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에서 내렸을 때 리엘라는 저를 마중 나온 이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꽃이 만개하는 듯했다. 반테르는 그때 저도 모르게 슬쩍 눈을 비볐다. 햇빛이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었는데 잠시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반갑고, 찰나 눈이 부셨을까. 이유를 모르면서도 반테르는 그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공주님, 조심하셔야죠.”
“괜찮아.”
미끄러져 넘어질 뻔한 리엘라가 반테르 덕에 균형을 되찾았다. 기울어진 몸을 한 팔로 받쳐다 바로 세우는 솜씨가 능숙했다. 리엘라는 도로 바르게 지면을 디디자마자 치마의 구김을 필 생각도 않고 다시 폴짝거렸다.
“난 안 넘어져.”
“믿음이 안 갑니다만. 더구나 방금 막 바닥에 누울 뻔하시고서.”
“네가 잡아줄 거잖아.”
리엘라는 지금 본궁의 정원에 나와 있는 상태였다. 달이 비추고 맑은 물이 분수대 위에서 낙하하는 정원의 경치는 이전과 비교하여 여상했다.
간만에 추억의(?) 장소를 다시 찾은 것이 기쁜 듯 리엘라는 초입에 들어선 이후 지치지도 않고 내내 폴짝이고 있었다. 드레스 밑단은 진작 풀물로 물들어 난리였다.
반테르는 리엘라의 해맑고 뻔뻔한 주장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이번에도 분수에 빠지시면 큰일이니까요.”
반테르에게는 최근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그게 무엇이냐. 상황만 보더라도 어련히 짐작이 되겠지만 바로 ‘리엘라 수행하기’였다.
전에도 자발적으로, 혹은 우연이 겹쳐 종종 해온 일이긴 했으나 그게 어쩌다 아예 일과가 되었느냐 하면, 그 시작은 바로 얼마 전 황제가 메일과 운치 있는 심야 데이트를 즐기려다 실패한 어느 날로 되돌아간다.
밤 산책에 재미를 붙였던 리엘라는 왕국에 다녀와서도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외출에 대한 열망은 더 강해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딸 사랑이 취미이고 과보호는 특기인 벨티에 국왕이 늦은 시각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고명딸을 가만히 놔두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는 쌍심지를 켜고 리엘라의 밤 나들이를 막았다. 삐친 리엘라가 볼에 바람을 잔뜩 넣어 부풀리고 입을 댓 발 내밀어도 소용없었다.
리엘라는 그렇게 고국에서 지내는 동안 쌓인 불만을 제국에 와서 풀려 들었다. 늑대인간도 아니고 달만 뜨면 밖으로 외출하려 든 것이다. 전적이 화려한-분수 풍덩-리엘라였으니 메일이 마음을 놓지 못하고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공주님이 염려된 메일은 로즈와 함께 리엘라를 밀착 경호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저녁 이후의 자유가 사라졌다.
문제는 황제 또한 정무에 바빠 주로 해가 지고 나서야 시간이 났다는 점이다. 황제는 공주님을 돌봐드려야 한다며 데이트 도중 사라지는 메일의 뒷모습을 야속하게 바라보다 결국 특단의 결정을 내렸다.
‘이제 경에게 야근은 없어. 무조건 정시 퇴근하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왜 갑자기?’
‘대신 다른 특명을 내리지.’
‘예?’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한때 아이 돌보는 게 특기였지 않나, 경?’
‘……예?’
‘아이라고 생각하고 잘 돌보도록. 짐의 미래는 이제 경에게 달렸네.’
‘예에?’
메일이 리엘라 때문에 시간이 안 난다면 문제의 리엘라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면 된다. 물론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으니 신중하게 골라 선택된 것이 반테르였다.
메일 또한 반테르라면 믿을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으니 사실상 반테르에게 선택권이란 없는 셈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리엘라의 경호원, 다른 말로는 보모가 되었다.
‘설마 이게 내 적성인가.’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일과가 되었으니 성가실 만도 하건만 반테르는 별달리 그런 귀찮음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리엘라가 제 눈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 때가 더 불안했다. 앞에 두고 지켜보고 있으면 차라리 안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직업을 정말 잘못 골랐나.’
