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126)화 (126/144)

“경.”

반테르의 정신은 반쯤 이곳에 있지 않았다. 그건 황제의 부름에 감히 2초 늦게 대답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단정히 정복을 차려입은 반테르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부르셨습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별건 아닙니다. 그냥 걱정이 되어서.”

“걱정?”

황제도 반테르도 채비를 마쳤다. 조금 전 연회장에 사절단이 전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슬슬 출발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차림을 점검하는 시종에게 몸을 내맡기고 반테르가 대답했다.

“예. 아무래도 각국에서 사람이 모이는 날이 아닙니까. 사고라도 생기면 곤란하니까요.”

“흐음. 못 할 걱정은 아니지만…….”

점검을 마친 시종이 후다닥 움직여 문을 열었다. 황제가 앞장서 복도로 나서자 반테르가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이마와 목덜미를 단정하게 덮은 머리카락이 걸음에 따라 조금씩 사락거리며 움직였다. 참고로 그건 반테르가 기사답게 시원하게 밀어버리려는 것을 텔리야가 폭력까지 불사하여 지켜낸 머리길이였다-텔리야는 이 순간에도 그걸 뿌듯해하고 있었다.

“작년에도 그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경이 그렇게 세심한 성정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사서 걱정하는 걸 보니 의외야.”

황제의 말에 반테르가 조금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사서 걱정이라. 그러고 보면 그는 본래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미리 염려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반테르는 들은 것을 곱씹으며 제 유례없는 걱정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점검해 보았다. 답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아아.”

“왜? 특별히 떠오른 이유라도 있나?”

“공주님이 계셔서요. 리엘라 공주님 때문에 유난히 걱정이 된 것 같습니다.”

내내 앞을 보고 걷던 황제의 시선이 잠시 반테르를 향했다. 그 눈길에 반테르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하실 말씀이라도?’ 그 물음이 나왔을 때 황제는 눈을 도로 돌렸다.

“아닌가.”

“예?”

“많이 걱정되나 보군. 리엘라 공주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더구나 혹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개인이 아니라 국가 간의 일로 번질 우려도 있으니까요.”

반테르의 답은 담백했다. 표면상으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대답이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만큼 다른 때보다 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높은 것도 맞고, 리엘라에게 문제가 생기면 왕국과 제국 간의 관계가 틀어질 여지가 있는 것도 맞다. 틀린 얘긴 아닌데 황제는 묘하게 성이 차지 않았다. 정말 그것 때문에 아까부터 그리 정신을 빼놓고 걱정했다고?

사랑을 하면 눈치가 는다. 황제의 경우엔 그랬다. 과거였다면 반테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그이건만 이제는 달랐다. 일정한 보폭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허락해 주지.”

“뭘 말입니까?”

“연회 도중 잠깐의 근무 이탈은 봐주겠다는 소리야.”

반테르가 연미복이 아니라 정복을 택한 건 연회 내내 호위로서 황제의 곁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런 직무를 망각하고 리엘라 일로 곁을 비우게 되더라도 황제는 친히 눈감아주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뜻을 알아들은 반테르가 농이라도 들은 듯 응수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급하면 허락도 안 받고 튀어나갈 것 아닌가.”

“설마요.”

말을 들은 김에 반테르는 상상해 보았다. 바로 곁에 있는 황제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자리를 박찰 만한 급한 일이라. 이어 실소가 터졌다. 영 허무맹랑했다. 살면서 한 번도 그렇게 감정이 앞서는 사춘기 소년처럼 행동해 본 적은 없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제가 여덟 살이었다면 그랬을 지도요. 일단 폐하의 허락을 구하는 것 자체에 자존심이 상했을 테니.”

“이마가 깨진 채로 나만 보면 눈을 부라리던 그 시절 말인가?”

“누차 말씀드리지만 저만 깨진 건 아니었습니다.”

대화가 주제를 바꾸어 가볍게 흘러갔다. 평소와 비슷했다. 그러나 이 순간 올챙이 적 기억 못 하는 개구리 황제가 ‘이 둔한 놈’ 하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는 사실을 반테르는 알 길이 없었다.

곧이어 연회장의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발치서 황제를 발견한 시종이 벌써 긴장해서는 목을 가다듬었다. 황제는 약간 걸음을 늦췄다.

“경, 뭐 하나 묻지.”

“하문하십시오.”

“리엘라 공주를 어떻게 생각하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반테르의 눈초리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한 발 뒤에서 따르는 중이라 의중을 짐작해 볼 만한 상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그런 걸 물으십니까?”

“경이 공주의 산책에 어울리기 시작한 게 벌써 몇 주 전이 아닌가. 짐보다는 경이 공주에 대해 더 잘 알겠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시종의 긴장이 뚜렷해졌다. 그는 행여 실수할까 목을 가다듬고는 입 근육도 미리 풀기 시작했다. 복식호흡을 하느라 배에도 힘이 들어갔다.

반테르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답했다.

“글쎄요. 나쁜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심심한 대답이군.”

들은 답을 평가한 황제가 문 앞에 도착해 섰다. 곧 병사가 문을 열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우렁차게 황제의 등장을 알렸다.

“지지 않는 제국의 태양, 로하이덴 반 드 헬베른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기껏 묻기에 대답했더니 심심하다고 욕먹은 반테르가 겨우 황당한 낯을 감추고 황제의 뒤를 따랐다. 속으로 작은 불평을 하기도 했다. 뭐야.

