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주머니를 털자 모인 동전의 양이 꽤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생각하자마자 리엘라가 그 동전을 전부 탕진했다. 놀라운 속도였다. 순식간에 빈손이 된 리엘라는 아쉬운 기색을 보였고 일행은 동공을 흔들었다. 그때 리엘라의 흥미가 약간 방향을 틀었다.
‘쭉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던지기를 반복하고 나니 이젠 반대로 도로 꺼내는 것에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투명한 분수의 바닥에는 과장을 좀 보내 은화와 동화가 수북했다.
리엘라가 저걸 건질 수 있지 않겠냐며 눈을 반짝였고 메일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닿아요.’
‘아냐, 닿을 것 같아.’
‘안 닿는다니까요. 어림없어요. 안 된다는 데에 매리골드의 잎사귀를 걸 수도 있…… 공주님!’
‘꺄악!’
남의 말 안 듣기로는 진작 경지에 오른 리엘라가 힘차게 팔을 뻗었다가 그대로 균형을 잃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시킬 것이지 본인이 나선 결과는 처참했다. 로즈가 급히 몸을 날렸으나 늦었다. 물이 시원하게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풍덩!
“그러게 안 닿는다고 그렇게…….”
회상은 끝났다. 메일이 한숨을 목뒤로 넘겼다. 늦은 저녁 분수에 입수했던 리엘라는 결국 고뿔에 걸렸다. 자업자득의 예제란 이런 것이다. 메일은 물수건을 아직도 짜고 있는 로즈에게 손을 뻗었다.
“이젠 그만 짜도 돼요. 그러다 마른 수건 되겠어요.”
“아, 네.”
리엘라의 감기는 다행이랄지 증세가 가벼운 편이었다. 열은 미열이고 진찰을 한 궁의 또한 하루나 이틀이면 쾌차하실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소견을 남겼다.
메일은 건네받은 물수건으로 리엘라의 이마를 덮었다. 리엘라가 가늘게 뜬 눈을 깜박였다.
“차가워.”
“얼음주머니보단 이게 덜 차요.”
“목 아파.”
“내일이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죽 가져다드릴까요?”
“맛없어.”
“주방장에게 맛있게 해달라고 할게요.”
아픈 리엘라는 애처럼 투정을 부렸다. 물론 평소에도 비슷했으니 큰 차이는 없었다.
메일은 익숙하게 투정을 받아넘기며 리엘라의 열을 쟀다. 일평생 강인해서 아픈 것과는 인연이 없었던 로즈는 이러다 작고 약한 공주님이 골로 가는 건 아닌가 내리 전전긍긍했다.
메일은 찬물을 새로 받아온 로즈를 보며 말을 걸었다.
“전에도 공주님께서 고뿔을 앓으신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때가 지금보다 심하지 않았어요?”
“그랬었죠. 꽤 크게 앓으셨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증세는 지나가는 정도겠네요.”
“비교하자면 그렇겠지만…… 사실 당시 저는 다른 일 때문에 황성에 없었습니다. 공주님께서 몬스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실제로 보고 싶으시다기에, 몸집이 좀 작은 놈으로 한 마리 포획하느라…….”
“…….”
이쯤 되니 메일은 로즈의 직책이 왜 굳이 시녀인지 궁금해졌다. 그냥 옷이 마음에 들어서 입고 있는 걸까.
어쨌든 리엘라가 앓아누운 모습을 로즈는 실물로는 처음 봤다. 아프다는 표현을 들으면 통상 치명적인 것부터 먼저 떠올리는 강인한 전사는 괜찮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했다.
덕분에 메일은 미운 네 살로 회귀한 리엘라를 챙기면서 로즈의 지나친 걱정까지 달래느라 꽤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중천에 떠 있던 해는 금방 고도를 낮췄다. 리엘라가 색색 잠들었을 무렵 로즈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2차 발표가 있었군요.”
간택 결과가 공개되었다. 두 번째였다. 마흔이 조금 넘게 남아 있었던 후보는 이제 스물 남짓이 되었다.