낮의 업무나 저녁의 일과나 어쨌든 일인 것은 같은데 후자가 훨씬 마음 편하고 즐거우니 당황스러운 노릇이었다. 은퇴하면 보육원이나 차릴까. 반테르가 그런 혼자만의 고민을 하는 사이 리엘라가 폴짝폴짝 걷다가 뒤를 돌았다.
“어떻게 알았어?”
“뭘 말입니까?”
“나 분수에 빠졌던 거. 알았어?”
“메일 영애께 들었습니다.”
“나 그때 감기 걸렸잖아. 너도 조심해.”
리엘라가 나름 진지하게 말했다. 누가 누구한테 충고하는 건지. 헛웃음을 흘린 반테르가 리엘라의 눈에 띄지 않게 손을 움직였다. 풍성한 금발에 달라붙으려던 풀벌레가 그의 손에 운명을 달리했다.
“이젠 괜찮으십니까?”
“감기?”
“예.”
“당연하지. 내가 좀 대단하잖아. 감기도 물리쳤어.”
으쓱하는 태가 귀여워 보이면 눈이 잘못된 걸까. 반테르는 언젠가부터 알아서 납득하는 중이었다. 원래 사람은 어린아이나 작은 병아리의 재롱을 보면 흐뭇하여 웃음이 나게 되는 법이라고. 어린아이도 아니고 병아리도 아닌 것은 나중 문제였다.
리엘라는 콧대를 세우다 다시 쪼르르 발을 놀렸다. 맑은 소리를 내며 물이 낙하하는 분수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수면 안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반테르는 여차하면 바로 상대를 잡아챌 수 있을 법한 거리를 유지했다.
“반테르.”
“네.”
“동전 있어?”
동전이라는 말에 반테르가 잠시 멈칫했다. 갑자기 떠오른 지난 장면이 시간 순으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유독 밝은 보름달이 뜬 날. 그에게서 동전을 받아 대신 분수로 던져 넣은 리엘라는 이제 틀림없이 잘될 거라며 어느 때보다 해사하게 웃었다.
“…….”
귓속말을 듣기도 했었지. 공연히 귓가가 뜨거워져 반테르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척 손바닥으로 귀 가장자리를 쓸었다. 헛기침을 내뱉은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던지시게요?”
“응.”
“동전은 없지만…….”
동전이 없다는 말에 리엘라가 자연스럽게 제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머리에는 루비가 박힌 반달 모양 장신구가 있었다. 뭘 하려는 건지 눈치챈 반테르가 실례되지 않는 선에서 그녀의 손을 도중에 가로막아 내렸다.
“다른 건 있습니다. 동전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동그랗습니다.”
“뭔데?”
반테르는 묵묵히 제 목 부근의 단추를 끌렀다. 이내 슬쩍 힘을 주어 잡아 뜯는다. 그가 즐겨 입는 의복은 주로 제복 형식이라 목부터 아래까지 달린 단추가 많았다. 곧 리엘라의 손바닥 위로 노르스름하고 둥근 것이 두어 개쯤 내려앉았다.
“약간 가벼워서 걱정이긴 하지만…….”
물에 가라앉지 않고 동동 뜨면 어쩌지. 그 정도는 아니려나. 그때 리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뜯은 거야?”
“예? 예.”
“어디서?”
“제 옷에서요. 괜찮습니다. 단추야 다시 달아도 되고, 다른 비슷한 옷이 있기도 하니까요.”
“나도 뜯을래.”
어디의 어떤 흥미를 건드린 건지 리엘라가 의욕적인 낯으로 간격을 좁혔다. 둘 사이의 거리가 한순간에 바짝 사라졌다. 속수무책으로 품을 내준 반테르가 순간 당황했다.
“잠시만, 공주님?”
“뜯는 거 재미있어 보여.”
“별로 재미없습니다. 그리고 생각처럼 쉽게 안 뜯기…….”