시야를 채우는 연회장 내부는 예상했듯 화려했다. 오늘따라 고가의 발광석을 달아놓은-틀림없이 으리다 백작의 짓이었다-천장의 샹들리에가 넓은 회장을 눈부시게 비췄다.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경외와 부러움을 비롯한 갖은 감정이 읽혔다.

반테르는 황제를 옥좌까지 수행하는 짧은 시간 동안, 연회장 내에 자리한 사절단의 면면을 놓치지 않고 훑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고 초면인 인물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분명 작년보다 인원이 늘었다는 것이다.

‘역시.’

짐작한 것과 크게 차이 없는 광경이었다. 반테르는 어림잡아 작년보다 삼분의 일 정도는 늘어난 인사들을 새로운 얼굴 위주로 한 명씩 눈에 새겼다. 벨티에 왕국에서 온 사절단에게는 시선이 조금 길게 머물렀다. 대표로 추정되는 남자의 용모는 한 핏줄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리엘라와 꽤 닮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달비언가 후작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반테르는 굳이 들을 필요 없는 연설을 한 귀로 흘리며 눈을 돌렸다. 빼곡히 모인 사람 중에 단 한 명을 찾으면서도 그는 제 행동을 의식하지는 못 했다.

곧 찾던 누군가가 그의 시선 끝에 닿았다. 발견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연분홍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리엘라는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무얼 찾는지-아마도 디저트 테이블이겠지만-작은 머리통을 이리저리 돌릴 때마다 풍성한 금발이 따라 나부꼈다.

리엘라는 오늘도 예뻤다. 강한 조명 탓인지 반짝거리기도 했다. 반테르는 문득 새어 나온 웃음을 헛기침으로 가렸다. 리엘라를 발견한 텔리야가 장소도 잊고 무릎을 꿇는 상상이 생각보다 썩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텔리야라면 충분히 그러겠지…… 음?’

웃음이 멎었다. 멈칫한 반테르가 한 곳을 유심히 응시했다. 찰나 착각인가 싶었으나 금세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광스러운 날에 함께하게 되어 감읍합니다, 폐하. 올해 본국이 준비한 것은 남쪽의 비단 열 필과…….”

축사는 조금 전 마무리되어 현재는 각국의 선물 진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반테르의 귀엔 사신이 뭐라고 떠드는 것 따위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의 시야 안에서 한 남자가 다급한 걸음으로 리엘라에게 접근했다. 이어 순식간이었다. 남자가 팔을 뻗어 리엘라의 어깨를 잡아챘다.

“……!”

반테르의 생각이 끊겼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뛰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정신이 돌아온 것은 인파를 헤쳐 남자의 손목을 막 잡아채려던 직전이었다.

“라스카비?”

리엘라의 목소리가 반테르를 정지시켰다. 그녀의 눈은 똑바로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이름을 불렀다. 그건 누가 보아도 리엘라가 상대 남자와 아는 사이라는 말이었다.

남자를 붙잡아 떨어뜨리려던 자세 그대로 반테르가 엉거주춤 굳었다.

메일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진지한 얼굴로 이 디저트를 먼저 먹을지 저 디저트를 먼저 먹을지 그녀와 상의하던 리엘라가 갑자기 예고도 없이 몸을 돌렸다. 그게 자의가 아니었다는 건 감히 공주님의 어깨를 붙든 낯선 손을 보고선 깨달았다.

처음에는 웬 놈팡이인 줄만 알았다. 국제적인 놈팡이는 과연 다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초면부터 추행으로 시작하다니 뭐 이런 남다르게 과감한 개새끼가 다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평가는 메일이 호신술로 남자의 팔을 꺾어버리려 시도하기 직전 리엘라가 그의 이름을 친숙하게 입에 올리면서 전면 수정되었다.

라스카비.

리엘라는 남자를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건 비단 리엘라에게만 낯익은 이름은 아니었다.

‘라스카비 알렉시스?’

메일은 라스카비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알렉시스 후작가의 장남에 대해 알았다. 본인과 따로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우연히 사교 파티에서 만난 알렉시스 후작이 메일에게 아들 자랑을 내리 늘어놓은 적은 있었기 때문이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던 것이라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라스카비가…….’

말로만 들었던 라스카비 알렉시스는 착해 보였다. 놈팡이라는 오해를 걷어내고 얼굴을 다시 보니 첫인상이 딱 그랬다. 선량한 미남. 그는 그 표현이 애초 그를 위한 말인 것처럼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주님.”

“왜 여기에 있어?”

메일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더 떠올렸다. 라스카비 알렉시스는 오 년 전 유학길에 올랐다. 얼마 전 왕국에 있었을 때도 돌아왔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그가 귀국한 것은 아마 꽤나 최근의 일일 것이다. 대화를 보아하니 리엘라와도 꼬박 오 년 만에 재회하는 모양이었다.

‘오 년 전이면 못해도 열세 살 때 알던 사람일 텐데, 공주님 생각보다 기억력이…… 가만. 열세 살?’

왜 갑자기 그 사실이 걸린 건지 모르겠다. 열세 살. 열세 살이 뭐. 세 살도 아니고 이상할 것은 없는데. 그때 리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선이 라스카비의 뒤를 향했다.

“반테르.”

“……네, 공주님.”

이름을 불린 반테르가 몹시 애매하게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어이하여 들고 있던 손인고하니 파렴치한인 줄 알았던 남자를 붙잡아 제압하려던 손이라 하겠다. 라스카비는 리엘라가 저를 알아보던 순간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반테르의 시선이 리엘라의 어깨와 라스카비의 손에 번갈아 잠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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