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는 분입니까?”
라스카비는 조금 놀란 눈치로 반테르를 돌아보았다. 그의 놀람은 리엘라가 상대의 이름을 부른 것에서 기인했다. 그는 저보다 약간 눈높이가 높은 반테르를 짧게 살피듯 응시한 뒤 곧바로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라스카비 알렉시스입니다.”
“반테르 폰 모하임입니다.”
라스카비의 놀람이 크기를 더했다. 제국의 주요 인사를 알아두는 것은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당연한 책무였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긴가민가하던 것이 풀네임을 듣자 확실해졌다. 표정을 바꾼 라스카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모하임 공자님이셨군요.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뇨, 저야말로.”
양쪽이 악수를 나눴다. 반테르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의식적으로 인내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조금 전부터 속이 무언가로 콱 막힌 듯 답답한 것은 그저 상황을 착각한 것에서 온 민망함 때문이라 설명하기엔 어딘지 모자랐다.
“왕국에서 오셨습니까?”
“예. 뜻깊은 날이라 축하 사절로 방문하게 됐습니다.”
“공주님과는…….”
반테르는 말을 꺼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순간 무슨 사이냐고 물을 뻔했다. 딱히 그가 그걸 알아야 할 이유도, 상대가 그에 대해 대답해야 할 의무도 없는데 말이다. 그는 미미하게 당황하여 얼른 말을 돌렸다.
“……먼 길 오느라 수고스러웠을 텐데, 고맙습니다. 부디 부족함 없이 머무르다 가시길 바랍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를 빨리 마무리한 반테르가 목례를 건네고 뒤로 물러섰다. 속을 차지한 갑갑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건 일종의 회피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감각이었다.
리엘라는 나타나자마자 다시 사라지는 반테르를 멀뚱히 눈으로 쫓았다. 라스카비가 딱 맞춰 말을 걸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어디 가느냐고 반테르를 불러 세웠을 것이다.
“공주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응? 응.”
시선을 걷은 리엘라가 라스카비를 올려다보았다. 하나로 단정히 묶은 연한 밀색 머리카락에 연갈색 눈동자. 습관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오 년 전의 어느 날과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리엘라는 이제야 회포가 일어난 듯 그에 대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발언을 했다.
“키가 작아졌네, 라스카비.”
“제가 작아진 게 아니라 공주님께서 성장하신 겁니다.”
“그렇구나.”
찬찬히 뜯어보았을 때 라스카비는 변한 것이 없었다. 생김새도, 표정이나 말투도 여전했다. 그런 점에서는 리엘라도 같았다. 다만 눈높이가 달라진 것은 그녀가 자랐기 때문이다.
리엘라는 많이 성장했다. 오 년은 그럴 만한 시간이었다.
“신기해. 훨씬 컸는데.”
“하하, 그랬나요?”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겨나 두 사람을 감쌌다.
메일은 미묘한 기분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저게 과연 단순히 아는 사람의 사이에서 생겨날 만한 기류일까. 메일은 오 년 전의 리엘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당연히 교우 관계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재작년부터 리엘라를 모시기 시작한 로즈 또한 마찬가지였다.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 로즈가 메일에게 속닥였다.
“라스카비라면…… 알렉시스 후작가의 첫째 공자님이 아닙니까.”
“맞아요.”
“공주님과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요. 나도 지금 알았어요.”
“더구나 보통 친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게나 말이다. 메일은 안 그래도 그 생각 중이었다는 것을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표현했다.
‘무슨 사이였을까?’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두 사람이 오 년 만에 만났다는 전제는 명확해졌다. 오 년이라. 그건 꽤 긴 세월이다. 그만한 공백을 거쳐 재회하고도 어색함이나 거리감이 없으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친분을 쌓았어야 할까.
메일의 궁금증이 점점 커져 가는 와중에도 라스카비는 착실히 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많이 자라셨지만 그대로시네요. 요즘도 디저트는 초콜릿 푸딩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아니, 지금은 우유 푸딩.”
“우유 푸딩이요?”
“맛있어. 여기에서 처음 먹었는데, 네모나고 하얀…….”
설명을 하다 뭐가 떠올랐는지 리엘라가 말을 멈췄다. 곧 그녀의 입에서 라스카비와는 전혀 관련 없는 말이 나왔다.
“반테르한테 먹어 보라고 했었는데. 먹었을까?”
“예?”
“라스카비, 반테르가 우유 푸딩을 먹었을까?”
“……글쎄요.”
라스카비가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대화 주제를 멋대로 바꾸거나 상관없는 이야기를 툭 꺼내 놓는 것은 본디 리엘라의 특기라,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한데 왜일까. 이 순간 그것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 것은.
“단 걸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거든? 근데 우유 푸딩은 많이 안 달단 말이야. 라스카비, 반테르가…….”
“죄송합니다만, 공주님.”
리엘라의 말을 끊었다. 라스카비로서는 처음 저지르는 무례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더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리엘라의 입을 통해 나오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이상하게 불편했다.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알렉시스 공자! 여기 있었군.”
그때 라스카비의 말이 낯선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나타난 인물은 훤칠하게 인상 좋은 금발의 젊은 청년이었다. 머리색부터 시작해서 이목구비가 전체적으로 이곳에 있는 누군가를 닮았다. 메일과 로즈가 동시에 아는 체를 했다.
