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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일 (109)화 (109/144)

한 여자가 있었다. 말수가 적고 얌전했다. 감정이 격해져도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으며 늘 조용조용했다. 취미는 자수 놓기. 손수건이나 특별한 형태가 없는 천보다는 옷에 수놓기를 좋아했다.

한 아이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닌 재능이 남달랐다. 한 노파는 아이를 보고는 하늘이 될 관상이라고 말했다. 노파는 입을 잘못 놀린 죄로 쫓겨났다. 아이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별로 없었으나 아이는 괜찮았다.

다시 한 여자가 있었다. 조용하고 수놓기를 좋아하는 여자. 그녀는 아이의 엄마였다. 모자는 크고 화려한 궁에서 살았다.

궁은 대단히 넓고 아름다웠으며 동시에 적막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는 복도는 해가 지면 서늘하고 황량하였으나 모자는 크게 쓸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그녀에게는 아이가 전부이자 버팀목이 되었다. 모자가 함께 있을 때면 그곳은 장소가 어디든 더 이상 삭막하지 않고 고즈넉했다.

그러나 외롭지는 않아도 여자는 간혹 무서움을 탔다. 특별히 저를 위협하는 것이 없었음에도 그녀가 때때로 악몽에 시달린 것은 아마 타고나길 겁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식은땀이 등을 적시는 무서운 꿈을 꾼 날이면 여자는 제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힘주어 꽉 끌어안고는 말했다.

“날 지켜줄 사람은 너뿐이야. 반, 네가 꼭 이 엄마를 지켜주렴.”

어린아이는 무조건 그러겠노라 했다.

여자의 이름은 소피아 알베체. 몰락한 자작 가문의 독녀이자 제국의 세 번째 황비였다.

소피아는 열여덟 살에 궁에 들어왔다. 황제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동정심과 일종의 책임감으로 식을 올렸다. 소피아는 마차 사고로 양친을 잃었다. 사고를 낸 귀족은 황제의 예속이었다.

황비가 된 소피아는 죽은 듯 지냈다. 본래 얌전해서 어디서든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

그녀보다 일 년 먼저 입궁한 첫 번째 황비는 포악한 성정으로 이름이 자자했으나 그렇다고 제게 기어오르지 않는 상대를 구태여 찍어 누르지는 않았다. 소피아의 나날은 별것 없었지만 평온했다.

이변이 생긴 것은 아이를 가졌을 때였다.

소피아가 임신했다. 당연하지만 황제의 아이였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그것을 믿어주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는 오해가 있었다. 황제는 몇 년 전 불임 진단을 받았다. 물론 정말 불임이라면 소피아의 잉태가 가능했을 리 없다. 그는 사실 난임이었다.

하나 진찰 이후 실제로 오랫동안 아이가 들어서지 않자 황제와 주변 이는 궁의의 오진을 철석같이 믿어버렸다.

소피아는 괘씸하게 부정을 통한 여자가 되었다.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별궁 꼭대기에 유폐되듯 갇혔다.

텅 빈 복도는 을씨년스러웠고 사용인이라곤 밥을 해줄 숙수, 수발을 들 시녀 한 명, 그리고 산파가 전부였다. 아이를 출산한 이후에도 상황은 같았다.

아이를 낳고 소피아는 한 달을 울었다. 산파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 몰래 신관을 들여와 아이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이의 세례명은 반이었다.

이후 몇 년이 흘렀다. 아이는 건강하게 잘 성장했으며 남달리 영특했다. 물론 드러낼 길이 없어 그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시녀 한 명, 어미인 소피아, 이 정도가 전부였지만 아이는 달리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이 없었다.

아이에게 세상의 전부는 오직 어머니였다. 그건 어미 또한 마찬가지라 모자의 유대는 유별했다.

시간이 더 지났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소피아의 부정이 오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계기는 단순했다. 술에 취한 황제와 통정한 시녀가 애를 뱄다. 처음에는 당연히 소피아 때와 마찬가지로 다들 시녀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소피아와는 달리 시녀가 순순히 체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억울함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자살을 시도했다.

시늉이 아니라 정말로 죽으려고 했기에 궁은 크게 들썩였다. 황제는 근 십 년 만에 궁의를 불러 재 진찰을 받았다.

결과는 난임. 황제는 크게 통탄했다.

칠 년 만에 아이를 불러 얼굴을 보았다. 이목구비는 어미를 닮았으나 눈동자가 황제의 것이었다. 핏줄임을 확신했다. 죄책감이 황제를 짓눌렀다.

그는 늦었으나 책임을 지고자 했다. 삭막한 별궁의 꼭대기가 아닌 본궁으로 모자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소피아가 거절했다. 아이에게도 저에게도 지내던 곳이 편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수발을 드는 사용인이 느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살던 대로 살겠다 말했다.

황제는 소피아가 이동을 거부하자 본인이 직접 움직였다. 그는 틈만 나면 별궁을 찾았다. 거처에 들러 그녀와 아이에게 극진히 굴었다. 단발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계속되자 소피아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 무렵 질투로 눈이 뒤집힌 사람이 있었다. 바로 첫 번째 황비였다.

그녀는 모멸감에 휩싸였다. 그녀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다른 게 아니다. 제가 하지 못한 일을 감히 남이 해냈다는 사실이었다.

저는 팔 년을 사랑받으면서도 아이를 갖지 못했다. 한데 어떻게 고작 시녀와 뒤늦게 굴러들어온 후비 따위가.