메일은 고개를 끄덕여 응수했다. 리엘라는 합격이었다.
“한데 결과는 후보 개개인에게 다 알려주는 반면 평가 기준은 여전히 미공개를 고수하는군요. 계속 그러니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대체 어떤 자질에 점수를 주어 합격, 탈락을 나누는 건지.”
“……그러게요.”
“그래도 공주님께서 매번 합격하시는 걸 보면 역시 제국답게 합리적이고 믿을 만한 기준인 듯합니다. 하하.”
“…….”
메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먼 산을 봐야 할 것 같은데 먼 산이 없다.
“아무튼 결과가 났으니 오늘 연회가 있겠군요. 다녀오시겠습니까?”
“응?”
생각지 못했던 주제라 메일이 무방비하게 반문했다. 로즈가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내내 처소 안에만 계셨지 않습니까. 답답하실 텐데 잠시 외출 삼아 다녀오시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공주님께서도 이젠 잠드셨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치면…… 로즈도 마찬가지로 답답하지 않아요?”
“전 괜찮습니다. 낮에 궁의를 부르러 직접 다녀오기도 했고. 이제 제가 쭉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메일은 로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그녀가 왜 이런 권유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로즈는 나름 고마움을 갚는 중이었다. 공연한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를 메일이 친절히 달래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저 때문에 심력을 소모하셨으니 회복하러 다녀오시죠.
그 뜻이다. 메일은 로즈의 의도를 읽고 설핏 웃었다. 그런 마음이라면야.
“고마워요. 그럼 산책이나 조금 하고 올게요.”
확실히 내내 한 공간에서 리엘라의 투정을 받아주느라 진이 빠지긴 한 참이었다. 꼭 연회에 참석하지는 않더라도 근처를 산책 삼아 거닐고 온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메일은 로즈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간단한 외출 채비를 했다. 처소의 문을 열자 바로 옆 벽에 기대어 있던 맥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메일은 새삼 맥의 노동을 실감했다.
“아침부터 서 계셨죠?”
“별것 아닙니다.”
“다리 아프겠어요.”
“괜찮습니다. 한데 어디 가십니까?”
“산책이라도 할까 싶어서요.”
대화를 나누다 메일은 언뜻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맥이 그녀의 곁을 지키는 건 흉수의 습격에 대비해서였다. 문제는 아직도 습격이 없다는 점이다.
‘내가 너무 조급한가?’
메일은 날짜를 셌다. 미끼를 던지고 이틀이 지났다. 셈하고 나니 또 애매했다. 입질이 오기엔 이른 것 같기도 하고, 예민한 사안일 텐데 움직였어도 진작 움직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맥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건 아닐 텐데.’
맥 플러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황성 내에도 몇 없었다. 겉보기에 맥은 그저 평범한 말단 병사였다.
암살자나 청부업자가 고작 병사 한 명을 경계해서 신중하게 군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애초 구태여 병사로 위장시킨 것도 상대가 방심하고 덤비길 바라서였다.
“맥 경.”
“그냥 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지금은 병사니까요.”
“그래요, 맥.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황성에서 내가 어디에 있을 때 맥이 가장 지키기 까다로울까요?”
“예?”
“처소 안에 있을 때 말고, 지금처럼 바깥으로 외출했을 경우에 말이에요. 맥이 나를 보호하기 제일 어려운 곳이 어디죠?”
“그건…….”
답은 금방 나왔다.
“아무래도 연회장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이 많고 복잡할수록 제 운신의 폭이 좁아지니까요. 경계해야 할 것도 많아지고.”
“그렇군요.”
메일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말한다.
“그럼 가요.”
“어딜…….”
“연회장이요. 지금 출발하면 시작할 즈음 도착하겠네요.”
결심이 섰다.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라면 어련히 만들어줘야지.
맥은 당황스러운 낯으로 대화의 흐름을 되짚었다. 왜 그런 결정으로 귀결된 건지 과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메일은 기다려 주지 않고 먼저 걸었다. 곧 맥이 바쁘게 뒤따랐다.