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원하는 나에게-1화 (1/75)

0.

그 악연의 시작은 사랑이었다.

1부

1. 무례한 고백 (1)

‘……그러니까, 가져 보고 싶어요.’

회식 자리의 술이 과했고, 주머니엔 사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녀의 뜬금없는 고백이 끝남과 동시에 눈앞에 담배꽁초가 떨어져 내렸다. 깨끗이 닦인 명품 구두의 앞코가 담배를 지그시 밟는 게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으나 취기가 올라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겁니까?’

서른 살 생일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이지만 짝사랑하는 직장 상사의 파혼 소식은 그녀에게 자신을 위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래, 모두 다 술이 부른 참사였다.

‘나랑 자고 싶다는 소린가, 윤서영 대리?’

‘네. 팀장님만 괜찮으시다면요.’

당신을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런 흔해 빠진 고백법은 아니더라도 중간은 있어야 하는데, 가도 너무 멀리 가 버렸다. 서영은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며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운 좋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걸 보니 그래도 아직 그녀의 인생에 행운이 남아 있는 듯해 잠깐의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곧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갔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서지훈 차장이었다.

“네.”

― 이거 뭐야?

직속 상사이자 대학 선배인 지훈이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마주한 건 책상 위에 놓인 서영의 사직서일 것이다. 어젯밤 쇼킹한 고백 사건의 결말은 너무도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로 흘러갔다. 그녀의 고수위 고백에 헛웃음을 삼키고 냉기를 뿜어내던 강태욱 팀장은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단번에 리셋한 표정을 짓고는 서영을 지나쳐 회식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그것이 가장 강력하고도 깔끔한 거절법이었다. 서영은 망설임 없이 회사로 돌아가 서 차장의 자리에 봉투를 올려 두었다. 사직서는 이미 미련 없이 작성되어 그녀의 가방 안에 한 달 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런 타이밍을 노렸던 것처럼 그녀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차피 태욱의 얼굴을 다시 볼 뻔뻔함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 이렇게 하는 게 맞았다. 서영은 얼른 후임자가 결정돼 인수인계가 빠르게 이뤄지길 바랄 뿐이었다.

― 어제 병나발 불다가 소리도 없이 사라지더니 고작 한다는 게 퇴사 결심이야? 불만 있으면 일단 말로 해. 윤 대리까지 안 더해도 나 요즘 골치 아픈 일 많다.

지훈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회사에서 가장 친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라고 대답할 만큼 현재 그녀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지훈이었다. 어떤 말로도 변명이 통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사실 그대로 말할 순 없었다.

“출근하는 길이에요. 가서 얘기해요.”

서영은 간단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멍하니 창밖 도시의 건물들을 바라보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가슴이 따끔하게 아프기도 했다. 5년. 짧지 않았던 짝사랑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 더불어 홀가분하게…….

다른 쪽으로 뻗어 나가려는 생각을 잠재우듯 서영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하늘은 눈치 없이 푸르렀다.

출근 루틴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올려다보는 것도 버거운 고층 빌딩 속으로 들어가 가방 안에 든 사원증을 꺼내 목에 걸고, 출입 통제기에 그녀의 신분을 인증한다. 띠리릭. 소속과 이름이 확인되면 출근 기록이 자동으로 등록된다. 그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사람들 틈을 비집고 그녀가 일하는 층수를 누른다. 잠시 멍하니 계기판의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우르르 내리는 다른 직원들을 보고 정신을 차린다.

13층에 도착해서도 다시 한번 사원증을 기계에 가져다 대야 했다. 그녀가 일하는 신사업 팀은 철저한 기밀 유지가 생명이라 보안이 이중으로 강화되어 있었다.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처럼 비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탁 트인 사무실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 달 전, 그녀가 다니던 중소 건설사는 급작스럽게 인수 합병 되며 대기업 산하의 계열사로 탈바꿈하였다. 회사 사람들은 모두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굴었다. 한순간에 대기업 직원이 된 것이다. 그 얼떨떨한 흥분 속에서 서영만이 홀로 끝없이 가라앉았다.

회사가 거대 신사옥으로 이전한 뒤 이름 또한 변경되었다. 유신그룹과 한 피라는 것을 강조하듯 ‘유신건설’로 사명이 정해지자 모두들 명함을 필요 이상으로 더 파 대기 시작했다. 작업 환경 또한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팀별 진영에서 오픈된 하나의 거대 집합체로 바뀌었다.

그 아이디어를 추진한 사람이 바로 강태욱 신사업 총괄 팀장이었다. 맨땅에서부터 집을 지어 최고의 값에 팔아넘기는, 회사의 이윤을 창출하는 데 가장 선봉에 선 인물.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낸 그는 창립 멤버인 이사진보다도 더 입김이 센 팀장이었다.