아이가 총명하다는 소식을 듣자 질투는 더 크기를 키웠다. 시녀는 이미 자살 소동의 여파로 유산했다.

첫 번째 황비는 결점 없이 잘 자란 소피아의 아이를 찢어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출신이 결백해진 아이는 이제 황제의 유일한 후계였다. 아무리 그녀가 황궁이 제 것인 것처럼 굴어도 아이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분노와 시기의 화살은 소피아에게로 향했다.

화창한 날이었다. 날씨가 좋아 모자는 간만에 테라스로 나왔다. 볕이 잘 드는 곳에 탁자를 두고 음식을 차렸다. 아이는 요새 어머니가 자주 웃는 것이 기뻤다.

후계로 책봉된 이후 저를 딱딱하게 ‘전하’라고 부르는 것은 싫었지만 그마저도 투정을 부리면 금방 ‘반’이라고 다시 이름을 불러주었다.

사랑하는 나의 반. 따뜻한 목소리가 좋았다. 아이는 행복했다.

행복한 아이의 눈앞에서 소피아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어머니?”

오찬을 먹던 도중이었다. 예고 없이 소피아가 피를 토했다. 이어 고꾸라졌다. 의자가 나동그라졌다. 탁자도, 바닥도 피로 엉망이 되었다. 아이는 어머니를 흔들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릇을 치우러 들어온 시녀가 비명을 질렀다.

탁자 위에는 소피아가 아이를 위해 직접 준비한 토마토 스프가 있었다.

범인은 곧 밝혀졌다. 첫 번째 황비였다. 그녀가 소피아에게 몰래 독을 먹였다. 몰래라는 말은 어쩌면 어폐가 있었다. 그녀는 구태여 증거를 인멸하려 들지 않았다.

황제는 첫 번째 황비를 사랑했다. 일찍 죽은 황후를 제외하면 그녀는 황제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그녀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허술하게 일을 벌였다.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도 황제는 저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여전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의 확신대로 황제는 첫 번째 황비를 벌하지 못했다. 어떻게 사랑하는 이를 제 손으로 치죄할 것인가.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다고 한들 한번 준 마음을 거두기란 쉽지 않았다. 죽은 소피아를 불쌍히 여긴 몇 사용인이 수군거렸으나 그뿐이었다.

이후 아이가 깨어났다. 어미의 죽음을 목격하고 아이는 열이 끓더니 크게 앓아누웠다. 아이는 꼬박 일주일 만에 눈을 떴으며.

“제게…… 어머니가 계셨나요?”

어미를 기억하지 못했다.

황제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편이 나았다. 그는 기억을 잃은 아이가 그것을 되찾지 못하도록 매개를 모조리 정리했다.

소피아는 난산으로 출산 직후 사망했으며 아이가 별궁에서 자란 것은 몸이 약해서 요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른 말을 지껄이는 자는 모두 감옥에 갇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황제를 도운 것은 진실을 아는 이들이 생각보다 적었다는 것이다. 소피아의 부정도, 그게 오해였다는 것도, 첫 번째 대비의 독살도 감히 함부로 떠들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들 쉬쉬했던 탓이었다.

특히 소피아는 몇 달을 제외하고는 내내 고립되어 있었으니 내성에는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조차 몇 되지 않았다.

그렇게 소피아의 세월은 지워졌다.

하나 여기서 첫 번째 황비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황제는 소피아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품은 것은 연민이 다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이는 사랑했다.

핏줄이란 것이 그렇다. 황제는 아이가 애틋했다. 그간 못 해준 것이 떠올라 더 그랬다. 그는 죄책감을 사랑으로 덮으려 들었다.

황제는 아이를 위해 첨탑에 많은 것을 남겨두고 문을 잠갔다. 후에, 나중에 언젠가, 제가 눈을 감은 뒤에 아이가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면 그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평생 떠올리지 못하여 영원히 잠겨 있을 수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첨탑은 그가 죄책감을 덜기 위한 장치였다. 그렇게라도 짐을 내려놓고자 했다.

뒤늦게 탑의 존재를 알게 된 첫 번째 황비가 그것을 없애줄 것을 요구했지만 황제는 들어주지 않았다. 황제는 비를 사랑했지만, 그만큼 아이 또한 사랑했다.

그로부터 십 년. 아이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황제는 병상에 누웠다. 소싯적 크게 앓았던 병이 재발했다. 궁의는 이번에는 손쓸 도리가 없다고 했고 황제는 침대 위에서 반년을 버텼다.

황제가 별세하자 국장을 치른 이후 곧바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열일곱에 아이는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작은 반란이 있었으나 진압이 빨랐다. 새 황제가 손에 쥔 황권은 선황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쯤 첫 번째 황비가 죽었다.

사고사였다. 유람을 나갔다가 마차가 전복되어 그녀를 포함해 타고 있던 시녀 셋이 사망했다. 그녀를 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때부터 황제는 불면증을 앓기 시작했다.

불면증을 무시하고 잠을 청하면 꼭 악몽이 찾아들었다. 악몽은 기억에는 잔재를 남기지 않으면서 황제를, 황제가 된 아이를 괴롭혔다. 꿈속에서 그는 심연으로 잠겼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처럼 깊고 어두웠다.

‘반.’

발목을 쥐고 끝없이 아래로 끌어내렸다.

‘날 지켜줄 사람은 너뿐이야.’

심연은 바닥이 없었다.

‘네가 꼭 이 엄마를 지켜주렴.’

바닥이, 없었다.

시간이 더 흘러 스물일곱. 황제는 탑의 문을 열었다. 일곱 살 아이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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