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례한 고백 (2)
회사 정문에서 모퉁이를 세 번 돌아야 나오는 작은 찻집은 서영이 이전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주 고객층이 회사원들이라 오전 일찍 문을 열고 오후 3시가 되면 문을 닫는 곳이었다. 아침 일찍 부지런을 떨어서 일부러 시간을 내거나 점심시간을 반납하지 않으면 여유 있게 들를 수 없는 곳이란 소리였다.
서영은 주문을 마치고 그녀가 좋아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업무 전화가 걸려 온 지훈은 잠시 카페 밖으로 나가 통화 중이었다. 그녀는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내부를 둘러봤다. 이제 이곳도 안녕이란 생각이 들었다. 퇴사하면 굳이 여기까지 와서 차를 마실 이유가 없었다.
모두들 퇴사 이후엔 회사가 있는 방향으론 잠조차 자지 않는다고들 했다. 퇴사 결심을 할 만큼 직장 생활이 힘들었던 이들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서영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지만 그 마음이 공감이 됐다.
“미안, 옥외광고 때문에. 벌써 반응이 난리네. 역시 강 팀장 얼굴 쓰길 잘했어.”
지훈이 요즘 붙들고 있는 업무는 도시정비사업의 시공사 경쟁 마케팅이었다. 대형 건설사들이 전부 달려든 이번 사업은 강태욱 팀장이 특히나 신경 써서 준비 중인 신사업 팀 제1순위 프로젝트였다. 그만큼 마케팅에 전적으로 올인해야 했고, 그 어느 때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했다.
강태욱 팀장을 옥외광고 모델로 내세우는 게 어떠냐는 의견은 다름 아닌 서영의 머리에서 나왔다. 조합원 투표로 결정되는 수주 전쟁에서 건설사 직원의 얼굴을 알리는 것만큼 효과적인 광고는 없었다. 더군다나 깔끔하고 신뢰감 높은 비주얼을 갖춘 태욱의 마스크는 전문 모델들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 얼굴 덕분에 새롭게 변화한 유신건설을 알리고 이슈화시킬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태욱이 허락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었다. 무엇이 아쉬워서 얼굴까지 팔까. 평소 그의 성격대로라면 냉정하게 잘라 내고 다른 방법을 찾아오라고 했을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마케팅 제안서를 확인한 태욱은 아이디어에 대한 칭찬까지 내놓았다. 지훈은 그런 점에서 태욱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한 번 더 실감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납득하고 받아들인 일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이번 도시정비 프로젝트 또한 그랬다.
“바쁘시니까 사직서 얘기부터 할까요?”
자신이 낸 아이디어가 대박을 쳤다는 소리에도 서영은 관심이 없었다. 지훈은 일부러 더 광고 얘기를 이어 가려 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윤서영. 너 선배 무섭게 이럴 거야?”
지훈은 일단 선배 카드부터 내밀었다. 그의 팀에서 가장 필요한 인물을 한 명만 뽑으라면 당연히 서영이었다. 합병이 가시화되면서 유신 쪽에서 인원을 삭감하라는 압박이 있었는데, 그때 지훈은 다른 팀원들을 다 자르고 서영만 남겨도 팀이 굴러갈 것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서영은 튀지 않았지만 제 몫은 깔끔하게 해냈고, 회사의 규칙과 규율에 어긋나는 법 없이 아주 완벽하고 적당한 표본처럼 행동했다.
대학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아리 선후배로 만난 두 사람은 회장과 총무로 두 학기를 보내며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가까워진 사이였다. 감투를 쓰는 게 얼마나 고단하고 헛된 일인지 1년 내내 몸소 체험하며 둘은 튀지 않는 인생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부터 고찰했었다.
“저 어제부로 서른 됐어요. 그래요. 뭐, 남들 다 통과의례처럼 지나는 거 혼자 유난 떤다 하시겠지만 저 일하는 5년 내내 제대로 휴가 한 번 가 본 적 없는 거 차장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좀…… 쉬고 싶어서 그래요.”
