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후작이 어깨를 떨지만 않았어도 반테르는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의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후작의 반응은 공교롭게도 마치 긍정이라도 하듯 또렷했다. 반테르가 기가 차서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지금…… 사감으로 반역을?”
“모르는 새 원한이라도 산 모양이지.”
황제가 남의 이야기라도 하듯 말했다. 어조는 대수롭지 않았으나 내용은 대수로웠다. 반테르는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후작의 꿈이 어릴 적부터 국가 전복이었다는 것이 더 납득이 쉬울 것 같았다. 권력이 아닌 사람을 노렸다고 하기엔 황제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너무 컸다.
“후작, 진짭니까? 정말 원한 게 황위가 아니야?”
“…….”
대답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반테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대체 어떤…… 아니, 아닙니다. 죄인의 구구절절한 사연 같은 거 들어서 뭐 합니까. 안 궁금해.”
“매정하군, 경.”
“그럼 자리를 피해드릴 테니 폐하께선 들으시죠.”
“나도 사실 그다지.”
황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거면 왜 화두를 꺼냈나 싶겠지만 그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 간단했다. 제 사람 보는 눈이 맛이 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걸 확신했으니 되었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후작의 얼굴이 기분 탓인지 조금 전보다 더 허탈해 보였다.
“나는 이제 후작에게 볼일 없네. 그대는?”
황제가 한 발 물러났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이곳에서 후작에게 가장 유감이 커야 할 사람이었으나 그럼에도 제일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 까닭을 찾자면 익숙함 탓일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여태 황제를 노려온 이들은 숱하게 많았다. 그는 이제 그런 이들에게 일일이 동요하지 않았다.
잡았으니 됐다. 처형대에 오르게 될 이에게 황제는 이 이상의 관심을 끊었다. 그는 메일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메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손에 든 함을 내려다봤다.
“저는 있어요. 공범 잡아야죠.”
“심문은 반테르 경이 맡을 거야. 나는, 메일. 어차피 잡힐 공범보다 이제부터 그대와 보낼 시간이 더 중요해.”
다가가 메일에게서 함을 빼앗은 황제가 그녀의 빈손을 제 손으로 채웠다. 순간 메일은 장소를 혼동할 뻔했다.
“저기, 폐하.”
“반이라고 해.”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궁금한데요.”
“갑자기가 아니라 지금까지 기다린 거야. 흉수를 잡으려고 그대가 많이 노력해 주었지 않나. 그래서 범인도 직접 보고, 증거도 확인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지. 이제 둘 다 끝났으니 범인이나 증거보다는 내게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는데.”
“……폐하.”
“반이라니까.”
“죄송한데 잠깐 끼어들어도 됩니까?”
오가는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던 반테르가 도중에 손을 들었다. 왠지 이래야 발언권이 주어질 것 같은 느낌. 황제가 못마땅하게 일축했다.
“안 돼.”
“그럼 허락 없이 끼어들겠습니다. 공범 말입니다.”
안 주려는 발언권을 강제로 찾아온 반테르가 입을 열었다.
“안 계시는 동안 이미 후작이 자백을 끝냈습니다.”
“부지런하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누군가요?”
메일이 물었다. 오히려 그녀가 황제보다 적극적이었다. 안 된다는 말에 불복한 대가로 제게 날아드는 살벌한 시선을 부러 모른 척하며 반테르가 대답했다.
“베일디온 공작입니다.”
“베일디온?”
메일에겐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아니었다. 언제 무심하게 굴었냐는 듯 그가 삽시간에 표정을 굳혔다. 메일을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확실한 건가?”
“위증을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달라진 공기는 언급된 인물이 지니는 중요도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 같았다. 대체 그가 누구기에? 다음 순간 메일의 의문을 해소해 주듯 반테르가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첫 번째 대비인 엘리제 베일디온 공녀와는 손아래 혈육으로, 공녀가 혼인하여 제국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가문 내에서 그녀와 가장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공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공녀의 덕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후작과 손을 잡은 이유는?”
“모릅니다.”
“모른다?”
