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은 오늘 한 가지를 배웠다. 미래는 함부로 엿보는 게 아니다. 에슨다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녀의 생명력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마치 구슬에게 대가로 수명이라도 바치는 것 같았다.
‘무서운 관음 구슬……!’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가혹함에 메일은 점차 망설이기 시작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정말 저대로 계속하게 둬도 되는 건가. 생명은 소중한 건데. 망설임이 걱정과 초조함을 거쳐 결국 말리자는 결심으로 이어졌을 무렵 에슨다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이어 에슨다가 외쳤다.
“……됐다!”
차마 두 눈뜨고 보기 힘들었던 그녀의 노고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구슬이 변했다. 불투명하고 탁하던 구슬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투명해져 사방으로 은은하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확연한 변화에 메일이 눈을 깜빡 크게 떴다.
“자, 이제 미래를 보여드릴게요!”
비지땀을 쏟으며 고생한 사람답지 않게 에슨다의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무리 중 누군가가 그녀의 비즈니스 정신을 칭찬했다. 에슨다는 이마 높이로 들고 있던 구슬을 명치 어림으로 내려 메일과 황제에게 내밀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구슬로 향했다. 구슬 안쪽에 맺힌 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또렷해졌다.
곧 메일이 먼저 감탄을 뱉었다.
“와……!”
아이가 보였다. 아이랄지, 소년이랄지. 나이를 추정하자면 열 살 전후인 듯했다. 아이는 작은 구슬 속에서도 찬연하게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래의 배경이 야외인지 아이의 머리 위로 눈부시게 볕이 쏟아졌다. 잎사귀보다 푸른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반을 닮았어요.”
“글쎄, 내가 보기엔 그대를 더 닮은 것 같은데.”
백색에 가까운 금발에 선명한 녹안. 아이의 외양이 시사하는 것은 명백했다. 메일은 저도 모르게 구슬로 바짝 얼굴을 붙였다. 구슬 속의 아이는 무얼 찾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고갯짓에 따라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이 가볍게 어깨를 스쳤다.
메일이 중얼거렸다.
“신기해요.”
“구슬이, 아니면 아이가?”
“둘 다요.”
메일은 내심 생각했다. 외동인 걸까. 나는 훗날 아들만 한 명 낳나. 생각하다가 곧 귀를 빨갛게 물들인다. 먼 듯 멀지 않은 듯한 미래였다.
“아무튼 다시 봐도 판박이야. 반, 솔직히 반 어릴 때랑 똑같죠?”
“그대를 더 닮았대도.”
“그럴 리가요? 눈동자는 저와 비슷하긴 하지만, 다른 부분은 누가 봐도 반을 빼닮은걸요.”
“이 애는 그대와 가장 큰 공통점이 있어.”
“뭔데요?”
“눈부신 점.”
“으악!”
“반짝거리는 점도.”
“그만해요!”
그때 구슬에 맺힌 상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곧 사라져 버렸다. 메일은 눈을 깜박였다. 애초 에슨다가 ‘잠깐’ 엿보는 것이라 설명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미래를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은근히 아쉬운 기분에 메일은 구슬이 도로 불투명해지고도 잠시간 눈을 떼지 않았다. 곧 에슨다가 구슬을 품에 갈무리했다. 능력을 선보인 것이 보람찬 모양인지 그녀는 빙긋 웃고 있었다.
“어떠셨나요?”
“……에슨다.”
“말씀하세요.”
“대단해요. 정말 신기했어요. 놀랍기도 하고.”
“말을 놓으시라니깐.”
“반은 어땠어요?”
“신선하더군.”
“크흠, 어흠.”
에슨다가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입가가 실룩거리며 미소가 짙어지는 것이, 받은 감상평이 나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뒷머리를 잠깐 긁적이더니 이내 작은 고백을 꺼내놓았다.
“사실 저도 좀 기뻐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응?”
“구슬에 비치는 미래는 무작위거든요. 그러니까…… 늘 좋은 장면만 나오는 건 아니라는 뜻이죠.”
저번에 에슨다가 혼신의 힘을 다해 불러냈던 어떤 사람의 미래는 하필 폐인 같은 몰골로 불법 경매장에서 돈을 탕진하던 비참한 장면이었다. 장밋빛 앞날을 꿈꾸고 있던 그는 길길이 날뛰며 미래의 자신에게 내야 할 화를 눈앞의 에슨다에게 쏟았다.
“복채로 뺨을 맞았었답니다. 웃기죠?”
“그래서 가만 뒀어요?”
“그 손님, 아니, 손놈이요? 당연히 가만 안 뒀죠.”
자비롭게 목숨만 붙여 주었다며 에슨다가 덧붙였다. 메일이 짤막하게 평했다. 잘했어요.
“아무튼 그럼…… 이번엔 운이 좋았던 거네요? 구슬에 비친 미래 말예요.”
“그렇게 볼 수도 있고요, 아니면.”
“……?”
