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은 응접실을 박차고 나왔다. 부디 약조해 달라고 매달리는 이젤린에게는 우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와서는 정신없이 복도를 걸었다.
황제가 보고 싶었다.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이젤린이 꺼내놓은 것은 하나하나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정작 말을 하는 본인은 그 무게를 모르는 것 같았으나 메일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제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워낙 급하게 걸었는지 답지 않게 발이 꼬였다. 메일은 넘어질 뻔하다 창틀을 붙잡고 바로 섰다.
멈춰선 김에 잠시 속을 진정시키듯 숨을 골랐다.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자 호흡은 차분해졌으나 어수선하게 요동치는 마음은 여전했다.
복잡하게 섞인 감정이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게 날뛰었다. 메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볼텐 후작.’
범인을 알았다. 그가 흉수였다.
이젤린은 지방의 친척 가문에 몸을 위탁하고 있던 제게 어느 날 후작이 먼저 접근했다고 말했다.
후작은 수상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나타나서는 그에 못지않게 수상한 제안을 건넸다. 너를 황제의 여인으로 만들어주마.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잃을 것이 없었던 이젤린은 일단 수락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그러자 후작은 그녀에게 몇 가지를 시키고 가르쳤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황제의 여인이 되는 것과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우선 살을 더 빼야 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보기 좋게 가는 편이었던 이젤린은 거의 세 달을 굶듯이 지냈다.
팔다리가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지자 다음은 옷가지에 수를 놓았다. 천도 아니고, 손수건도 아니고, 모양과 역할이 완성된 직조물에 자수로 갖은 문양을 새겼다.
그것이 어느 정도 손에 익고 나자 그때부터는 태도를 배웠다. 도움을 받으면 지나치게 고마워할 것. 실수를 했을 때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사과할 것.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알려주지 않았다.
이젤린이 슬슬 제 행위에 회의감을 느껴갈 때쯤 후작은 그녀를 행사에 참석시켰다. 황제가 얼굴을 비추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이젤린은 처음으로 후작을 신뢰하게 되었다. 황제는 이젤린을 발견한 후 오래도록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후 일사천리였다. 이젤린은 세 번째 만남 만에 친척 가문에서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세한 영문은 몰랐지만 그녀는 마냥 기뻤다.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걸 누리게 되니 그저 즐거울 따름이었다. 후작은 궁에서 지내게 된 그녀에게 조건처럼 몇 가지 당부를 남겼다.
어떤 상황에서도 큰 소리는 내지 말 것.
가르친 태도를 고수할 것.
간혹 황제에게 자수 놓는 모습을 보여줄 것.
지금처럼 앙상한 체형을 유지할 것.
그것만 지키면 계속해서 황제의 곁에 머물 수 있다. 후작은 단언했으며 그건 사실이 되었다. 이젤린은 그렇게 삼 년을 극진한 보호 속에서 지냈다.
그러나 이제 와 이젤린이 상기하게 된 것이 있다. 보호뿐이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준 것은 그것이 다였다. 아끼고 보호해 주었으나 오로지 그것뿐이었다는 사실을 이젤린은 아주 뒤늦게, 타인에게 지난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으며 깨달았다.
그리고 메일의 깨달음은 그녀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메일은 후작이 왜 이젤린에게 그런 행동을 시켰는지, 황제가 왜 이젤린을 발견하자마자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메일은 악몽의 내용을 떠올렸다. 정인의 죽음에 분노한 황제는 범인을 단죄코자 왕국까지 불바다로 만든다.
과거 메일은 황제가 정인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그랬으리라 생각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가 죽자 이성을 잃은 거라고. 하나 지금은 다른 진실이 보였다.
단순한 정인이 아니었다.
황제가 잃은 것은 또다시 그의 어머니였다.
‘어떻게 그런 짓을…….’
황제는 이젤린에게서 죽은 생모를 투영했다. 후작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어쩌면 미래가 되었을지 모르는 악몽 속 결과가 알려주는 목적은 너무도 명확했다.
후작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황제의 트라우마를 난도질하려 들었다. 그를 통해 황제가 미치고 무너지도록.
메일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복도가 끝나고 입구를 통과해 바깥 길을 걸었다. 그녀는 본궁으로 향했다.
후작은 왜 그런 짓을 계획했을까. 황제가 광인이 되어 본인이 얻는 것이 뭐라고. 모반을 위한 초석이었을까? 미치광이 황제라면 옥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메일이 걸음에 속도를 주었다. 흉수의 속내야 잡아서 심문하다 보면 어련히 알게 될 일이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심장이 뛰고 숨이 다시 점차 가빠졌다.
떠나지 않아도 된다.
황제를, 반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정인을 사랑했다가 변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황제에게 무의식속의 어머니를 대신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그를 원하는 것은 더 이상 타인에게서 연인을 빼앗는 행위가 아니다. 이기적인 일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못된 욕심도 아니다.
좋아해도 괜찮았다.
이젠 얼마든지 그래도 상관없었다.
메일은 황제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떠난다느니, 그를 놓는다느니, 그런 다짐들을 전부 없던 것으로 만들듯 그를 힘주어 껴안고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마음이 급하니 걸음도 자연히 그를 따라갔다. 메일은 금세 본궁에 도착했다.
그러나 황제를 만날 수는 없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충직하게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반테르는 거센 갈등의 순간을 겪었다. 그러다 결국 주저 끝에 메일에게 황제의 소재를 알려주었다. 왜 황제가 그곳으로 향했는지, 그 이유 또한 함께.