“3왕자님?”
“음? 아, 비제아트 영애. 그러고 보니 제국에 있단 소식을 들었지. 로즈도 오랜만이네.”
“오빠.”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지, 리엘라.”
3왕자는 리엘라에게는 아래에서 두 번째 손위 형제로 그녀와 다섯 살 터울이었다. 네 명의 왕자들 중 생김새가 리엘라와 가장 닮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자리에 있는 이들과 전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다음 다시 라스카비를 쳐다보았다.
“계속 찾았네, 공자.”
“저를 왜…….”
“선물 진상을 나 혼자 하란 말인가? 물론 남들은 그렇게 하더군. 하지만 나는 힘들어. 긴장된단 말이네. 같이 가세.”
“예?”
“자, 어서. 우리 차례가 곧 올 거야.”
여동생과 닮은 것이 얼굴만이 아니라고 할지, 3왕자는 퍽 격식 없이 털털한 사람이었다. 물론 사절단의 대표로 선발된 만큼 리엘라처럼 상식을 무시하고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해하는 라스카비의 등을 밀며 걸음을 옮겼다.
본의 아니게 자리를 떠나게 된 라스카비가 다급하게 리엘라를 돌아보았다. 리엘라는 이 갑작스런 작별이 별반 아쉽지 않은 모양인지 제자리에서 얌전히 손이나 흔들어주고 있었다.
메일은 멀어지는 3왕자와 라스카비를 잠시 쳐다보다 리엘라에게 눈을 돌렸다.
“공주님.”
“응?”
“많이 친하셨어요?”
“뭐가?”
“알렉시스 공자…… 라스카비 공자 말이에요. 예전에 공주님이랑 어떤 사이였어요?”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가 왔다. 메일은 구태여 돌려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에둘러 말하는 걸 리엘라가 알아들어주리란 보장이 없기도 하고. 이 이상 직설적일 수 없는 질문에 리엘라가 순순히 대답했다.
“꽤 친했어.”
“얼마나요?”
“결혼하고 싶다고 했어, 내가. 아버지한테.”
“아, 그렇구…… 네?”
잠깐 인지 부조화가 일었다. 메일과 로즈가 나란히 정지했다. 잠시 후 먼저 마비에서 풀려난 메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들은 것을 확인했다.
“결혼이요?”
“응.”
“그…… 라스카비 공자랑? 그러니까 공주님께서 라스카비 공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국왕 전하께 말씀드렸었다는 거예요?”
“맞아.”
“언제요? ……열세 살 때?”
“응, 그때.”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회오리 같은 깨달음이었다. 왜 열세 살이라는 나이가 걸렸는지 메일은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럼 몇 살 때 만나셨어요?’
‘뭐를?’
‘좋아하는 사람이요.’
‘음……. 열세 살.’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기억은 꽤나 선명한 형태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나누었던 대화가 누락된 부분 없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맙소사. 로즈와 메일이 서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벌어지는 입을 가렸다.
라스카비 알렉시스는 리엘라의 첫사랑이었다.
황제에게 진상되는 선물은 하나같이 평범한 것이 없었다. 단순히 값비싸기만 한 것은 외려 드물었다. 희귀하고 진귀한 것을 넘어 간혹 괴상한 것마저 튀어나오니 연회장의 이목은 자연스레 초장부터 온통 그곳으로 쏠렸다.
반테르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느닷없이 자리를 이탈하고도 별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황제는 턱을 괴고 선물을 구경하다 눈짓으로 반테르의 귀환을 반겼다.
“어때, 경. 미리 허락을 받아두어 다행이지 않나?”
“……면목 없습니다.”
제자리로 돌아온 반테르는 눈을 내리깔았다. 정말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잔뜩 당황스러웠다.
‘대체 내가 왜…….’
아무리 착각을 했었다고 해도 그렇다. 본분도 망각하고 뛰쳐나가다니. 그건 말 그대로 당시 이성이 없었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제가 저지르고도 믿기가 힘들었다. 반테르가 동요를 감추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장소를 의식한 노력이었다.
황제는 모 왕국의 사신이 뒤뚱뒤뚱 걸어 나와 선물을 진상하는 것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리 달려간 보람은 있었나?”
“……오해였습니다.”
금덩이를 내려놓은 풍채 좋은 사신이 물러가고 이름을 불린 다음 사신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붉은 융단 위에 넙죽 엎드려 예를 표한 뒤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오색으로 빛나는 보석이었다.
“오해?”
“제가 나설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저 알던 사이끼리 해후하던 것뿐이라.”
“알던 사이라.”
보석을 바친 사신이 몸을 물리자 다음 차례로 머리가 벗겨진 푸근한 사신이 나섰다. 그가 마련한 것은 마법이 걸려 있어서 알아서 연주하는 하프였다. 황제가 지나가듯 생각했다. 별게 다 있군.
“친해 보이던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이 오해를 할 정황이었다면 상대가 남자였을 게 아닌가.”
“그건 그랬습니다만…….”
“어쩌면 옛 연인일 수도 있겠군.”
그때 선물을 내려놓던 아홉 번째 사신이 깜짝 놀랐다. 반테르가 예고 없이 거세게 기침했기 때문이다. 기침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낯으로 반테르가 손등으로 제 입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