순순히 남의 말을 들으면 리엘라가 아니다. 상대가 뭐라고 하던 그녀는 일단 손을 뻗고 봤다. 희고 가지런한 손이 멋대로 가슴께에 닿았다. 아니, 왜 하필 거기. 물론 높이상으로 딱 적당하긴 한데. 간만에 곤혹스러워진 반테르가 몸을 뒤로 물리려다 저지당했다.
“움직이지 마.”
“공주님.”
“잡아당기면 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생각보다 실이 질겨서 어지간한 힘으로는…… 아니, 내가 왜 이런 걸 설명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애초 단추를 보이는 데서 뜯어서 준 것이 시작이니 자업자득이긴 한데 말이다. 반테르는 집요하다 싶을 만큼 따라붙는 리엘라를 어떻게 밀어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했다.
가장 간단하고 빠른 건 어깨나 팔을 붙잡고 떼어내는 거지만 막상 그러려니 또 손을 대는 것이 조심스러워 선뜻 시도할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그러는 와중 리엘라만이 혼자 진지했다.
“왜 자꾸 움직여? 잘 안 되잖아.”
“제가 움직여서 그런 게 아니라…… 어차피 안 됩니다.”
“해봐야 알지.”
“그 말을 이럴 때 쓰시다니…….”
왠지 모르게 눈앞이 팽팽 돌기 시작한 반테르가 결국 망부석처럼 가만히 섰다. 리엘라는 상대가 얌전해진(?) 것이 기쁜 듯 흡족한 얼굴로 단추에 집중했다.
오른손으로 쥐고는 뜯으려고 용을 쓴다. 당연하지만 쉽지 않았다. 낑낑거리다 리엘라가 인상을 썼다.
“왜 안 돼?”
“그러게 제가 안 된다고…….”
“아니야. 가만히 있어.”
리엘라는 가끔 포기를 몰랐다. 얼핏 바람직하게 들리나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쓸데없든, 혹은 남에게 어떤 피해들 주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쓸 곳 없는 오기가 생긴 리엘라가 더 바싹 얼굴을 붙였다.
힘이 아니라 이젠 기술로 실을 풀어내볼 요량인지 리엘라가 입을 다물고 다시 단추 떼기에 열중했다.
반테르는 꽤 복잡한 심경으로 가슴팍을 내어주었다. 조용해진 와중에 품에 안기다시피 가까이 파고든 작은 몸이 난감할 정도로 신경 쓰였다.
‘가만. 왜 신경이 쓰이지?’
꽤나 원론적인 의문이 이제야 들었을 무렵이었다. 갖은 시도 끝에 어김없이 실패한 리엘라가 실망스러운 눈치로 손을 떼었다.
그녀가 목표로 삼은 단추는 얌전히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뜯어진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의복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리엘라는 불만스러운 티를 숨기지 않았다.
“왜 나는 못 해?”
“……원래 잘 안 뜯어지는 겁니다. 원래 그래요.”
“넌 쉽게 뜯었잖아.”
“제가 공주님보다 힘이 세니까요.”
기사와 레이디의 근력이 어떻게 같을까.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리엘라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듯 콧잔등을 실룩거렸다.
“어떻게 하면 나도 힘이 세져?”
“……글쎄요. 세지고 싶으십니까?”
“단추를 못 뜯었잖아.”
“못 뜯으면 어떻습니까. 제가 뜯어드리면 되는데.”
“흐음.”
콧잔등에 진 주름이 조금 옅어졌다. 일견 그도 그러네, 하고 생각한 모양새였다. 단순한 공주님은 잠시 고민하다 곧 표정을 풀었다. 반테르를 두고 굳이 제가 꼭 단추를 뜯어야 할 이유는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시작은 재미있어 보여서였지만 별반 재미도 없었으니.
“그럼 뜯어줘.”
“손에 든 거 먼저 다 던지시면요.”
“맞다.”
이미 단추를 몇 개 쥐고 있었다는 것도 잊었던지 리엘라가 아차 하곤 손을 내려다보았다. 문양이 새겨진 동그란 단추는 사용인이 문질러 광을 내두기라도 했는지 달빛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리엘라는 물끄러미 그것을 쳐다보다 문득 말했다.
“안 던질래.”
“예?”
“왠지 아까워. 다시 보니까 예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