미온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반테르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러 면으로 연계해 가정해 보았으나 설득력 있는 동기를 찾지 못했습니다.”
“먼저 접근한 쪽은?”
“후작의 주장에 따르면 베일디온 공작입니다.”
“요구한 것이 일체 없나?”
“예. 돕겠다는 의사만 밝혔을 뿐 다른 요구 사항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황제의 시선이 후작에게로 닿았다. 반테르가 말했다.
“원하신다면 추가로 심문하겠습니다.”
고문하겠다는 뜻이다. 황제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판단하기에도 구태여 후작이 말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베일디온 공작이라.”
황제가 이맛살을 구겼다. 공교로운 이름인 것은 둘째 치고 목적이 불명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은원을 따지더라도 이쪽에서 갚으려 들어야 할 일이었다. 상대측에서 이를 무너뜨리려 들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증거를 통해 당장 상대를 죄인으로서 소환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드러나지 않은 동기가 유난히 신경을 건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후작과 결탁할 이유가 없었다. 도대체 뭘 노리고.
“폐하.”
그때 메일이 황제를 불렀다.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무의식중에 목소리에 반응해 상념을 멈췄다.
“왜…….”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봐주세요.”
메일은 들은 것을 정리했다.
“우선 후작과 손잡고 폐하를 노린 공범은 에시스 왕국의 베일디온 공작. 그는 지금은 죽은 사람인 첫 번째 대비의 친 혈육이고, 생전 그녀와 사이가 돈독했어요. 후작에게 먼저 접근하여 그를 돕겠다고 제안했지만 뭘 원하고 그랬는지는 동기가 불분명한 상태. 맞아요?”
“……맞아.”
반테르가 곁에서 훌륭한 정리라며 감탄했다. 메일은 칭찬에 사사하는 대신 조금 전부터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한 의견을 바깥으로 꺼냈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에요. 순전히 추측인데…….”
막역한 사이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불현듯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근거라고는 없어 조심스러웠지만 그래도 말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반테르가 눈을 크게 키웠다.
“그건…….”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하군.”
황제 또한 표정이 변했다. 지체할 이유가 없다. 그가 즉시 반테르를 보며 명령했다.
“지금부터 연락책을 찾는다. 후작저를 점거한 건 길드를 이용해서라도 없었던 사실로 만들고, 색출에 필요한 인원은 아끼지 말고 가능한 전부 동원해.”
“알겠습니다.”
“그, 아닐 수도 있어요.”
생각보다 빠른 전개에 메일이 당황해서 황제를 붙잡았다. 황제는 그에 메일을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이내 끌어당겨 품에 안는다. 그리 껴안고는 속삭였다.
“아닐 수도 있겠지. 어디까지나 확인이니까. 아니어도 상관없어.”
“괜히 실망할까 봐…….”
혹 희망을 주었다 빼앗는 꼴이 될까 메일은 말을 꺼내고 뒤늦게 불안해졌다. 걱정을 읽은 황제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아무래도 메일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제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모든 부분에서 그녀는 황제를 지탱했다. 일의 결과가 어떻던 그는 메일의 존재 덕분에 괜찮을 자신이 있었다.
“실망하면 뭐 어떤가.”
“상처가…… 덧날지도 모르잖아요.”
“안 그래.”
메일을 떼어낸 로하이덴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녹색 눈동자에서 얼핏 염려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사랑스럽다고 말하면 저를 혼내려나.
“안 덧나.”
“…….”
“이젠 아무것도 날 못 무너뜨려.”
“…….”
“그대가 날 떠나는 것만 아니면.”
시선이 길게 이어졌다. 메일은 말 안 듣고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제 심장 소리를 들었다.
한편에 자리한 이성이 장소를 좀 생각하라고 타박했으나, 그마저도 반테르가 후작을 끌고 방에서 나가버렸기에 효력을 잃고 말았다.
다시금 손을 붙드는 온기가 따뜻했다. 문을 여닫느라 들어온 작은 바람이 커튼 끝을 살짝 흔들고 사라졌다. 메일은 조금 천천히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까치발을 들었다.
반테르는 유급휴가를 적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