북쪽 첨탑. 메일은 이번에는 걷지 않았다.
두통이 가셨다. 황제는 우두커니 섰다.
바로 정면에 초상화가 보였다. 파리하게 야윈, 그럼에도 눈부신 은발이나 채도 높은 하늘색 눈동자가 시선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여인이 그림 속에서 웃고 있었다.
‘반.’
머릿속에서 아득한 목소리가 울렸다. 황제는 눈을 내렸다. 초상화 아래에는 협탁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침대. 거기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동그란 탁자. 다시 오른쪽을 응시하면 두어 개의 의미 없는 조각상과 단순한 무늬의 벽장이 보인다.
“……하하.”
황제는 웃었다.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웠다.
“이거였군.”
목소리가 흔들렸다.
“이거였어.”
잔뜩 잠겨 흘러나왔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득 모든 것이 괴로웠다. 서 있는 것도,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것도, 숨을 쉬고 있다는 것도 전부 괴롭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이미 죽어버린 어머니는 제가 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데.
눈물이 뺨을 적셨다. 방울져 턱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황제는 손을 뻗었다. 환상을 건드리듯 침대를 매만졌다. 익숙했다. 별궁의 처소에 있던 것을 다 이리로 옮겨온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건 그녀의 유품이었다. 단연 침대뿐 아니라 첨탑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랬다.
과거 소피아의 방을 이루었던 그녀의 유품들. 그리고 몇 장의 서류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황제는 그것을 흐린 시야로 훑었다. 소피아의 사인. 그때 사용된 독의 종류. 정황. 증거. 종이는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범인이 누구인지를 가리켰다. 그리고 범인을 잡을 수 있도록 증거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
선황이 왜 이 첨탑을 남겨두었는지, 황제는 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왜 구태여 문을 잠가두었는지도.
그는 황비를 사랑했다. 그래서 직접 처형할 수도, 처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없었다. 하나 동시에 제 아이 또한 사랑했다. 그래서 아이가 나중 언젠가, 자신이 죽은 뒤 제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복수를 하려들거든 그것은 도와주려고 했다.
선황은 아무것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이기적이었다. 지나치게 이기적이어서 잔인했다. 황제는 주저앉았다. 무너지듯 주저앉아서 웃음을 뱉었다. 흐느낌이 섞여 나왔다.
“아버지.”
이곳에 없는 이를 부르는 호칭이 공기 중에 허망하게 흩어졌다.
“없는데 어떡합니까.”
닿지 않는 목소리가 허탈했다.
“잡을 범인이 없는데. 죗값을 치러야 할 범인이 이미 없는데 어떡합니까.”
괴로웠다. 괴롭고 아팠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 하나까지 해선 안 되는 행동을 하듯 괴로웠다.
하나 그걸 덜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원망할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아 그를 감싼 모든 감정은 부유하다 다시 그 스스로를 덮쳤다.
그리움. 분노. 슬픔. 죄책감. 허망함. 한데 섞여 무엇이 우선인지도 모르게 폐부를 찔렀다.
‘사랑하는 나의 반.’
그리운 목소리가 아팠다. 들춰낸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일곱 살 아이에게 새겨진 기억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해서 바래진 부분 하나 없이 온전한 장면으로 의식을 점유했다.
탁자와 바닥을 물들이던 선혈. 쓰러져 움직이지 않던 몸. 그녀의 신체가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 어미를 지켜주겠다 몇 번이나 맹세했던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황제는 고개를 숙였다. 한숨 같은 숨이 터졌다. 뺨을 훔쳤다. 손등에 흠뻑 묻어나는 눈물에 현실감이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은 이곳에 있는데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세상이자 전부이던 것이 무너지던 그 순간으로.
“윽…….”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눈가에 열이 올랐다. 환영처럼 어린아이가 나타나 텅 빈 눈동자를 하고 울부짖듯 물었다.
왜 지키지 못했냐고.
나뿐이었는데, 나밖에 없다고 했는데.
내게 지켜달라고 했는데.
지켜달라고…….
“그만…….”
“반.”
어깨를 흠칫했다. 황제는 순간 제가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떨궜던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얼굴이 있었다. 녹색 눈동자가 싱그러웠다. 황제는 찰나 생각도, 동작도 멈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곧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문이 열리는 것도 몰랐는데. 정말 환각이 아닌 게 맞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을 뻗은 황제가 메일을 끌어안았다.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마에 체온이 닿았다. 아, 실체가 맞았다. 거짓말처럼 통증이 힘을 잃었다.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메일.”
“……네, 반.”
“……메일.”
불현듯 첨탑을 연 이유를 상기했다. 이 사람 때문이었다. 이 온기를 놓치기 싫어서 그랬다. 이 자리에 어떤 고통이 산재하고 있더라도 이 사람을 붙잡을 수 있다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메일.”
대답 대신 그녀는 팔을 들었다. 그리고 그를 감싸 끌어당겨 안는다. 순간 뭔지 모를 안도감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황제는 숨을 내뱉었다. 이제 힘들지 않았다. 더는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메일.”
되새기듯 몇 번이고 입에 담았다. 같은 울림이 반복되어도 전혀 지겹지 않았다. 세상을 잃고 자책감과 상실감에 존재 의의를 잊었던 아이가 세상을 다시 찾았다. 다른 세상이 있었다. 과거가 아닌 지금의 그에게 전부가 되어주는 것이 있었다.
심장 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눈을 감았다. 살아갈 이유가 그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