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나 무서움이 뭔지 모르고 살았다. 남들이 겁에 질려 전신이 떨린다고 할 때, 그는 하다못해 추워서 떨어본 적도 없었다.
첨언하자면 통증에도 꽤 무딘 편이라 다치는 것 또한 전혀 겁내지 않았다. 찢어지면 꿰매면 된다는 것의 그의 지론이었다. 물론 어지간해선 찢어지긴커녕 생채기 하나 날 일이 없기는 했다.
그랬는데, 그랬던 황제에게 이변이 생겼다. 그는 처음으로 무섭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배웠다. 메일 때문이었다. 불 꺼진 별궁의 복도에서 그녀를 구해내던 날, 황제는 심장이 제 역할을 잊고 고동을 멈추는 감각을 최초로 경험했다.
전신의 피가 식듯 발끝에서부터 차갑게 굳는 기분. 벼랑 끝에 발을 걸친 듯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한. 두렵다는 건 이런 거였다.
“그게 상상만으로도 나를 믿을 수 없이 섬뜩하게 해.”
네가 다치는 것이 무서워. 황제는 다시 그렇게 속삭였다. 메일은 눈을 깜박였다. 맞닿은 몸으로 옷 너머의 체온과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제 등을 감싸 안은 팔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몸을 지켜내겠다는 듯 견고했다.
“…….”
심장이 뛰었다. 이번엔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눈에 보일 듯 와 닿는 상대의 진심이 벅찼다. 황제의 말은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저게 널 좋아해서 죽겠다는 말이랑 다를 게 뭔가.
메일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황제의 등을 토닥였다. 가슴이 어떤 감정으로 가득 차 허용량을 초과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두려운 것은 상대가 상처 입는 것. 상대가 무서운 것은 내가 다치는 것.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자 예외였다. 남들이 들으면 기적 같은 일이라 할 것이다.
“안 다칠게요.”
“…….”
“그러니 반도 다치지 마세요.”
그 기적을 그저 축복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다치면 안 돼요.”
역시 이 사람이 좋았다. 저를 향해 흐르는 마음이 기뻤다. 입 밖으로 꺼내면 떠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고백은 매번 속에서만 맴돌았지만, 그럼에도 감정은 크기를 키울 뿐이니 이만한 불가항력도 없을 것이다.
메일은 제 불안이 허상이길 바라듯 황제를 힘껏 껴안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곳에 계셨어요?”
산책용 정원에는 걷다가 지쳤을 때 잠시 앉아서 쉴 만한 구조물이 있었다. 금방 헤어지기는 싫고, 그렇다고 계속 서서 이야기할 수는 없고. 두 사람은 낮은 돌담에 걸터앉았다. 메일이 황제를 보며 물었다.
황제는 조금 전 마치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시기 좋게 나타나 메일의 눈을 가리고 그녀를 보쌈했다. 우연이라기엔 퍽 적시였다. 황제가 대답했다.
“우연히.”
라고 말했지만 사실 뻥이다. 기다린 것이 맞았다. 그러나 그걸 실토하면 추가로 설명해야 할 것이 줄줄이 따라붙었기에 그는 천연덕스럽게 만능 핑계로 둘러댔다. 메일은 굳이 정말이냐고 따지지는 않았다.
“그럼 연회에 참석하시려던 길이었네요.”
“뭐…… 고민 중이었지.”
“저는 사실 연회가 목적은 아니었어요. 그리로 향하긴 했지만.”
바람이 불었다. 메일은 말을 이어가다 문득 어깨에 닿는 찬바람에 제가 숄을 챙기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만류할 새도 없이 황제가 부산하게 겉옷을 벗었다.
메일은 거의 반강제로 그것을 걸친 뒤 조금 스스러운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연회가 아니라, 음, 흉수를 꾀어내는 게 목표였거든요.”
“메일.”
“……물론 절대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어요. 맥 경도 곁에 있었고.”
이건 메일의 뻥이다. 그녀는 당시 만에 하나 다치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죽지만 않으면 됐지. 부상을 좀 입더라도 흉수의 꼬리를 밟는다면 남는 장사가 아닐까.
황제와 메일은 서로 상대방은 걱정하면서 자기 몸은 도외시하는-서로가 알면 복장이 터질-공통점이 있었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알아요. 위험한 행동이죠.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약속해.”
“알겠어요, 약속.”
아이처럼 손가락을 걸고 나서 메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요. 오르밀이 성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
메일은 비척비척 문 사이로 걸어 나오던 오르밀을 떠올렸다. 그때는 단순히 놀라느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되짚으니 이상했다.
“처음에는 몰래 숨어들었나 했어요. 밤중에 사용인들만 드나드는 쪽문 같은 건 아무래도 경비가 허술하게 마련이고, 어떻게 꾀를 부리면 들어오는 것 자체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가만 보니 오르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흐리멍덩한 초점이든 불안한 걸음걸이든. 좋게 평가해도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앞선 가정에 문제가 생긴다. 오르밀이 살짝 맛이 간 상태로도 황성에 잠입할 수 있는 꾀를 낼 만큼 총명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난 게 아닌 이상 불가능했다.
“그건 결국 누군가가 오르밀이 성 안으로 몰래 들어오도록 도왔다는 말이 되죠. 제 생각에는…… 그게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메일이 말했다. 추측의 형태를 띠었지만 절반 이상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건 황제 또한 의견을 같이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실은 황제는 오르밀이 내성으로 숨어들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 후작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건 황제가 메일의 안위에 온 신경을 쏟아 붓느라 궁을 감시하는 눈을 전보다 몇 배나 늘렸다는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말단 숙수가 제 거처로 사람 한 명을 숨기는 것쯤 교묘하게 행했다면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배 이상 불어난 감시의 눈은 황성으로 침입하는 거라면 개미 새끼 한 마리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당연하지만 오르밀의 존재감은 개미보다 컸다.
