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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130)화 (130/144)

반테르는 면전에서 저를 모욕하는 대상에게도 치민 적 없는 선연한 불쾌감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마음 같아선 차오른 거부감과 적의를 고스란히 내보이고 싶었으나 그런 것은 철부지 때도 하지 않던 짓이다. 그는 한발 양보해 속내를 드러내는 대신 상대를 무시했다. 라스카비가 없는 것처럼 반테르는 그 너머의 리엘라에게 말을 걸었다.

“공주님, 일행은 어쩌시고 이곳에 혼자 계십니까.”

엄밀히 말해 혼자는 아니었으나 차라리 혼자인 편이 나을 뻔했다. 황제에 의해 반강제로 자유를 얻었으나 제자리로 복귀하려던 그의 발을 묶은 것은 라스카비가 리엘라의 머리카락으로 자연스럽게 손을 뻗던 장면이었다.

닿기 전 머쓱하게 손을 거두긴 했으나 그 행위는 마치 습관 같았다. 그건 어떤 식으로든 가까운 사이였다는 방증이 아닌가. 그때부터 속이 뒤틀렸다. 가슴이 따끔거리기도 했다. 원인만 안다면 당장 제거하고 싶을 만큼 불유쾌한 감각인데, 일찍이 겪어본 적이 없어 반테르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조차 몰랐다.

리엘라는 반테르의 물음에 사슴 같은 눈을 깜박거렸다.

“혼자 아닌데?”

그녀의 부정에 라스카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너 왔잖아.”

“예?”

“다시 갈 거 아니지, 반테르?”

상대의 얼굴을 보려는 듯 리엘라가 몸을 움직여 고개를 내밀었다. 덕분에 라스카비가 가로막은 것은 보기 좋게 무용지물이 되었다. 리엘라와 반테르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반테르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건 방금 전까지 그를 지배했던 불쾌한 감각과는 확연히 달랐다. 유일하게 공통점이 있다면 생소하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갈 거야?”

“아니, 아닙니다. 안 갑니다.”

이게 뭘까. 온통 처음 겪는 감정 앞에서 반테르는 마치 공중에 뜬 연처럼 흔들렸다. 뻣뻣하게 대답을 뱉어 놓고 나서 그는 제 입을 가렸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더워서, 화가 나서. 둘 중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테르는 난데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어쩌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안 간다는 말에 해사하게 웃는 리엘라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는 것이 왜인지 힘들었다.

“공주님.”

그때 라스카비가 뒤돌아 리엘라를 불렀다. 미소가 깨진 그는 실컷 동요하고 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리엘라가 상대를 대하는 것이 정도 이상으로 친근하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방금은 예상을 넘었다. 찰나 그는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 둘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음에도.

“제가 계속 곁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혹 저로는 못 미더우십니까?”

라스카비는 제 안에서 솟아난 유치하고 이기적인 독점욕을 자각했다. 물론 품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그런데 알면서도 쉽사리 통제가 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문득 과시하고 싶었다. 확인받고 싶었다. 특별한 사이였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더할 것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저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해 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오 년. 그 공백이 라스카비의 안에서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볕이 잘 드는 후원에서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작은 공주님의 마음은 순수했다. 너무 순수하고 반짝여서 언제까지나 그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래고 없어지는 것이 상상도 되지 않았다.

“곁에 있어드리겠습니다.”

“…….”

“공주님, 제가…….”

“라스카비.”

리엘라가 라스카비의 말을 끊었다. 순간 라스카비의 시야가 다시 뒤바뀌었다. 후원이, 볕이 사라지고 작은 공주님은 껑충 자랐다. 다 자란 그녀는 더 이상 그때처럼 그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네가 왜?”

리엘라는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였다.

“안 그래도 돼.”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그건 달리 말하면 라스카비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또 다르게 말하면, 라스카비가 사로잡혀 있는 과거의 어느 날이 리엘라에겐 그저 완전히 지난 일에 불과하다는 말도 되었다.

리엘라의 맑은 얼굴은 예전처럼 순수했으나 더 이상 그 안에 맹목적인 열정은 없었다.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라스카비가 눈을 키웠다.

리엘라가 말을 이었다.

“왜냐면 무거운 게 생기면 로즈가 들어줄 거고, 길을 잃으면 메일이 찾아줄 거고, 넘어질 것 같으면…….”

황금색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라스카비가 ‘예전’을 운운할 때부터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반테르는 리엘라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인상을 풀었다. 리엘라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반테르가 잡아줄 거니까. 그래서 괜찮아.”

두근.

한 공간에서 두 사람의 심장이 뛰었다. 완전히 상반되는 감정이었다. 라스카비는 우두커니 서서 눈을 깜박였다. 알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외면했던 현실이 속절없이 그를 덮쳤다.

그는 눈을 감았다. 길게 감았다 떴다. 변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없었다. 고개를 들자 볕 대신 샹들리에의 눈부신 빛이 눈을 아프게 찔렀다.

그는 돌연 깨달았다. 정말 지난 일이었다. 모조리, 전부 세월에 떠밀렸다. 존재했던 것이지 지금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자신이었다.