서영은 이 13층이 아직도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하나만은 그녀의 마음을 익숙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서영의 자리에서 눈을 들면 팀장 태욱의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위를 증명하듯 한 계단 위에 자리한 그의 집무실은 통유리로 한 번 더 둘려 있어 따로 분리된 느낌을 주었지만 이제껏 그가 통창의 블라인드를 내린 경우는 없었다.

투명한 업무 방식을 지향하는 태욱의 모토를 드러내는 티 나는 행동이었다. 그 덕분에 짝사랑을 앓는 이의 눈은 호강이었다. 다른 층에서 업무하는 직원들 중에 그녀의 자리를 부러워하는 이가 생겨날 정도였다. 왜 항상 명당 자리는 윤서영 대리가 차지하느냐고.

신사옥으로 옮기기 전에도 서영과 태욱의 거리는 가까웠다. 마치 그걸 누가 일부러 조정하고 있는 것처럼. 5년간 짝사랑이 식지 않은 건 아마도 그 이유가 8할일 거라고, 서영은 싱거운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것도 어쩌면 망상이 불러온 멍청한 미련일지도 몰랐다. 그걸 이제라도 깨달을 수 있었던 건 돌연 터진 태욱의 결혼 발표 때문이었다.

‘건양물산 막내딸이라던데. 음대 졸업하고 신부 수업만 했다더라. 아주 부러운 인생이지.’

구내식당 점심 메뉴로 특식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날이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매일이 다를 것 없는 직장인의 하루에서 직장 상사에 대한 가십은 식사 자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였다. 친한 동기 몇 명과 같이 밥을 먹는데 누군가 강태욱 팀장에 대한 소문을 풀어놓았다. 서영의 귀는 당연히 예민하게 열렸고, 밥을 먹는 속도도 자연스레 줄었다.

아니, 더 이상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했다. 결혼이라니. 애인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충격인데, 결혼 발표라고? 무방비 상태로 심장 안까지 잘린 것만 같았다.

‘강 팀장이 유신그룹 손 회장의 숨겨진 손자라는 소문이 돌던데. 그것 때문에 합병했다는 정보도 있고. 그렇잖아. 평범한 집안 사람이 어떻게 재벌이랑 결혼을 해?’

그의 사생활은 다른 이들보다 더 비밀스러운 점이 많았다. 겉모습부터 행동까지 평범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다. 광채가 나는 듯한 그의 주변엔 다른 공기가 흘렀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카리스마라고 했다. 태생이 만들어 낸 아우라라며 그를 신처럼 묘사해 버렸다.

외모에 대해서라면 서영도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큰 키에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몸. 알맞은 비율의 몸집과 조각처럼 새겨진 얼굴. 어디 하나 모자람이 없어 더 비현실적인 남자가 강태욱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름만 들으면 모두가 아는 재벌가의 일원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땐 서영도 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독보적인 외모만큼 그녀의 짝사랑이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생겨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모두들 그가 재벌 집 막내딸과 결혼을 약속했다는 소문에 당연한 일인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욱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의 레벨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서영은 나라라도 잃은 것처럼 정신을 놓은 채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포털 사이트에 ‘건양물산’을 검색했고, 막내딸이라는 ‘지유린’의 사진을 찾아냈다. 예상대로 예뻤다. 어느 여성 잡지에 실린 인터뷰 내용처럼 미스코리아 출전 제의를 받을 만큼 타고난 미인이었다. 경쟁자라고 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대결조차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여자의 사진을 보던 서영은 태욱의 자리를 올려다봤다. 그는 점심도 잊은 채 업무에 빠져 있었다. 달라질 건 없다는 것처럼 여전한 모습이었다.

서영의 머릿속엔 파노라마처럼 5년의 세월이 스쳐 갔다. 허탈함보다는 허무함이 먼저 찾아왔다. 마지막엔 고백도 해 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이 솟았다. 누군가를 이토록 좋아해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고, 자신의 마음이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봐 감추기에만 바빴다.

이제껏 특별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 교사로 퇴직한 아버지와 작은 어린이집 원장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나라가 지원한 의무교육을 무탈하게 받았고, 고만고만한 성적으로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에 입학했다.

