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무슨 소린가. 맥락 없는 요청이었으나 황제는 이 순간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갑갑한 친우를 위해 부러 자리를 만들어주었던 기억이 났다. 어젯밤 메일과 로즈를 무대에서 빼내고 리엘라, 라스카비 알렉시스, 반테르만 연회장에 남겨 놓았다. 반테르가 제아무리 둔해도 그런 형국에 놓이면 뭐라도 깨닫지 않을까 싶어 그랬던 것이다.
메일에게 정신이 팔려 자기가 깔아 둔 판도 잊고 있었던 황제의 표정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뭔가 성과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리엘라 공주 말인가?”
“……예.”
“지금 경의 말은, 그러니까 경이 더는 리엘라 공주를 보필할 자격이 없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왜?”
반테르는 대답하지 않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황제는 답을 채근하는 대신 다르게 물었다.
“어제 공주한테 무슨 짓 했나?”
“예? 아, 아닙니다.”
“안 했어?”
“안 했습니다.”
예상이 틀렸나. 팔짱을 낀 황제가 반테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 못 자고 밤새 고뇌에 시달린 얼굴을 하고 와서는 대뜸 자격이 없다 운운하기에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면 왜 이래?
“한눈파는 사이에 공주가 2층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건가?”
“……아닙니다.”
“그럼 침입자가 난입해서 경의 허술한 호위를 뚫고 공주를 찌르고 도망갔나?”
“그럴 리가요.”
“아니면 저격수가 경이 멍청하게 서 있는 사이 먼발치서 공주를 쏴 맞혔나?”
“왜 이러십니까?”
“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경한테 자격이 없다는 건가?”
“그건…….”
다시 반테르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앞서와 동일한 질문이라 두 번이나 대답을 거를 수는 없었다. 애초 다른 사람이었으면 황제의 입에서 같은 질문이 나오는 순간 무릎을 꿇었어야 한다.
머뭇거리다 결국 반테르는 입을 열었다.
“저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
“어제 공주님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물으셨죠. 안 했습니다. 안 했지만…….”
“…….”
“앞으로 할지도 몰라서.”
고백하는 목소리가 힘겨웠다. 털어놓은 후 반테르는 마치 죄를 실토한 신자처럼 경건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러니 자격이 없습니다. 역할을 거두어주십시오.”
“…….”
황제는 기가 찼다.
‘진심인가?’
아니, 그야 진심이겠지. 그런 성격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반테르는 공주에게 흑심이 생겨서 더는 공주의 곁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들은 것을 정리하자마자 황제는 팔짱을 풀었다. 대신 턱을 매만졌다.
‘이걸 어쩐다.’
눈 밑에 그늘이 지도록 밤새 고민한 게 그거였다니. 황당하기도 하고 반테르답다 싶기도 했다.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저런 걱정부터 하는 게 흔하지는 않지. 그래도 마음을 깨달은 것 하나는 장하다 싶어 황제가 남몰래 조금 웃었다.
‘뭐, 기왕 이렇게 됐으니 도와줄까.’
큐피드 노릇, 한 번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할까. 황제는 반테르의 로맨스가 성사될 가능성을 십에 팔구 정도로 점쳤다. 무턱대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간 지켜봐 온 것과 메일의 말을 토대로 한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조금만 밀어주면 잘될 한 쌍을 서로 빙빙 돌게 만들 수야 있나. 황제는 표정에서 웃음기를 감춘 뒤 입을 열었다.
“좋아, 경의 청을 수락하지.”
“감사합…….”
“단.”
“……?”
“공주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왜 맡은 역할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예?”
반테르의 눈이 커졌다. 이 자리에 서서 대화를 시작한 이래 가장 당황한 얼굴이었다. 황제는 친절하게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다.
“공주한테 곧이곧대로 말하라고, 짐한테 이야기한 것처럼.”
“폐하!”
“공주에게도 알 권리가 있지 않나. 내내 곁을 보필하던 경이 갑자기 말도 없이 그만두면 공주도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
“상심이라니…….”
“안 그럴 것 같나? 누군들 매일같이 얼굴을 보면 정이 드는 법이야. 리엘라 공주처럼 아이 같은 인물이라면 더하지. 어떤 식으로든 정이 든 상대가 하루아침에 관계를 끊어버리면 퍽이나 기뻐하겠군.”
반테르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고 보면 리엘라는 어제 그에게 각종 디저트를 권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거나 관심도 없는 상대와 공유하려는 사람은 없다. 보통은 그랬다.
“자기가 싫어서 경이 일을 때려치운 거라고 생각할지도…….”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공주에게도 아니란 걸 알려 주란 말이네.”
황제는 걸음을 옮겼다. 할 말은 이제 다 했다. 그는 천천히 반테르의 곁을 지나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면서 격려하듯 말한다.
“무사히 이야기하고 오면 보상으로 휴가를 주지.”
농담조이긴 했으나 솔깃할 이야기였다. 욕심 없는 반테르가 유일하게 자나 깨나 탐내는 것이 있다면 바로 휴일이다. 그러나 쌍수를 들고 기뻐해야 할 그는 다른 생각에 빠져 황제의 말이 들리지도 않은 것 같았다.
피식 웃은 황제가 그런 반테르를 두고 걸음을 뗐다. 이런 상관을 둬서 복인 줄 알라는 생색과 자찬이 속에서만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