결국은 뻔한 이유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아예 지어낸 말도 아니었다. 서영은 분명 자신이 직장 생활에 지쳤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었고, 태욱에 대한 마음 정리는 그 마침표를 찍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됐을 뿐이었다.
“길게 휴가 줄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내가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지훈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지훈을 빼고 마케팅 팀에서 제대로 일하는 사람은 서영뿐이었으니, 그녀가 빠진다면 그의 업무에도 많은 지장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의리 때문에 회사에 남는다는 것도 우스웠다.
“선배, 내가 선배 여동생이라고 해도 이런 말 하실 거예요?”
피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한 방이었다. 지훈은 허무하게 웃어 버렸다. 정말 서영이 자신의 여동생이었다면 좋은 시절을 일만 하느라 아깝게 흘려보내게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본인이 싫다는 일을 억지 부려 설득할 생각도 없었다. 입사 때야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이 끝날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면 그저 스쳐 가는 시간일 뿐이었다.
“그래. 알았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지훈이 항복하듯 웃었다.
“감사합니다.”
서영이 꾸벅 목 인사를 건넸다.
“회사 그만두면 꼭 얼굴도 안 볼 것처럼 구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뭐?”
지훈의 되물음에 서영이 씩, 웃었다. 그녀의 웃음을 보는 게 오랜만이라 그도 더 이상 뒷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 윤서영이 말 잘 듣는 후배가 아닌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냐고 물으면 그도 잘 모르겠다. 그저 대학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그녀만의 편안함이 좋았다.
그도 여느 남자들과 다를 바 없이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를 쫓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서영은 사귀고 싶은 마음까진 들지 않는 여자였다. 친한 선후배 사이로 지내는 게 더 편한 사람이었는데, 무슨 인연인 건지 같은 회사에 입사해 한솥밥을 먹는 팀원이 되어 버렸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게 운명 같기도 했다.
서영이 회사를 그만두면 아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나, 달리 생각하면 좋은 점도 있었다. 지훈은 이제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서영이 퇴사하고 다른 곳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미뤄 둔 고백을 할 작정이었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지훈은 서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참고 감춘 채 그녀를 바라봤다.
● ◇ ●
사직서가 올라온 걸 발견한 건 오후 임원진 회의가 끝난 직후였다. 다음 주에 있을 중국 출장을 준비하기 위해서 쌓아 놓은 서류 더미 사이에서 태욱은 마케팅 팀 결재 파일을 집어 들었다.
고백 이후 퇴사라. 그의 입가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어 집무실 밖의 한 곳을 바라봤다. 그가 앉은 자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인 마케팅 팀 윤서영 대리의 자리였다. 그녀도 그것을 알까. 수시로 그의 동태를 파악하는 눈길이 유난스러워 더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가 여러 번이라는 걸.
태욱은 사직서를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울리는 전화를 꺼내 확인했다.
[지유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까지 갈 뻔한 여자였다. 다행히 여자에게는 남자가 있었고, 그것을 이유로 파혼을 종용하는 중이었다. 단번에 마무리되진 않을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여자는 생각보다 더 예의가 없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였다. 재벌가의 자식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네. 강태욱입니다.”
― 우리, 만나서 얘기하죠.
전화 통화로 파혼을 통보했으니 황당한 것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태욱은 더 이상 여자의 얼굴을 마주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는 시간이 금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더 할 얘기가 필요합니까?”
―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만나던 사람도 정리했고요. 그쪽, 아니, 강태욱 씨 집에도 얘기가 들어갔다네요. 할아버님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겠다고 하셨대요. 그럼 만날 이유 있지 않을까요?
이 여자의 뻔뻔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몸을 섞는 남자가 있으면서도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받아들이는 죄의식 없는 태도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닐 테다. 보고 자라 온 환경이 문제일 수도 있었고, 주변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만 차고 넘쳐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었다. 태욱은 여자를 한 번밖에 겪어 보지 않았음에도 모든 게 눈에 훤히 읽혔다.
