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려라 메일 (124)화 (124/144)

“들었습니다.”

“들었다니 왜인지도 알겠구나. 현재 리엘라 공주님이 제국에 계시다. 얼마나 머무실지는 모르겠지만 요새 그와 관련하여 왕국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돌고 있어.”

“…….”

“네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가서 도는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확인을 좀 해주어야겠다.”

“예?”

등장 이후 라스카비가 처음으로 당황한 낌새를 비쳤다. 그도 그랬다. 그는 이제 막 먼 곳에서 돌아온 참이다. 그런 마당에 다시 가는 데만 보름 이상 걸리는 여정에 합류하라는 소리가 당연히 평이하게 들릴 리 없었다. 본인도 미미한 가책을 느끼는 듯 후작의 목소리가 달래듯 부드러워졌다.

“기억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공주님과 알베토 사이에 혼담이 오갔던 걸 말이야.”

알베토는 안드렉스 후작의 막내아들이었다. 경영에는 통 자질이 없었으나 대신 다른 쪽으로 특출한 재능을 보여 후작이 품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나이는 열여덟으로 리엘라와 정확히 동년배였다. 라스카비가 기억을 더듬어 해묵은 사실을 끄집어냈다.

“그건…… 알베토가 열 살이었을 때의 얘기가 아닙니까.”

“그때 처음 말이 나왔을 뿐인 거지. 네가 유학길에 오른 이후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를 거다. 알베토는 그 이후로 왕실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전부 참석했어.”

후작은 잠시 말을 끊고 지난 노력을 회고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딸의 혼사란 무조건 아버지의 결정으로 성사되는 일이었다. 왕족쯤 되면 더 그랬다. 그래서 어떻게든 알베토가 왕의 눈에 들 수 있도록 애써 왔다. 그게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여겼으니까.

그건 어느 정도는 헛되지 않은 노력이라 왕은 부마로서 알베토를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간택전만 아니었다면 아마 올해 초에 혼사를 추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 제국에서 황후 간택전 따위가 열리는 바람에 계획하던 것이 미뤄지게 되었지만, 어쨌든 무산된 것이 아니라 미뤄진 것뿐이다. 후작은 여전히 막내아들이 국왕의 사위가 되는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들인 공이 얼만데 이대로 갑자기 엎어지게 놔둘 순 없지. 소문처럼 정말 제국에 공주님을 노리는 이가 있는 건지 알아봐야 해.”

“……그 혼담 말입니다. 알베토의 의사도 반영된 겁니까?”

라스카비는 본인의 정혼에 제 의지가 없었던 것을 기억했다. 어차피 가문을 이어받을 장자로서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던 일이나, 승계에서 자유로운 동생까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후작은 그러한 형의 걱정을 짤막한 대답으로 손쉽게 불식시켰다.

“그럼. 상사병도 앓았다.”

“……예?”

“머리가 커지면서 눈을 뜬 게지. 또래의 이성이 보기에 공주님의 외모가 평범한 편은 아니지 않느냐. 정말 결혼할 수 있는 거냐면서 어찌나 귀찮게 굴던지.”

“…….”

라스카비는 침묵했다. 뭐, 그렇다면야. 후작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다녀오거라. 믿고 보낼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제국의 귀족쯤 되는 인사가 구태여 계승권도 없는 먼 왕국의 공주를 탐낼 만한 이유가 무엇이겠나 싶지만, 뭐가됐든 확실한 편이 좋으니까.”

“…….”

“국왕께서도 네가 사절단의 일원이 되는 걸 불허하진 않으실 게다. 아니, 외려 반기시겠지. 어릴 적 공주님께서 널 많이 따르지 않았느냐.”

“그랬…… 죠.”

불식간에 떠오른 회상이 머릿속을 점령한 탓에 라스카비의 대답은 조금 끊기듯 흘러나왔다. 내리쬐던 밝은 태양. 허리께를 넘겨 굽이치던 매끄러운 금발. 기억 속 열세 살의 공주님은 소녀보다는 아이에 가까운 나이였음에도 이미 주변의 이목을 끌어 모을 만큼 아름다웠다.

특히 그가 찬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언제나 올곧게 저를 올려다보았던 황금색 눈동자였다. 흐른 세월에 비해 선명하게 떠오른 기억을 라스카비는 이내 눈을 몇 차례 부산하게 깜박여 흩뜨려 없앴다.

“출발은 나흘 뒤로 잡혀 있으니 그때까진 여독을 풀며 푹 쉬도록 해라. 신경 써 준비한 행렬이니 가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을 게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세운 라스카비가 여태 그랬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반쯤 내리깐 속눈썹에 가려진 그의 눈이 어딘지 모르게 복잡한 빛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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