라스카비가 도로 고개를 내렸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은 찡그리지도, 슬퍼하고 있지도 않았다. 미련이나 괴로움보다는 허망함이 느껴졌다. 그는 특유의 선한 눈매로 과거가 아닌 현재의 리엘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곧 입을 연다.

“만약…….”

그러나 잠시 달싹이다가 금방 다시 다물어버렸다. 바깥으로 온전히 꺼내기도 전에 쓸모없는 말이란 걸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라스카비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렇군요, 공주님.”

“…….”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

“늦었지만, 성년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라스카비는 물러났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이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만 띄우는 것이 아님을 본인뿐 아니라 반테르 또한 어렴풋이 느꼈다.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리엘라 혼자일 것이다.

“다음번엔 왕국에서 뵙겠습니다.”

인사를 끝으로 라스카비는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몸을 더 오래 지켜본 것은 리엘라보다는 외려 반테르였다. 점점 흐려지고 작아진 뒷모습이 사람들 사이에 묻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반테르는 눈을 떼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이 가슴께에 얹힌 듯 똬리를 틀었다. 그때 리엘라가 반테르의 옷자락을 붙잡고 당겼다.

“공주님?”

“발 아파.”

익숙한 투정이었다. 저녁 산책을 다니면서 리엘라가 연약한 체력을 자랑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반테르에겐 야외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내는 쓸데없는 능력이 생겼다.

물론 이곳은 야외가 아니다. 하지만 앉을 곳을 찾기는 더 쉬웠다. 반테르는 주저 없이 가장 가까운 테라스로 리엘라를 이끌었다.

안아서 옮기지 않는 것은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반테르는 리엘라를 안아드는 것이 전보다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아마도 옷자락 끝을 붙잡힌 것만으로도 온 신경이 그에 쏠렸던 제 상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라스카비가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그의 혼란은 식을 줄을 몰랐다.

“춥진 않으십니까?”

“응.”

반테르의 겉옷을 꿰어 입은 채로 리엘라가 대답했다. 품이 넉넉한 재킷은 리엘라의 상체를 남김없이 덮고도 한참 남았다.

리엘라는 춥지 않다고 했지만 반테르는 마음이 다 놓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바람이 찼다. 그는 정복에 망토가 달려 있지 않은 것에 처음으로 불만을 품었다. 어떤 멍청한 놈이 기사 정복에서 망토를 뗀 거야. 몇 년 전 그가 실용성을 이유로 앞장서 제안했었다는 것은 이 순간 기억에서 자취를 감췄다.

의자에 앉은 리엘라가 편안한지 발장구를 쳤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하늘은 어두웠다. 날이 추워질수록 낮 또한 현저히 짧아졌다. 반테르는 어둠이 깔린 난간 너머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리엘라는 그믐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이마에서부터 턱으로 이어지는 옆얼굴의 선이 누가 봐도 미형이었다. 이마는 달처럼 둥글며 환하고 코는 오뚝하면서도 끝이 야무져 부담스럽지 않았다. 인중은 짧고 입술은 도톰하며, 한 줌이나 될까 싶은 턱은 그림으로 그려낸 듯 선이 부드러웠다.

금가루를 개어 빚은 듯한 눈동자나 꿀 같은 금발은 분명 그녀의 미모를 더해 주는 요소였지만, 평범한 갈색 눈에 푸석한 볏짚 같은 머리였대도 리엘라는 충분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었다. 반테르는 특별히 사람 얼굴에 둔감한 편은 아니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리엘라가 흠 잡을 곳 없이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했었다. 괴상망측한 드레스를 골라 입은 것이 아깝다고 느끼기도 했다. 리엘라가 예쁘다는 것은 구태여 상기할 필요는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시선을 빼앗기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더라.

단순히 예쁘다고 느끼는 것과 그에 홀리는 건 다른 문제였다. 반테르는 평범한 심미안을 지녔으나 미인계에는 통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몇 년 전 야만족을 토벌하던 당시, 어느 영지 제일의 미녀가 실수인 척 헐벗고 그의 처소에 숨어들었다가 옷만 빌려 입고 자기 방으로 곱게 에스코트당한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였다.

어떻게 그러느냐고, 예쁜 걸 알면서 어찌 취하지는 않느냐는 주변의 물음에 반테르는 언젠가 명화를 예를 들어 설명한 적이 있었다. 명화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낀다고 해서 꼭 그것을 집에 가져다 걸어두고 싶은 충동이 드는 건 아니라고. 반테르에게 타인의 미모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랬는데.

반테르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훔쳐서라도 명화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탐욕스러운 부류의 마음을. 그들처럼 행동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 심정만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독점욕이라.’

그게 이런 건가. 눈에 들어오는 모든 모습을 제 시야에만 새겨 놓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욕망을 두고 그리 칭한다면, 아마 맞을 것이다. 반테르는 대뜸 고개를 숙였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자 틈새로 한숨이 기나길게 흘러나왔다.

‘하아아.’

돌겠네. 그의 심경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는 그 세 글자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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