아무리 억지로 받아들인 허울뿐인 손자라 해도 이런 인물을 반려자로 갖다 붙인 할아버지의 의도가 파악되자 씁쓸함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태욱은 사랑을 지켜 낸 부모님을 그 누구보다 존경했고, 그 역시 그런 평범하고 정상적인 결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연을 끊고 사랑을 택한 아버지가 죽고, 막다른 길에 서 있던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유신’의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이 당연한 꿈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을 인지해야만 했다.
다른 것들은 괜찮았다. 모두 상관없었다. 그것이 그가 ‘손인주’의 핏줄로 태어난 업이라 생각하면 되었으니. 하지만 결혼 문제만큼은 할아버지의 결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 하나만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제 부탁이었는데, 손 회장은 그것마저도 물러날 수 없다는 것처럼 그의 결혼을 장사처럼 취급하고 거래하듯 여자를 가져다 붙였다. 그것이 어머니의 성을 따른 태욱이 큰아버지의 아들인 철민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핑계를 방패 삼아.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게 다 영감이 제 욕심 채우기 위해 벌인 짓이라는 걸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그와 통화하고 있는 여자 역시 그러한 욕망으로 가득했다. 예상보다 유린과의 전화 통화가 길어지자 태욱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만나는 상대가 있으면서도 버젓이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었으면 누구여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굳이 저한테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건양물산이라면 유신건설이 아니라도 혼사를 맺고 싶어 하는 그룹이 줄을 설 텐데요.”
태욱은 손 회장의 논리대로 설명했다. ‘건양’은 ‘유신’보다 두 배나 더 큰 몸집을 가진 그룹이었다. 기업 합병이나 다름없는 정략결혼에서는 서로가 가져가는 몫이 같아야 합의할 수 있는 법이었다. 손 회장이 아무리 유려한 언변술로 상대를 혹하게 만들었다고 한들, 그쪽에서 계산기를 두드려 보지 않았을까. 한참이나 차이 나는 혼처에 막내딸을 덤핑 처리하듯 보내려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이 여자는 그의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토록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인가.
― 사랑이 바탕이 된 결혼을 하고 싶다면서요?
여자가 비웃는 것처럼 그가 했던 말을 되물었다. 태욱의 표정에서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정략결혼에 뜻이 없다는 걸 전하며 여자에게 건넨 말이었다. 이쪽 세계에서는 웃음거리가 되는 생각인 줄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의 태도가 유쾌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부족함 없이 자랐으니 가지지 못할 바엔 차라리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걸까. 태욱에게선 환멸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랑 그걸 해 보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 못 할 건 없죠.
확실히 장난감을 원하는 목소리였다.
“제가 그 뒷말은 생략을 했나 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제가 사랑하는 여자는 아주 평범했으면 합니다. 잘나가는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서 부족함 없이 자라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모든 상황을 장난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제 이상형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그런 여자를 아주 경멸하는 편이죠.”
하. 전화 너머에서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 탄성이 터졌다. 이렇게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라는 것처럼 여자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날을 세운 말들을 쏟아 냈다.
― 강태욱 씨, 지금 본인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예요. 당신 말대로 나는 이쪽 판에서 호박씨를 까는 인간들을 너무 많이 봐 와서요. 당신이라고 그놈들이랑 다르다는 보장이 있나요? 그쪽 할아버지가 ‘건양’으로 만족을 못 하시는 건지, ‘성화’ 알죠? 하필 우리 경쟁사 쪽으로도 찌를 던지시는 중이라던데. 사랑 같은 웃기지도 않는 핑계 갖다 대는 게 신선해서 봐주고 있긴 하는데, 난 그럴수록 더 오기가 생기는 사람이라. 아무튼 정말로 내 마음 접게 하려면 강태욱 씨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할 거예요. 그럼, 또 통화하죠.
딸깍. 예의 없이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태욱은 황당함에 웃었다. 네가 그렇게 반항할수록 일을 더 크게 키워 버리겠다는 것처럼 손 회장은 머리를 써서 빅 엿까지 제조 중이었다. 여자의 말처럼 태욱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누르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 똑똑,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