“미래에 어둡거나 불행한 일이 전혀 없는 것일 수도 있죠. 그럼 필연적으로 구슬엔 밝은 장면밖에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에슨다는 사회를 현명하게 살 줄 알았다. 달리 말하면 듣기 좋은 말을 잘한다는 뜻이다. 아부, 혹은 고객 접대용 멘트 정도라는 걸 알면서도 메일은 풋 웃음이 나왔다. 말마따나 미래가 밝은 장면으로만 가득하다면 그만한 축복도 없을 것이다. 혼자 걸어갈 길이 아니라서 더욱.
“고마워요, 에슨다.”
“뭘요. 그럼 짧은 만남이었지만 영광이었습니다. 말씀하셨던 조건은 탑주 자식에게 꼭 전달하도록 할게요. 남은 시간도 모쪼록 즐겁게 보내시길!”
에슨다는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메일은 가벼운 목례로 멀어지는 상대방을 보냈다. 궁금했던 구슬의 사용법은 충분히 보고 체험했다. 달리 용건이 남은 것도 아니니 구태여 더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
마침 바람이 불었다. 강하지 않은 바람에 에슨다의 제멋대로 자란 넝쿨 같은 검은 머리가 흩날렸다. 메일은 문득 그녀의 일행이 온통 검은색으로 옷을 맞춰 입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도 갈까요?”
메일이 황제를 돌아보며 물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으니 날이 곧 어두워질 것이다. 벌써 아까보다는 석양이 약해져 있었다.
메일의 말은 꼭 이만 황성으로 돌아가자는 뜻은 아니었다. 오해받아 도망치느라 웬 외진 골목까지 들어왔으니 축제를 마저 즐기려고 해도 일단은 장소를 옮겨야 했다. 그때 황제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메일.”
“네?”
의아해하던 메일은 금방 직감했다. 앞서 구슬 도둑으로 오인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기 직전, 황제는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하려고 했었다. 그때 방해받아 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 다시 꺼내려는가 보다. 추측한 메일이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어스름한 노을빛이 황제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귀에 걸고 있던 귀고리를 거칠게 잡아 빼 부숴 버렸다. 메일이 깜짝 놀랐다.
“반?”
“할 거면 내 얼굴로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아니, 그렇다고 부술 것까지야. 그보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맴도는 의문은 본래의 이목구비로 돌아와 석양을 받아 내는 연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쏙 들어갔다. 그림자마저 근사하게 졌다. 메일의 가슴이 빠르게 박동했다.
“……뭔데요?”
“메일. 알다시피 나는 황제야. 나와 혼인하면 그대는…… 황후가 되겠지.”
당연한 이야기였다. 메일은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황제가 말했다.
“할 일이 많아질 거야. 황성의 내실을 그대가 다스리게 된다는 의미니까.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덜 자유롭고…….”
“…….”
“원치 않은 책임과 부담이 그대를 무겁게 할지도 몰라.”
“…….”
“그래도…… 괜찮다면.”
황제는 한 호흡 쉬었다.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이내 다시 입을 연다.
“함께해 주겠나? 앞으로, 평생을.”
메일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긴 속눈썹 아래 녹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감추어졌다 드러났다.
화려한 꽃다발이나 반지는 없어도 이건 분명 청혼이었다. 황제는 새삼 그녀에게 고백하고, 구애하고 있었다. 고개를 가로젓는다고 한들 과연 이제 와 놓아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나 어쨌든 그녀의 의사를 묻고 있었다.
메일은 침묵을 지켰다. 말없이 손을 들어 올린다. 양쪽 귀에서 귀걸이를 빼내자 머리색과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상태로 메일이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뭘 물어요?”
“…….”
“애도 봐 놓고.”
“어감이 좀 이상한데.”
“그리고 반이야말로 각오해야 할 거예요. 괜찮겠어요? 내가 황후가 되면…….”
메일이 씩 웃었다.
“일 년에 최소 하루는 ‘나무 심는 날’로 제정해 버릴 텐데. 국고를 열어 제국민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넓고 아름다운 정원도 만들 거고요, 황성에 있는 정원도 지금보다 훨씬 풍성해질 거예요. 식물을 막 대하는 사람은 잡아다 처벌도 할 거고.”
“…….”
“감당할 수 있겠어요?”
메일의 표정이 익살스러웠다. 그러나 꼭 농담은 아닌 것처럼 들리는 이유는 뭘까. 황제는 곧 소리 내 웃었다. 그가 대답했다.
“기대하던 바야.”
땅거미가 졌다.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 서로를 응시하다 이어 입을 맞췄다. 퍼붓듯 키스하는 두 사람에게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때 아까 둘을 아니꼽게 쳐다보고 지나쳤던 행인이 다시 등장했다. 어쩌다 이런 외진 길을 걷게 됐는지, 우연히 두 사람을 발견한 행인은 이번엔 우뚝 멈춰서 자기 눈을 비볐다. 비벼도 눈에 보이는 광경이 달라지지 않자 충격으로 입술을 부들거리더니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에이, 잘 살아라. 천년만년 행복하고 떨어지지 마. 속으로만 중얼거려 들리지는 않을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