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저트가 오직 한 자리에만 놓여 있으면 리엘라는 그 장소에 얌전히 발이 묶인다. 반면 디저트가 이곳저곳 분산되어 있으면?
말해 무엇할까. 드넓은 연회장에서 리엘라는 오늘 이 구역의 방랑자였다. 로즈는 이리저리 바삐 이동하는 공주님을 따라다니며 보필에 열중하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가씨께서 사라지셨다!’
로즈에게 아가씨라 함은 바로 메일이다. 아까 없어졌는데 이제야 알았다. 뒤늦게 부재를 인지한 로즈가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서른 명에서 스물아홉이 된 것도 아니고 세 명이서 두 명이 됐는데 이렇게 자각이 늦은 데는 역시 일당백의 주의를 요구하는 리엘라가 큰 몫을 했다. 로즈는 리엘라가 떨어뜨린 치즈 케이크 조각을 재빨리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공주님.”
“왜?”
“메일 아가씨께서 안 보이십니다.”
“응? 그래?”
“말씀도 없이 어딜 가셨는지…….”
“근데 이거 너무 달아.”
메일이 초코 타르트에 밀렸다. 로즈의 동공지진이 커졌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로즈를 건드렸다.
“로즈.”
“누구…… 마론?”
로즈는 깜짝 놀랐다. 약혼자였다. 연회에 참석한다는 이야긴 못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순간 헛것인가 싶었다. 눈이 마주친 마론이 안경을 고쳐 쓰며 머쓱하게 웃었다.
“왜 여기에 있어요?”
“폐하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건 마론 본인도 잘 모른다고 했다. 다만 조금 전 황제가 그에게 명령을 내려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마론은 수줍은 듯 입을 우물거리다가 자기가 받은 황명의 내용을 털어놓았다.
“약혼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말해놓고 기어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했는지 얼굴을 가려 버린다. 로즈도 사귀고 나서 알게 된 것인데 사실 마론은 천생 부끄럼쟁이였다. 수줍어하는 약혼자의 모습에 심장을 폭행당한 로즈가 잠시 혈압을 진정시킨 뒤 말했다.
“폐하께서 그런 명을 내리셨다고요?”
“네.”
“왜…….”
그 순간이었다. 두리번거리며 리엘라를 찾아 헤매던 라스카비가 마침내 대상을 발견했다. 프로 정신으로 무장한 로즈는 약혼자의 등장에 정신이 팔린 와중에도 리엘라를 향한 주의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성큼 다가온 라스카비가 리엘라에게 반갑게 말을 거는 것을 보며 로즈가 눈을 빛냈다.
‘혹시?’
설마하니 자리를 피해 주라는 뜻인가. 리엘라를 모시며 갈고닦아 온 로즈의 눈치가 이 순간 빛을 발했다. 황제의 의도가 그것이라고 생각하면 메일 아가씨가 도중에 사라진 것도, 약혼자가 난데없는 명령을 받고 저를 만나러 온 것도 전부 설명이 된다.
‘하지만 황제가 뭘 위해서?’
로즈의 삼두박근이 혼란스러움을 담고 박동했다. 황제의 의중을 알기 위해서는 눈치가 좋은 정도가 아니라 독심술은 쓸 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로즈는 라스카비와 인사를 나누는 리엘라를 보며 짧은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자리를 피해 드려야 하나.’
라스카비가 계속 리엘라의 곁에 있을 거라면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알렉시스의 첫째 공자는 평판이 꽤 좋은 사람이었다. 혹 만에 하나 그가 겉과 속이 다른 인사라고 한들, 연회장에는 지금 3왕자도 함께 있고…….
‘모하임 공자도 계시지.’
고민이 끝났다. 로즈는 가련한 약혼자의 손을 잡아주기로 했다. 명령을 받은 이상 수행하지 않으면 그건 신하의 불충이 된다. 로즈는 뛰어난 전사(?)였지만 사랑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약해졌다.
‘믿겠습니다, 라스카비 공자.’
그리고 황제 또한 믿었다. 명령까지 내린 판에 당연히 안전은 담보해두었겠지. 로즈는 뜨거운 눈길로 리엘라와 라스카비를 응시하다 끼어들었다. 그래도 말은 하고 가야지.
“공주님, 대화 중에 실례합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생겨서…… 자리를 좀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메일 찾으러 가?”
대답 대신 나온 물음에 로즈는 순간 감격할 뻔했다. 메일 아가씨, 초코 타르트에 밀린 건 아니셨군요.
“크흠, 예. 바깥을 좀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응, 다녀와.”
리엘라는 묘하게 독립적인 구석이 있었다. 필요에 따라 어디 갈 때마다 늘 사람을 대동하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혼자 남겨지는 것에 별달리 거부감이 없다고 할까. 물론 지금은 라스카비가 있었으니 혼자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로즈가 몇 번이고 이쪽을 돌아보며 멀어지고 나서야 라스카비는 상대가 리엘라의 일행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얼굴을 했다.
“못 보던 전사…… 시녀네요.”
“내 호위야.”
“그렇군요.”
라스카비는 흘끔 시선을 주었다. 사람 사이로 사라진 로즈는 이제 찾으려 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잠깐 복잡한 기색이 그의 안색을 다소간 점령했다 물러갔다. 기억 속에 없는 낯선 인물이 리엘라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에게 새삼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리엘라의 오 년. 그 부재가 이토록 마음을 허하게 할 줄은, 어제까지만 해도 본인조차 몰랐던 사실이다.
‘입맛이 쓰군.’
