입니까?”
“아, 네. 전 이제 하려고요.”
“얼른 가 보세요. 누가 기다리느라 화가 잔뜩 난 거 같던데.”
“어머나.”
지선은 붉어진 얼굴이 돌아올 새도 없이 다시 달아올랐다. 그녀의 남편인 훈재는 회사 법무 팀 소속의 변호사로 태욱과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훈재는 태욱의 권유로 회사에 입사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친분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다 해도 훈재가 자신의 팀원과 사내 연애를 했다는 사실을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몰랐던 태욱은 아직도 친구에 대한 서운함이 남아 있었다.
“이 대리 퇴근이 늦는 걸 왜 나한테 따지는지 모르겠지만 잘 설명해 주길 바랍니다.”
“아, 이 인간이 진짜……. 네네. 죄송해요, 팀장님.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지선은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지도 못한 채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 정적이 내려앉으며 태욱의 시선이 자리에 앉아 있는 서영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서영은 긴장감에 저절로 숨이 멈춰졌다. 그가 천천히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괘…… 괜찮습니다.”
“우선, 저녁 식사부터 합시다.”
“……네?”
서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설마, 밥 먹었습니까?”
태욱이 다르게 이해하고 물었다.
“아, 그건 아닌데…….”
“정리하고 나와요. 지하 주차장 2층 B라인 12번에서 봅시다.”
그는 다시 돌아서 걸어 나갔다. 서영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식사를 하자고? 밥이 제대로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는가.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나 싶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모든 생각은 무의미했다. 서영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가방을 챙겼다. 사무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태욱은 그 말을 하려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온 것인가. 간단히 핸드폰 문자로 장소를 알려 줘도 될 텐데. 서영은 하루 종일 추측과 단념, 망상과 오해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술이 아직 덜 깬 것만 같아 머리를 두드리다 유리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하루 종일 업무에 치여 눈 밑으로 다크서클까지 내려온 여자가 보였다.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서영은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반복해서 지하 주차장 2층 B라인 12번만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