다른 때도 아니고 이 시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오르밀이. 보고를 듣자마자 황제는 의심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오르밀이 숨겨져 있는 곳에 따로 감시를 붙였다. 그리고 고민했다. 어쩔까. 이 상황이 우연이 아니라 실제로 흉수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라면, 오르밀은 필히 성가시게 이용될 여지가 있었다.
단순히 도로 내쫓는 식으로 살려두면 화근이 될 것이 훤했다. 황제는 대상을 어떻게 처리할까 갈등하다 결정을 내렸다. 통제하에서 사고를 치도록 만들기로.
이목이 없는 곳으로 오르밀을 옮겨 그녀의 숨을 끊는 간단한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은 흉수에게 쓸데없는 경각심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르밀이 갑자기 사라져 소재가 불분명해지면 흉수가 제 계획이 들켰음을 가정하고 몸을 사릴 수도 있었다. 두말하면 입 아프지만 꼬리를 밟는 일은 상대가 방심할수록 수월하다.
황제는 그들이 그저 관리 소홀로 일을 그르쳤다고 믿게 만들 셈이었다.
오르밀을 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제는 그녀를 숙수의 거처에서 빼돌린 뒤 연회장으로 유인했다. 사람이 많아야 사고도 잘 일어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때 마침 메일이 다른 일행 없이 본궁의 연회장으로 향한다는 보고가 그에게 들어왔다.
황제가 메일에게 붙인 호위는 맥이 전부가 아니었다. 몸을 숨긴 채 역할을 함께하는 동료가 서넛은 되었으며 그중 한 명은 정보원을 겸했다.
황제는 당연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연회장에서 오르밀이 메일을 마주쳤다간 어떻게 되겠나. 상황 못 가리고 덤벼들 것이 보지 않아도 선했다.
물론 맥을 비롯해 붙여놓은 호위들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황제는 메일에 한해서는 과보호에 사서 걱정하는 것이 특기였다. 못해도 본인이 직접 곁에서 지켜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가 메일의 동선에 맞춰 미리 입구를 선점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다만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 것은 오르밀이 생각보다 빠르게 연회장을 가로질러 입구의 문을 연 것. 그리고 에이미의 개입이었다. 특히 후자가 갑작스러웠다.
계단에서 구른 오르밀은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지 목뼈가 부러졌다. 황제가 메일의 눈을 가려 보지 못하게 했던 장면이었다.
어쨌든 오르밀은 최후를 맞았다. 부러 사고를 일으키도록 만들어 처형시키려고 했던 것과는 썩 달라진 방식이었지만 말이다. 남은 것은 배후였다.
“우연이 아니라면?”
“제 행동에 유감을 품은 누군가의 짓이 아닐까 싶어요. 그 누군가가 제가 찾던 흉수겠죠. 암살자 같은 전문적인 인력을 동원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은 건 예상 밖이지만, 그렇다고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역시 너무 공교로워요. 오르밀을 이용해 저를 노리려던 게 아닐까요?”
“그 의견에 동감이야.”
“그렇죠? 상황이나 결과를 보면 실패한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시도하려 들었다는 거겠죠.”
메일은 표정을 조금 심각하게 굳혔다. 곤란했다. 습격을 받게 되면 그 습격자를 잡아다 배후를 캐낼 생각이었는데, 오르밀을 잡아 심문한다고 뭐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우선 살았는지도 불분명하고-그나마 기대를 걸 만한 게 그녀를 성 안으로 들인 당사자였으나 그마저도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골머리가 아파왔다.
기껏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걸까.
“잡아야 하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네?”
“캐보면 뭔가가 나올 것 같거든.”
“정말요? 오르밀을 내성으로 들인 사람한테서요?”
“그래.”
물론 숙수에게선 나올 것이 없다. 아무리 털어봤자 토해내는 것이라곤 요리 비법 따위가 다일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숙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꼬리를 붙였다.
오르밀을 빼돌린 뒤에도 감시자는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그의 역할은 해당 장소에 은밀히 접근하는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확인한 후에는 보고를 올리고 미행하도록 지시해 두었다.
“다행이에요.”
메일의 표정이 풀렸다. 안도한 낯으로 마음이 놓인 듯 웃는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 말 없이 시선만 길어지자 메일이 물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역시 탑을 열어야겠다는 생각.”
답은 주저 않고 나왔으나 메일이 바로 알아듣기에는 부연이 부족했다. 무슨 탑이냐고 이어 묻자 그것에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짓는다.
열쇠를 얻었다는 전보는 이미 받았다. 황제는 날이 밝기 전에 도착할 반테르를 기다렸다.
에이미는 일전 오르밀이 저지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줄줄이 치죄를 당할 때 그녀가 오르밀로부터 잦은 협박과 구타를 당했다는 주변의 증언 덕에 죄인 신세를 면했다.
증언을 해준 것은 그나마 티끌만 한 의리는 남아 있었던 에나를 비롯한 네 시녀였다.
그렇게 면피하였지만 결국 에이미는 죄인이 되었다. 오르밀을 계단에서 밀어 그녀가 숨졌으니 이번엔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에이미는 전의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맥은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계단 밑 병사의 입을 단속하고 한발 늦게 달려온 경비병과 시신을 정리했다.
뒤늦게 호기심으로 문을 열고 나와 오르밀의 참혹한 몰골을 목도한 영애가 몇 있었기에 연회장은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으리다 백작은 상황을 지켜보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김에 평소보다 일찍 연회의 종료를 알렸다.
에이미의 처분은 공표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해가 달을 밀어내자마자 메일은 생각지도 못 했던 방문객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