학과에서 만난 동기들과 어울리다 어영부영 몇 학기를 보내고 정신을 차린 순간 대학 교육에 회의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라고 다를 순 없었다. 4학년 내내 도서관을 벗어나지 못하며 취업 준비에 매진했고, 그 결과 중소 건설사 홍보 팀에 입사하게 되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시간들을 견디다 보니 어느새 5년 차 마케팅 팀 대리가 되어 있었다. 평범한 인생이었기에 사랑과 연애에 대한 생각도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대학 시절엔 소개팅도 몇 번 나가 보긴 했지만 매번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서영 또래의 남자들은 적극적이고 자기 어필을 잘하는 여자들을 찾았고, 서영은 그런 타입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추구했다. 일부러 관심을 받으려 여우 짓을 하지도 않았고, 수수한 그녀에게 다가온 남자에게조차 자신이 정해 둔 선을 지켜 행동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껏 그녀의 심장을 떨리게 만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맞았다. 또한 솔로로 지내는 삶이 나쁘지도 않았다. 괜한 감정 낭비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싫었다. 그녀의 그런 연애 마인드를 불시에 흔든 남자가 강태욱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짝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굳이 정하자면 서영은 그날이 떠올랐다. 출근한 지 며칠째인지 숫자를 세는 것도 우스웠던 신입 시절의 어느 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으니 야근은 필수적이었다. 그 밤샘도 눈치를 봐야만 했던 신입 사원은 사무실에서 홀로 잠과 싸우며 맡은 일을 마무리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출출해진 배 속을 어쩌지 못하고 탕비실에 들어가 초코 과자를 허겁지겁 먹는데, 며칠 전부터 달랑거리던 블라우스의 단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줍기 위해 서영은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였다.

그 순간 탕, 문이 여닫히고 누군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 시간에 누가. 서영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입을 막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자 고급스러운 남자 구두가 보였다. 이 회사에서 방금 사 신은 것처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은 그녀가 알기로 강태욱이란 남자뿐이었다.

그저 말로만 전해 들어온 남자. 잘생긴 외모 때문에 그녀 또한 어쩔 수 없이 눈이 갔던 연예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 그가 급하게 약상자를 뒤져 자신이 찾는 것을 꺼냈고 냉장고를 열어 물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스르르 냉장고 문 앞에 무너져 내려앉았다. 눈을 감고 지친 표정으로 머리를 기댄 태욱의 모습이 서영의 눈에 새겨지도록 깊이 들어왔다.

두통이 심한 듯 그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강태욱의 약한 모습이라니. 서영은 보지 말아야 할 나쁜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귓가가 달아올랐다.

잠시 후, 눈을 뜬 그의 시선이 정확하게 그녀에게로 꽂혀 들었다. 네가 도둑고양이처럼 거기 숨어 있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서영은 변명조차 못 한 채 그의 시선을 받아 냈다. 의도치 않은 눈싸움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태욱이 시시하다는 듯 흐리게 웃었다. 그러고는 일어나 탕비실을 나가 버렸다. 서영은 놀란 것보다 가슴이 먹먹해져 버렸다. 그의 웃음이 너무도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동정이었을까. 그도 사람이니 분명 아플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리도 크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러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의 약한 모습. 마치 그의 비밀을 그녀만 알게 된 것처럼 태욱이 달라 보였다.

그다음 날부터 서영은 그를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탕비실에서의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멀쩡했고 여전히 차가운 상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태욱과 우연하게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기라도 하는 날이면 가슴 안쪽에서 찌르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전기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서영은 자신이 무슨 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다.

병원을 찾아가려고 증상을 정리하다가 사랑이라는 것을 떠올려 버렸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 감정인 걸까. 처음엔 당황했고, 그 이후엔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태욱은 그녀의 직장 상사였고, 더군다나 ‘사내 연예인’으로 칭송할 만큼 인기와 외모를 갖춰 ‘강예인’으로 불리는 만인의 연인이었다.

길고 긴 짝사랑의 서막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사직서 냈으면서 출근은 왜 이렇게 빨라.”

그녀가 자리에 도착하자 지훈이 일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반겼다.

“원래 습관이 무서운 법이죠.”

덤덤하게 받아치는 게 서영다워 지훈은 웃어넘겼다. 이번 일은 그저 작은 해프닝일 것이라 생각했다. 직장 생활 5년 차 정도 되었으면 한 번쯤 하던 걸 집어던질 때도 되었으리라는 게 그의 추측이었다. 그 역시 그랬고, 이 회사 안의 누구도 다르지 않았다. 아, 단 한 사람. 강 팀장이라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훈은 잠시 태욱의 자리를 바라보다 서영에게로 다가갔다.

일단 그녀의 마음부터 달래 주고 업무를 시작하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었다. 그게 그의 역할이었고. 또한 그에게 서영은 부하 직원 이상의 의미를 지닌 사람이었다. 아니, 여자였다.

“윤 대리 좋아하는 홍차라떼 먹으러 가자.”

“지금요?”

서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직원들의 자리는 드문드문 비어 있었다. 그녀의 팀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언제나 일찍 출근하는 지훈뿐이었다. 뭐, 그녀도 퇴사 문제를 속전속결로 해결하고 싶긴 했다. 서영은 지갑을 챙겨 지훈을 따라나섰다. 그들의 뒤에 한 남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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