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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117)화 (117/144)

베일디온 공작은 기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실룩거리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누르고 그는 얼굴을 들었다.

“영상구로군요. 한데 외람되지만, 그래서 그것이 어떤 증거가 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것 외엔 달리 나를 몰아갈 수 있을 만한 것이 없다. 확실해.’

여태 후작에게 전언을 남길 때에도 늘 거리의 심부름꾼을 이용해 왔다. 그들은 돈만 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시킨 일을 하는 부류라 아는 것이 전무하여 뱉어낼 만한 자백이 없었다.

서신 같은 물질적인 것은 당연히 남기지 않았다. 공작은 제가 이 일에서 무사히 빠져나갔을 수 있음을 확신했다.

반테르는 영상구를 보고도 의연한 공작의 태도에 별반 당황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영상구를 재생시켰을 뿐이다.

맨손으로 영상구의 상단을 가볍게 감쌌다. 닿은 면적으로부터 소량의 마나를 흡수한 구체가 불투명하게 변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저장된 영상을 불러일으키는 신호였다. 공작은 비웃음을 삼켰다.

‘재생시켜 봤자. 어차피 나오는 영상이라고는 이와 전혀 관계없는…….’

[안심하세요. 황제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 한 명을 무너뜨리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

공작이 고개를 벌떡 쳐들었다. 불신으로 가득 찬 눈이 더할 수 없이 크기를 키웠다. 구체를 통해 허공에 재연되는 장면 속에서는 두 인물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상이 선명하여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이 한눈에도 어렵지 않았다. 대화가 이어졌다.

[……공작을 믿겠소.]

[염려는 놓으셔도 좋습니다. 사용해야 하는 독의 종류는 아십니까?]

[그건 모르오.]

[하긴, 그것까지는 전대 후작께서도 모르셨겠지요.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같은 독을 써야 무대가 한층 완벽해지니 말입니다.]

[…….]

[황제의 눈앞에서 죽는 건 단순히 귀애하던 정부가 아니라 또다시 그의 모친이 될 겁니다.]

“더 듣겠습니까?”

영상을 끊은 반테르가 시간이 아깝다는 듯 물었다. 공작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굳어서 그저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이내 그가 간신히 소리쳤다.

“이,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저건 분명 가짜일 텐데!

소리를 타지 못한 공작의 비명에 답해 주듯 황제가 입을 열었다.

“공작도 만나 보았으니 후작이 어떤 인사인지 알겠지. 겁이 많고 도량이 좁아. 그런 자의 특징이 뭔 줄 아나?”

“…….”

“의심이 많다는 거네. 머리는 나빠도 의심이 많은 탓에 가끔 생각지도 못 하게 허를 찌르지.”

“하지만 분명……!”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공작이 재차 입을 달싹였다. 진짜 영상구는 틀림없이 제가 파괴했다. 몇 번이나 확인했으니 절대 착각일 리 없었다. 맹세를 할 수도 있다. 그럼 도대체 저건…….

그때 무언가를 깨달은 공작이 멈칫했다. 조금 전 재생되었던 영상에서 보인 이상한 점을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털썩.

후작이 그랬듯 베일디온 공작 또한 세우고 있던 무릎에 힘을 빼고 주저앉았다. 기력이 사라진 몸은 균형을 잃었으나 병사가 포승줄을 붙들고 있었기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공작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허망하게 웃었다.

“그런…….”

후작은 공작을 믿지 않았다. 상대가 그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의심으로 똘똘 뭉친 후작은 영상구를 손에 쥐고도 안심하지 못해, 만약을 대비한 복제품을 하나 더 만들어두었다.

영상구는 일반적으로 복제가 가능한 물품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했나. 간단했다. 기존 영상구에 저장된 영상을 재생시켜 그것을 다른 영상구로 찍어낸 것이다.

공작은 기존의 영상구를 파괴했으나 복제품의 존재까지는 몰랐다. 황제가 입수한 것은 바로 그 복제품이었다.

“이송해.”

짤막한 명령이 떨어지고 공작은 누이의 전철을 밟았다. 금수처럼 끌려가던 와중 공작이 분을 못 이겼는지 대뜸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다.

이후 저택을 점령한 병사들이 공작의 심복과 집사를 끌고나와 포박했다. 심복은 말할 것도 없고, 집사는 여태 공녀의 시중을 든 사용인을 주기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도맡아왔다. 둘은 곧 주인과 같은 꼴이 되었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에시스의 유난히 강한 볕이 쨍하니 저택과 마당을 비췄다. 반테르는 임무를 마치고 불란하게 귀환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늘 그렇듯 수려하게 선을 그리는 황제의 옆모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반테르가 물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원수를 잡았다. 그녀는 첨탑이 보이는 장소에서 처형될 것이다. 오랜 악몽의 종식을 알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으니 무언가 감응이 있을 만도 했다. 황제가 대답했다.

“보고 싶군.”

간략하게 흘러나온 한마디는 대상을 언급하고 있지 않았으나, 반테르는 듣지 않고도 누굴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가볍게 웃었다. 공기 중으로 옅은 숨이 흩어졌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반테르는 언젠가 보았던 운세를 떠올렸다. 궁을 방문한 귀족이 점술사를 대동했기에 재미 삼아 복채를 주고 앞으로의 운을 점쳤었다. 있던 지역에서는 용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다던 점술사는 그날 수정구를 한참 쳐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조만간 모시는 이와 연이 닿는 여인이 있을 겁니다. 극진히 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많은 것을 구해 줄 테니까요. 어쩌면…….’

“나라를 구한다기에 용사라도 되는가 했더니.”

“음?”

“아닙니다.”

반테르가 씩 미소 지었다. 실없다는 구박을 받고도 꿋꿋했다. 아무래도 복채를 더 쳐줄 것을 그랬다고, 그는 듣는 사람 없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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