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136)화 (136/144)

해가 눈부셨다. 황제는 반테르가 고백을 무사히 마치면 휴일을 주겠다던 약속을 지켰다. 꽤 오랜만에 얻은 휴가를 반테르는 고민할 것도 없이 리엘라와 함께 보냈다.

오늘 두 사람은 본궁의 정원이 아닌 북쪽 별궁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북쪽 별궁 앞에는 볕이 잘 드는 화원과 커다란 분수, 그리고 연못이 있었다. 리엘라는 다리 위에서 연못을 내려다보다 가끔 잉어가 튀어 오르면 얼른 반테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너도 보라는 뜻이다. 반테르는 그러는 리엘라의 행동이 귀엽다고 서른 번쯤 생각했다.

“춥진 않으십니까?”

“응, 괜찮아.”

“햇볕이 따뜻해서 다행이군요.”

오늘은 날이 좋았다. 아무리 한낮이래도 이처럼 볕이 강한 날은 드물었다. 찬 공기가 데워지니 바람만 불지 않으면 가을이 아니라 마치 봄 같았다.

봄을 닮은 날씨.

그 가운데 반테르의 마음도 봄이었다.

‘오라버니, 솔직히 아직까지 누굴 제대로 좋아해 본 적 없지?’

반테르는 텔리야가 언젠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인정했다. 텔리야는 천재였다. 인간의 내면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비범한 통찰력을 지닌 것이 틀림없었다. 이십여 년을 봐 온 여동생이 다시 보였다.

‘좋아하긴 좋아했겠지. 그런데 오라버니는 연인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폐하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 친구도 좋아하고, 동물도 좋아하고, 빵집에 파는 빵도 좋아하고, 길거리의 잡초도 좋아했잖아.’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특별함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이어진 말에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이제 와 반테르는 그때 그 말이 담고 있던 뜻을 여실히 이해했다.

마침 불어 온 미풍에 앞머리가 날리자 리엘라가 성가신 듯 이마 위를 흐트러뜨렸다. 그 별것 아닌 모습에 시선이 사로잡히고 가슴 한쪽이 뿌듯해졌다. 그 무엇으로도 이 순간과 장면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별하고 유일해서 절실함마저 들었다. 그동안은 알지 못했던 감정이다.

반테르는 충동적으로 리엘라의 금발을 손에 그러모아 입을 맞췄다. 그래놓고는 제 행동에 자기가 얼굴을 붉힌다. 리엘라는 난간을 짚고 연못을 구경하다 그런 반테르를 돌아보았다. 말끄러미 쳐다보는 것에 반테르의 홍조가 더 짙어졌다.

“내 머리카락 좋아?”

“……다 좋습니다. 뭐든.”

“나도 내 머리카락 좋아. 예쁘잖아.”

그야 그렇지. 반테르는 내심 긍정했다. 리엘라에게 예쁘지 않은 구석이라곤 뒤집고 털어 봐도 없을 것이 뻔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예뻤다.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리엘라가 질문했다.

“나는 다 예뻐. 그렇지?”

“당연한 말씀을.”

“어머니도 나만큼 예뻤는데.”

반테르는 순간 소리를 죽이고 집중했다. 리엘라가 가족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잠자코 경청하는 반테르를 옆에 두고 리엘라가 말을 이었다.

“예뻤는데, 안 예뻐졌어.”

“…….”

“그래서 아버지가…….”

먼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리엘라의 목소리는 조금 작고 느렸다. 반테르는 이때 최근에 알게 된 사실 한 가지를 떠올렸다.

“어머니를 내쫓았어. 안 예뻐져서 더는 사랑하지 않는대.”

리엘라의 생모는 3왕비였다. 벨티에의 국왕은 총 세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중 가장 어렸던 세 번째 부인이 막내 공주를 낳았다. 그리고 공주가 다섯 살이던 무렵 폐비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이유는 단순했다. 부정했기 때문이다.

3왕비는 왕이 아닌 다른 사내와 정을 통했다. 고국에서부터 그녀를 오래 모신 호위 기사였다. 왕은 그녀가 원치 않은 시집을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왕비도 호위 기사도 벌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들의 요청에 따라 궁에서 내보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왕은 그렇게 3왕비를 내쳤다. 다만 궁에 남은 어린 딸에게 그 이유를 사실 그대로 알려 주지는 못 했다. 국왕은 왜 어머니가 밖으로 끌려 나갔느냐고 묻는 다섯 살짜리 공주에게 왕비의 부정을 설명하는 대신 다른 핑계를 댔다.

‘헤어지는 거란다. 더는 사랑하지 않아서.’

‘왜요? 왜 안 사랑해?’

‘그건…… 그녀가 더 이상 예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건 왕이 별달리 고심해서 생각해낸 핑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국왕은 몇 년이 지나 자기가 했던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 말이 어린 공주에게 어떤 의미가 된 줄도 모르고.

‘국왕이…… 그랬군.’

반테르는 해당 비화를 알고 있었다. 최근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마음가짐으로 벨티에 왕가에 대해 이래저래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리엘라의 가족사에서 의외로 어두운 부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물론 국왕이 그런 식으로 어린 리엘라에게 둘러댔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리엘라는 특별히 어두운 기색은 아니었다. 표정에도 별반 그늘이 없었다. 그래도 반테르는 공연히 안절부절못했다. 비극적인 가족사를 입에 올린 건 리엘라인데 동요는 반테르가 다 했다.

“공주님, 저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이제 와 국왕의 말이 의미 없는 핑계였을 뿐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이 딱히 의미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머뭇거리다 그는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공주님이 예쁘지 않아도 사랑해요.”

리엘라가 눈을 깜박였다. 긴 속눈썹이 움직이는 것이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이내 그녀가 눈을 반달로 접었다.

“알아. 그래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평소처럼 미소 짓는다. 햇살과 만나 눈이 부셨다. 반테르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역시 이 미소를 평생 지키고 싶다. 전에 없이 간절하고 오래토록 이어질 소망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외길에 놓인 반테르가 마주 웃었다.

“그럼요.”

<외전 1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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