라스카비는 피식 웃었다. 사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건 원래 리엘라의 버릇이었다. 알면서도 여전히 그 시선에 특별함이 담겨 있기를 바라는 건 제 지나친 욕심일까.
눈을 마주한 채로 라스카비가 리엘라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닿기 직전 행동을 자각하곤 움찔 멈춘다. 그의 미소가 살짝 어색해졌다.
“머리가 많이 기셨군요.”
“원래 길었는데?”
“그런가요.”
“라스카비.”
“예.”
“운명의 상대는 잘 만나고 왔어?”
라스카비가 눈을 깜박였다. 순간 배경이 바뀌었다. 눈부신 샹들리에와 수많은 사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신 햇볕과 손질된 초목이 자리했다. 한낮의 후원. 그곳에서 지금보다 어렸던 라스카비는 말했다.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공주님. 운명의 상대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요.’
열세 살의 공주님은 사람을, 특히 라스카비를 의심할 줄 몰라서 그의 말이면 뭐든 믿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러 간다는 말에 어린 공주님은 순순히 쥐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다.
‘나는 못 가는 거지?’
‘예.’
‘열다섯 살이 아니라서?’
‘……예.’
후회는 없었다. 당시에는 그랬다. 너무 당연한 선택이었으니까. 그는 마땅히 온당한 길을 고른 것이다. 라스카비는 그때 성인이었으며 어린 소녀와 헤어지는 것으로 동요하고 감상에 잠기기에는 지나치게 어른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라스카비는 이제야 그런 의혹이 들었다. 오 년이 지나 그 순간을 다시 회상하는 지금에서야.
“공주님께서는…… 만나셨습니까?”
라스카비는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그건 리엘라에게 이 이상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중의 욕구와 닿아 있었다.
운명의 상대? 굳이 전기가 통하니 뭐니 할 것 없이 단순히 ‘좋아하는 상대’로 치환하더라도 라스카비는 쉽게 긍정할 수가 없었다. 남들 다 하는 정략혼과 한 치도 다를 것 없었던 그의 정혼에 연애 감정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리엘라는 제게로 되돌아온 질문에 고개를 슬쩍 갸웃했다.
“응, 아니?”
“예?”
모호한 답이었다. ‘응’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그때 리엘라가 부언했다.
“가짜 운명의 상대는 만났어.”
“가짜라니요?”
“근데 요새는 헷갈려.”
“그게 무슨 말씀…….”
“어? 저기 있다, 가짜 운명의 상대.”
라스카비는 손쉽게 리엘라의 주의를 잃었다. 눈앞의 상대에게서 시선을 거둔 리엘라가 즉시 다른 곳에 초점을 두었다. 휩쓸리듯 그 이동을 좇아 고개를 돌리는 라스카비의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박동했다.
알고 있었다. 리엘라는 원래 그랬다. 주의가 산만해서 어느 하나에 오래 집중하는 법이 없었다. 그건 대상이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는데, 그렇지만, 그래도 자신은 예외였지 않나.
오 년 전 리엘라에게 저는 항상 예외이지 않았나.
낯설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분 좋은 고동은 아니었다. 곧 리엘라를 따라 눈길을 옮긴 라스카비의 시야로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반테르.”
불과 조금 전 들었던 이름이 도로 귓가에 울렸다.
꽤 먼발치에서도 상대는 쉽게 눈에 띄었다. 여전히 짙은 남색 머리카락으로 단정한 이마를 가리고 기사 정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그는 이제 보니 제법 키가 컸다. 말로 얻은 직위가 아님을 알려주듯 다부진 체격에 허리춤에 찬 검은 뭇 귀족 영식들이 호신용으로 차고 다니는 것과는 한눈에 보기에도 용도가 달랐다. 남자는 마치 로망스에 곧잘 언급되는 이상적인 레이디의 기사 같았다.
순간 저도 모르게 상상 속에서 리엘라와 반테르를 나란히 세운 라스카비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리엘라는 거리가 멀어서 제 부름이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곧 손을 들어 흔들었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반테르의 주의는 애초부터 그쪽을 향해 있었기에 쓸데없는 수고였다. 지켜보던 와중 갑자기 눈이 마주쳐 놀랐던 반테르는 짧게 머뭇거리다 결국 걸음을 뗐다.
간격은 금방 가까워졌다. 목소리가 충분히 들릴 거리가 되자 리엘라가 다시 아는 체를 하려 입을 열었다. 그때 라스카비가 선수를 쳤다.
“다시 뵙습니다.”
앞으로 한 발 나서기까지 하는 것이 반가워서 그러는 게 아님을 그도, 상대도 알았다. 반테르의 발이 우뚝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침묵을 흘려보내고 반테르는 조금 늦게 응수했다.
“자주 마주치는 것 같습니다.”
“인연일까요? 하하.”
라스카비의 넉살 좋은 웃음에 반테르는 화답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럴 만한 인내가 없었다. 그건 이미 상대방이 의도가 훤히 보이는 움직임으로 리엘라를 가리며 앞으로 나섰을 때 바닥났다. 참지 않았다면 라스카비는 진작 바닥으로 넘어져 나뒹굴었을 것이다.
반테르는 장님이 아니다. 라스카비는 웃고 있었으나 그 안에 자리한 것은 경계심이었다. 굳이 감추려는 의지가 없어서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나 두 사람은 과거에 연인이었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특별한 사이였을 수도 있다. 그런 입장에서 낯선 이성의 접근은 당연히 꺼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계? 할 수도 있지. 할 수 있는데.
문제가 있다면 그 행동에 끔찍하게 속이 뒤집히는 스스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